〈 93화 〉 외전 새해
* * *
(외전)
때는 12월 31일 오후 10시.
다음 년도가 되기까지 단 두시간만을 남겨둔 때였다.
하지만 그런 거에는 신경 안쓴다는 듯 둘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중, 갑자기 지은이가 옷장으로 가더니 무언가를 꺼내오면서 말했다.
"시현아. 이거 좀 입어주라."
"..?"
그렇게 지은이가 들이민 것은 놀랍게도 한복이었다.
"갑자기 웬 한복?"
"이제 곧 설날이니까. 입어야지."
"...?"
생전 듣도보도 못한 말에 시현이는 어이가 털렸다.
"아니 요즘 한복을 누가 입어?"
아무리 우리나라의 전통복이라도 솔직히 평범한 일상에서는 거의 입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나 설이나 추석때 한두번 입었던 정도.
그리고 그런 일도 커가면서 자연스레 사라져 오늘날에 와서는 사실상 한복을 입을 일은 없었다.
그리고 지은이도 그걸 알고 있을텐데, 왜 이러는 거지?
"아니 시현아. 너 지금 제정신이야?"
"응? 왜?"
"아니 지금 한복을 점점 안 입어가는 추세이면 거기에 동조를 해서 '나도 안입어야지~' 같은 생각을 품는게 아니라 오히려 나라도 입어서 한복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거 아니야? 그래도 우리나라의 전통복인데 이렇게 점점 안입고 버려져가는 꼴을 보고만 있을거야? 너라고 입어야지!"
"…그래서 본심은?"
"한복 입은 모습 보고싶어요.."
"...."
솔직하게 말하자 시현이는 질린듯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당연히 바보같은 이유일 것 같긴 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뭐 사실 그거말고 다른 이유가 없긴 하지만.
"뭐, 좋아. 아마 이게 올해의 마지막 부탁일텐데, 그 정도야 들어줄게."
"지,진짜?"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연인의 부탁인데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이건 부끄러워서 말하진 않았다.
"그래서, 옷은 어딨어?"
"여,여기."
"그럼 갈아입게 나가있어."
"그…보면 안될까?"
"…뭘?"
뭘 말하는 건지는 눈치 못챘을리가 없지만…그래도 일단 한번은 물어봤다.
그리고 당연히 대답은…
"갈아입는 모습."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미안."
"하지만, 그걸 들어주게 되면 그게 올해의 마지막 부탁이 될텐데, 그럼 내가 한복을 입을 이유는 없어지는 거 아닐까?"
"그,그러네."
"그래. 그러니까 빨리 나가."
"......"
지은이가 패배자에 빙의한듯이 비참하게 걸어나갔다.
좀 불쌍하긴 한데…
하지만 나도 별 이유없이 쫓아낸 건 아니다.
내가 입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감상하면 다 입었을 때의 파앗! 하는 느낌(?)이 없기 때문.
그 약간 개 예쁜 사람이 옷 추천받아서 탈의실에서 그거 입고 나오면 주변인들 다 입 떡 벌어지는 그런 느낌.
그렇다고 내가 개 예쁜 사람은 아니지만..(맞음)
어쨌든 그렇게 난 지은이를 쫓아내고 한복을 입었다.
그 와중 입는 방법이 어려워서 인터넷에 검색해보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겨우 입은건 안비밀.
"시현아. 다 입었어?"
"아니 왜 이리 참을성이 없어 좀 기다려봐."
"벌써 30분 기다렸는데.."
"....."
그 와중 이렇게 참을성없는(?) 지은이의 방해가 들어왔지만 꿋꿋이 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 입고 드디어 나갈 준비를 했다.
당연히 이런 건 말 안하고 서프라이즈로 나가줘야지.
그렇게 마음먹고 문을 당겨서 열었는데…
"꺄악?!!"
"꺅??"
문에 기대고 있던 지은이가 내쪽으로 넘어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에 놀라서 나도 비명을 지른건 덤.
"아니 왜 말도 안하고 나오는…"
순간 짜증이 났는지 지은이가 뒤돌아 화를 내려 했는데…갑자기 날 보더니 얼어붙었다.
(이 문장이 한복을 입은 시현이 삽화로 보이는 최면)
"지…지은아? 왜 그래?"
"........"
"지은아? 아. 나 지금 한복이구나. 어때?"
순간적으로 지은이가 비명지른거 때문에 머리가 하얘져서 한복에 대해 잊고 있었다가 가까스로 떠올리고는 물어봤다.
그리고 지은이는 한참을 벙쪄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예뻐. 그 누구보다도."
뭔가 말할게 너무 많아보였지만 그걸 단 8글자로 압축시킨 느낌.
