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2화 〉 2부 49화 화해
* * *
다음 날.
잠에서 깬 지은이의 눈에 비친 시현이는 웃는 얼굴에서 무표정으로 바뀌어있었다.
겉보기엔 좀 더 무서워보였지만 지은이는 저게 그나마 기분이 업된거라는걸 눈치챌 수 있었다.
물론 그나마는 그나마일 뿐, 아직도 상당히 기분이 나쁜 상태겠지만.
어쨌든 지은이는 한동안 시현이의 기분을 더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시현아 잘 잤어?"
"응.."
원래라면 여기서 모닝키스를 하거나 좀 더 대화를 이어나갔겠지만 지은이는 쓸데없이 시현이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더 이상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어설프게 뭐 했다가 더 화낼수도 있으니.
하지만 이것은 최악까진 아니어도 절대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확실히 일반적으로 사람이 화가났을 땐 가만히 놔두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순 있겠지만..지금은 일반적으로 화난게 아니었다.
여캠을 보다 들킨 것. 그건 즉 여친을 냅두고 여캠을 보고 있었다는 거였고, 본 사람은 그냥 심심해서 본 거일지 몰라도, 여친은 오만가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나에대한 애정이 식은건가, 아니면 내가 쟤보다 매력이 떨어지는 건가 등등 주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즉, 어찌됐든 여캠을 본 지은이에게 화난 마음이 주긴 해도, 진짜 이러다 헤어지는거 아닌가 같은 불안한 마음도 적지 않게 시현이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그 불안한 마음을 없애주기 위해선 지은이의 애정어린 행동이 필요했지만..
"........"
형식적인 아침인사를 제외하고는 둘에겐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아침 준비할게."
"응."
아침을 준비하고 먹는 와중에도 둘의 사이에는 단 한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지은이는 굳이 시현이를 자극하지는 말자는 마음에서, 시현이는 지은이가 먼저 말걸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사실 원래라면 지은이는 시현이의 속마음을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표정에서 원하는게 대부분 드러나기 때문.
하지만 어제 화난 이후로 시현이는 상시 무표정&웃는 표정을 유지하게 되었고, 표정으로 생각을 유추하는게 불가능해졌다.
지은이가 할 수 있는건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길 비는 것 뿐.
하지만 틀렸다.
밥을 다먹고, 둘은 각자의 방에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도 또 문제가 하나 발생했는데..지은이는 할 게 없다는 거였다.
스마트폰이 없다는 건 상상이상으로 삶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지인과의 연락, 웹 서핑, 여가시간 즐기기 등 수많은 행동에 제한되었다.
그렇다고 컴퓨터를 하자니.. 지금 분위기상 할 수 있을리가 없다.
결국 할 게 없어진 지은이는 오랜만에 책을 피고 공부나 하기 시작했다.
시현이가 자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며칠간 이런 생활이 지속되자, 지은이는 이대론 답이 없음을 느끼고 엄마를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답을 구했다.
"이러다간 결혼식할때까지 화해 못하겠어.. 어떡해.."
"뭘 어떡해? 자업자득이지. 알아서 해결해."
하지만 엄마는 너네의 일은 너네가 해결해야 된다면서 답을 해주지 않았다.
사실 연애경험 1도 없는 엄마가 '난 몰라서 답변을 해줄 수 없다' 라는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둘러댄 거지만, 지은이는 그럭저럭 납득하고는 물러났다.
'그래. 내 일은 내가 해결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와선 이 상황을 어떻게 해쳐나갈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일단 현재 며칠이 지난 상황에서 화가 점점 풀릴 것으로 예상했었던 시현이는 오히려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일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의 행동이 짜증이 났던 걸까?
아니면 나에게 뭔가 바라는게 있지만 내가 안해줘서 그런걸까.
솔직히 전자면 답이없다.
그냥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그니까 제발 후자길 빌면서 후자일 경우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일단 사건을 되짚어보면, 난 밤에 몰래 여캠을 보다가 시현이에게 걸렸고, 시현이는 그 자리에서 내 핸드폰을 부숴버렸다.
그 다음에 잠을 잤고, 일어난 뒤에 지금과같은 냉전(?)이 일어났다.
이 상황에서 나에게 바라는거..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바라는 거...
