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5화 (5/137)

〈 5화 〉 chapter 4. 유괴범

* * *

띠링ㅡ

­ 누나: ㄴ나 끝났어!!

후문에서 기다리고 있을겡

“누나 끝났대. 이제 가봐야겠다.”

“으, 응......”

핸드폰을 닫으면서 말하자 송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콜팝은 이미 다 먹은 지 오래였다. 딱히 노는 것도 아니고 대화만 했을 뿐인데 송이는 뭔가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은 애가 어딨겠어.’

시무룩해진 이유를 찾아냈으나 해결책은 없었다. 난 집에 가고 싶은걸.

“넌 어디로 가?”

“.... 분식집 있던 쪽으로 가!”

“그러면 정문 쪽이네. 나는 후문 쪽으로 가야 돼서”

“아......”

정문이라는 걸 까먹었나? 뭔가 고민하다 말한 것 같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집 방향을 고민할 게 뭐가 있겠어.’

집에 가기 싫은지 자꾸 머뭇거리길래 내가 먼저 몸을 돌렸다.

“잘 가. 내일 또 보자”

“..... 응! 내일 봐”

힐끔 뒤를 쳐다보자 송이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정문이나 후문이나 상관없긴 하지만 놀이터에서는 후문이 더 가까웠다.

후문은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좀 와야 하지만 아마 지금쯤이면 다윤이 신나게 뛰어오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쪽이 집이랑 아주 조금, 조금 더 가까우니 절대 내가 가기 귀찮아서는 아니다.

‘빨리 집 가서 뒹굴거리고 싶어.’

작은 보폭 때문인지 습관적으로 빠른 걸음을 해 후문에 빠르게 도착했다. 뜨거운 햇볕을 피해 근처 그늘로 가 쭈그려 앉았다.

아 재미없어.

폴더폰에 있는 게임은 게임이 아니다. 정말로.

그렇게 주사위를 두 번 정도 굴렸을 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선을 옮기자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단번에 눈이 마주쳤다. 꽤 떨어져 있었으나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아까 그 갈색 머리 여자잖아?’

눈이 마주쳤음에도 여자는 당황하지도 않았는지 오히려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시원한 옷차림, 마스크랑 모자 같은 건 쓰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지만 여전히 내 감은 적신호를 알리고 있었다.

‘정문에서 본 게 40분 전이었는데 후문에서 마주치는 게 말이 되나?’

말이 될 수 있긴 하다. 1번 나를 따라왔거나 2번 초등학교 주변을 맴돌거나.

어느 쪽이든 이상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어느새 여자는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안녕.”

“안녕하세여 누나.”

“어머, 인사를 참 잘하는구나?”

나는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

여자의 눈동자에는 내가 비췄고, 그녀는 나를 샅샅이 훑어보고는 내 눈을 집요하게 마주해왔다.

“누나 아까 정문에 있었져?”

“그것도 기억하나 보네? 맞아. 거기 있었어.”

“...... 웅. 예뻐서 기억하고 이써써.”

그렇게 말하자 여자는 입맛을 다셨다.

덕분에 물어본 나만 표정이 썩어들어갈 뻔했으나 참았다. 표정 관리해 표정 관리.

당당하게 말하면서 재밌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게 아무리 봐도 또라이였다. 범죄 하나쯤은 저지를 법한.

그 범죄 대상자가 나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네.

‘나는 10살. 그리고 남자다. 10살 남자애.’

이 세계에는 여자가 남자를 추행하고, 범죄를 일으킨다는 게 많다는 건 뉴스로 들었지만 이젠 완벽히 이해했다.

이런 또라이 같은 년들이 자꾸 설치니까 그런 거겠지.

“누나는 왜 여기써여?”

“음 그건......”

여자는 고민하는 듯 말을 고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빼면서.

“아가ㅡ, 아빠가 저어기로 누나랑 같이 오라고 했는데 누나랑 같이 갈까? 여기 초콜릿도 줄게,”

“......”

누가 들어도 유괴성이 짙은 발언에 침묵했다.

속은 어린아이가 아니었지만 겉은 어린아이였다. 당장 여자가 자신을 힘으로 끌고 간다고 해도 반항할 힘이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솟구쳤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무슨 말을...... 아!’

꽤 괜찮은 말을 생각해낸 나는 짐짓 그 말을 완전히 믿고 있다는 듯 최대한 순진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누나 오기로 했는데에...... 초콜릿 말구 움, 아이슈크림 사주면 갈게요!”

“아이스크림? 어떤 거?”

“메롱나!”

“그래 그러면 누나랑 같이 사러 갈까?”

“으응, 여기가 시원해여. 여기 있을래!”

“...... 그럼 누나가 아이스크림 사다 주면 같이 가는 거다?”

“네! 누나한테두 말 안 할게요.”

누나가 온다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던 여자가 이어진 말에 환하게 미소지었다.

‘누나는 무슨 얼굴이 아줌만데.’

양심이 없나 보다.

속으론 그렇게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아이스크림을 먹게 돼서 신난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자 여자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편의점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속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속았네?’

머리로는 유괴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사실 좀 쫄았다. 미래의 범죄자, 아니 유괴범을 앞에 둔 적이 처음이었다.

유치원 때 있었던 참교육과는 달리 이번에는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편의점은 여기서 대략 3분 거리. 애초에 다윤이 그전에 도착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게 좋았다.

여자가 가고 15초를 센 뒤 폴더폰을 열었다.

“거기 경찰서져? 여기 별빛 초등학교 후문인데여 모르는 누나가 아슈크림 사준다고 자꾸 같이 가자고 해여......”