하지만 그 안에 지은이의 진심은 들어있었고, 시현이는 그걸 진하게 느꼈다.
"헤헤 고마워."
"나 좀 안아봐도 될까?"
"응. 그정도야 뭐."
시현이의 말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지은이는 시현이를 껴안았다.
아주 강하게.
"자…잠깐만…좀만 살살 안아!"
시현이가 뒤늦게 외쳤지만 지은이가 그걸 들어줄 리가 없었고…한참이 지나서야 시현이는 풀려날 수 있었다.
현재 시각은 11시.
내년까지 단 1시간만을 남겨둔 상태였다.
"후…이정도면 만족했다."
"10분을 (풀파워로)껴안고 있었는데 만족 안하면 니가 사람이야?"
그런데…시현이의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
말투부터 눈빛까지. 뭔가 사냥감을 노리는 것 같은.
뭔가 이상함을 느낀 지은이는 일단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어허. 어딜 가려고?"
"아…나 슬슬 잘 준비하러~."
"그래? 근데 그 전에 해야 할 게 있지 않아?"
"뭐…뭔데?"
"너도 입어야지~"
"......"
시현이의 눈빛.
저건 죽더라도 나에게 입히겠다는 눈빛이었다.
"옷이 없는데…?"
"괜찮아~ 내가 입고있는거 입으면 돼."
"크기가 안맞을텐데…?"
"괜찮아~ 이거 꽤나 커. 오히려 너한테 딱 맞을걸?"
"나 입는법 모르는데?"
"괜찮아~ 내가 입혀줄게."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그리고 그런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나의 마음에 박히는 결정적인 한방.
"올해의 마지막 부탁인데…설마 안들어주지는 않겠지~?"
결국 난 포기하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와중 시현이의 한복은 벗기기 싫어서 옷장에 고이 숨겨뒀던 두번째 한복을 꺼내서 입었다.
물론 중간과정을 보이면 흥이 깨진다면서 혼자.
아깐 도와주네 어쩌네 하더니..
이때 나는 왜 시현이가 한복을 입는데 30분이 걸렸는지 알 수 있었다.
지은이가 그렇게 나오자 시현이는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었다.
지은이가 해줬던 거에 절대 뒤지지 않는 수준으로.
그리고 시간이 지나 11시 55분.
다음년도까지 고작 5분밖에 안남게되었다.
그리고 서로를 칭찬하기에 지친 둘은 새로운 대안을 찾았는데…
"엄마한테 갈까?"
"어? 괜찮은데?"
"그래. 세배도 하고 애교도 부릴겸 가자!"
"근데 세배는 양력이 아니라 음력 1월 1일에 하는거 아니야?"
"어…그런가? 그럼 그냥 인사만 드리자."
즉석에서 엄마를 보러가는게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한 둘은 지체할 거 없이 바로 엄마네 집으로 갔다.
어차피 바로 아래층이었기 때문에.
엄마 집으로 간 우리는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자, 우린 누가 온건지 궁금해서 나온 엄마를 볼 수 있었다.
"......."
"어…엄마? 우리 왔어."
"한복 입어봤는데 어때?"
그리고 엄마는 우릴 보자마자 잠깐의 멍때리는 시간을 가지고는 말했다.
"너……"
""너?""
"너…너무 귀엽다 우리 딸들!!!! 엄마보라고 한복 입어준거야?"
순간 빛의 속도로 달려온 엄마가 우리 둘을 양팔로 끌어안았다.
그리고…엄마 보라고 한복 입은건 아니었지만…굳이 말해서 득될 건 없었기에 가만 있었다.
"근데 온 이유는 뭐야? 엄마 귀여워 죽으라고?"
"아니 그…새해복 많이 받으라고…"
"꺅!!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엄마의 껴안는 힘은 지은이와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강했다.
오죽하면 내 반대쪽의 지은이도 말라 죽으려 하는 수준.
심지어 엄마는 한팔로 안는건데도 이정도였다.
지은아 너 아니었으면 나 죽었을 거 같아.
그리고 마침 같은 눈빛을 지은이가 내게 보내왔다.
그렇게 한참을 엄마에게 안겨서 고통스럽게 보낸 우리였지만 그 뒤에 엄마가 기특하다면서(+귀엽다면서)우리 원하는건 전부 들어줬기 때문에 셋이서 만족할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 와중 '만족할만한 시간' 의 마지막은 셋이서 최고급 와인을 마시는 거였는데, 모녀간의 허심탄회한 대화를 한다는 좋은 목적을 가지고 시작했지만…결국 다 술에 취해 뻗어버리면서 마무리되었다.
엄마도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술에 약하다는 걸 알 수 있었던 유익한 시간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