어라? 잠깐만.
내가 사과를 한 적이 있었나?
아니, 그냥 일방적으로 시현이의 뜻에 따라 핸드폰을 부쉈을 뿐, 내가 먼저 사과를 한 적은 없다.
시현이도 내 사과를 바라고 있던 거라고 생각하면 이 행동들이 말이 된다.
아마 내가 계속 사과도 안하고 별 말 없다보니 '얘가 나랑 화해할 생각이 없는건가?' 싶어서 얼굴이 어두워졌던 거겠지.
이런 간단한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사과를 해야되는건 당연한건데..
아예 틀린 답은 아니긴 하지만 정답이라곤 볼 수 없는 해답을 내리곤 나는 바로 사과를 할 준비를 했다.
지금 시현이는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니 이따 밥 먹으러 나올 때 사과하기로 하고는 나는 어떻게 사과를 할 지에 대해서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시각, 시현이는 침대에 누워서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왜 아무말도 없는거지? 진짜 우린 이대로 헤어지는 건가? 결혼식도 얼마 안남았는데..
진짜 지은이는 나에게 관심이 떨어진걸까?
며칠의 기간동안 지은이의 생각대로 화는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자리는 불안함이 채워버렸고, 원래는 [화 7:3 불안함] 정도엿던 비율이 지금은 [화 2:8 불안함] 이 되었다.
"..지금이라도 와서 키스해준다면 바로 받아줄텐데.."
도저히 내가 먼저 들이댈 생각은 나지가 않았다.
일단 어찌됐든 지은이가 잘못한 입장이니 지은이가 먼저 다가와야 된다는 생각과, 아직도 남아있는 2할의 화, 그리고 자존심때문이었다.
"..슬슬 점심먹을 시간이네."
시현이는 또 아무말도 없이 밥만 먹게 될 상황을 우려하면서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데..
문 앞에 지은이가 있었다.
그리고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지은이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
"..."
"다시는 너 말고 다른 여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게."
..등등의 말들로 지은이는 내게 사과의 듯을 전해왔다.
그 와중 거슬리는 말이 하나도 없는걸 보아하니 사과할 말을 정하는 데에 고생 꽤나 한 것같다.
덕분에 내가 가지고 있던 2할의 화는 씻은듯이 사라졌다.
하지만..가장 중요한게 남아있는데..
"그게 다야?"
"..응?"
"뭐 더 해야될 거 없어?"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
더 이상 말하면 내가 해달라하는게 아니게 되어버린다.
내가 바라는건 어디까지나 지은이가 지은이의 의지로 나에게 먼저 애정표현을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다행히 내 말을 알아들은건지 지은이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다가와서 나를 안아주었다.
"이거 맞지?"
"응.."
사실 바랬던 건 키스지만 뭐, 이정도로 봐줄까.
따뜻하다..
하지만 뭔가 좀 부족해. 좀 더 쌔게 안아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 입으로 더 해달라고 말할수는 없는..말해도 되지 않나? 결국 내 목표대로 지은이가 먼저 나를 안아주는건 성공했는데, 좀 더 해달라고 말하는건 상관 없지 않을까..아니, 하지만 아직 제대로 화해도 안했는데 내 입으로 무언가를 조르는건 아직 안되는것같기도한데근데지은이품따뜻하다오랜만에느껴서그런가좀더느끼고싶네근데이걸직접말하기는부끄러운데이걸어떡해야..
"더.."
"응?"
"더..더 세게 안아달라고 바보야!!"
"아..아파시현아.."
"난 너때문에 훨씬 더 아팠어!! 왜 이제야 온건데!"
"..미안.."
결국 난 터져나오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지은이는 그런 날 꼬옥 안아줬고.
1시간 뒤.
겨우 난 진정이 되었고, 그제서야 아까 나의 행동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울면서 지은이에게 매달렸던 과거이자 추태가.
덕분에 뒤늦게 얼굴이 새빨개졌다.
"잊어."
"..엥?"
"이..잊으라고! 안그러면 용서 안해줄거야!!!"
"아..그건 좀 힘들겠는데.."
"야!!!"
화를 내는 동시에 오랜만의 이런 일상에 지은이와 시현이는 둘 다 후련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울다가 웃으면.."
"닥쳐!!"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