범죄자한테는 112가 직빵이지.

­“같이 있니?”

­“아녀. 아슈크림 사러 잠깐 갔어여.”

­“조금만 기다리면 경찰 아줌마들이 갈 테니까 조금만 참아. 조금만......”

전화기 너머의 다급함이 느껴졌다.

­‘전화 끊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면......’

“음, 그렇게 하면 들킬 거 같아요. 되도록 빨리 와주세요.”

탁ㅡ.

여자가 언제 올지 몰랐다. 음 그래도 초등학교니까 근처에 경찰서까지 있겠지?

‘되도록이면 빨리 와줬으면 좋겠네.’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한 곳으로 다섯 개 정도 모으자 여자가 아이스크림을 들고 왔다.

“자. 여기 아이스크림!”

“와아, 우여니가 젤 좋아하는 아슈크림이다!”

“우연? 이름이 우연이야?”

“웅! 이우연. 초등학교 삼학년!”

메롱나를 할짝이자 달달한 메론맛이 입안에 퍼졌다. 이 땡볕에 아이스크림은 국룰이지.

두 번 정도 할짝이는 걸 보자 여자는 입을 열었다.

“이제 누나랑 같이 아빠한테 가야지?”

“...... 음 누나랑 같이 가기루 했는데.”

“누나? 아. 우연이 누나 있댔지? 근데 아이스크림 사주면 같이 가기로 했잖아.”

“맞아...... 힉! 흘려따!”

미안하다 메롱나. 너의 희생은 잊지 않을게.

세 번 정도 할짝인 메롱나는 그대로 내 옷에 떨어지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으, 우잉.... 메롱나..... 내 메롱나......”

“괜찮아 괜찮아. 누나가 가면서 아이스크림 사줄게”

“끕, 내 메롱나가..... 흐아아앙......”

“같이 가면...... 사준다니까?”

달래려고 하다가 잘되지 않으니 슬슬 본색을 드러냈다.

‘아 왜 두 쪽 다 안 오는 거야.’

경찰서에는 전화한 지 몇 분 안 됐어도 다윤이는 그 에 올 줄 알았는데. 계산 미스였다.

이렇게 되면 나 혼자 최대한 시간을 끌어야 된다는 말인데......

“시러! 메롱나 안 사주면 안 가!”

“하.... 씹, 사준다니까!!!”

와씨 깜짝이야. 순간 깜짝 놀라서 울음이 멈췄으나 허벅지를 다시 꼬집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가 일어날 생각이 없으니 억지로라도 데려가야겠는지 팔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는데

‘...... 힘이 왜 이렇게 쎄?’

그나마 체중으로 버티고 있었지만 팔 빠질 거 같아 진짜. 손목은 이미 감각을 상실했다.

“아 닥치라고!”

“...... 우연아! 누나 왔,”

3초만 더 빨리 오지.

‘그러면 내가 안 처맞았잖아......’

여기 여자는 싸대기를 때리는 게 아니라 주먹을 때리나 보다. 이 양심 없는 또라이년......

“이... 미치ㄴ...!!!!”

“너ㄷ.... 싶어....?! 쌍으로 지ㄹ......”

사람이 너무 아프면 말이 안 나온다고 하던데 그게 이건가 보다.

둘이 뭐라고 하는 게 어렴풋이 들렸지만 나한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눈물밖에 안 나오는데 어떡해. 맞은 곳을 부여잡으면서 그러고 있길 몇 십 초.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묵비권을.......”

“씨바아알!!”

언제 온 건지 모를 경찰 누나가 여자를 깔아뭉갰다.

그리고 나는,

‘이 개새끼야... 욕할 건 나라고.....’

다들 조금만 더 일찍 오지. 조금만. 나만 혼자 처맞고 이게 뭔가.

‘다음부터는 그냥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칠 거야......’

다짐했다. 다시는 이런 일에 무조건 도망치리라.

****

수진은 경찰차를 타고 가는 내내 제발 아이가 무사하길 빌었다.

­‘거기 경찰서져? 여기 별빛 초등학교 후문인데여 모르는 누나가 아슈크림 사준다고 자꾸 같이 가자고 해여......’

한가로운 낮 시간대에 걸려온 전화의 내용은 심상치 않았다. 유괴범이라니. 그것도 남자아이 본인이 신고자였다.

최근 논란이 된 남아 성폭행범 사건이 수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만약 후문에 없으면 어떡하지? 근처 CCTV를 찾아 범인을 쫓아야 했다.

­‘음, 그렇게 하면 들킬 거 같아요. 되도록 빨리 와주세요.’

하지만 처음 신고했었던 목소리와는 달리 전화를 끊는 아이의 말에 왜인지 모르게 믿음이 갔다.

그 자리에 범인이 있을 거 같다는 믿음.

수진은 사이렌을 껐다. 범인이 듣고 도망치면 안 되니.

차창 너머로 실루엣이 보였다. 있다. 있어!

수진은 미친 듯이 달려나가 단번에 여자를 제압했다. 몸부림이 심했지만 이미 제압한 상태에서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수갑을 채우고 나니 여자와 있었던 여자아이 그리고 신고를 한......

“많이 아파? 구급차 지금 불렀으니까 조금만 기다리자.”

“끕...... 끅.... 억울.... 해”

서럽게 울고 있는 귀여운 남자아이가 보였다. 전화를 끊을 때 느껴졌던 똑부러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이렇게 작은 남자앤데......’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구급차가 도착할 때까지 우는 남자애를 보며 수진은 가슴이 미어졌다.

그녀의 밑에 깔린 여자가 조금 더 고통스러울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도 잊지 않고 말이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