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chapter 10. 순수한 고백
* * *
“우연아 오늘 끝나고 뭐하냐?”
“오늘은 집에 가서 좀 쉬려고.”
“아쉽네. 나중에 되면 같이 피시방이나 가자”
“할 게임도 없는데 뭘......”
여자애들이랑 하도 친해져서 그런가, 이제는 피시방까지 가자고 할 사이였다.
전생에 했었던 게임이라고는 하나 있었는데. 10시간씩 돌리면서 질병 게임이라고 욕했던 게임.
여기에도 있는 것 같았지만 다시 할 생각은 없었다. 그거 하면 진짜 내 인생 망칠 거 같아서.
모델이고 뭐고 게임하겠다고 프로게이머로 틀어 버릴 수도 있었다.
“자 지금부터 67페이지 연습문제 풀고......”
‘심심하네.’
수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건 이제 잘했다. 학년이 높아지면 몇몇 과목들은 들어야 할 수도 있겠지만 아직까지야 뭐.
이번엔 운 좋게 창가 자리에 걸려서 체육을 하는 애들을 항상 보곤 했는데 비가 와서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꽤 많이 오네.
벌써 5월이었다. 이제 한 달이 지나면 기말고사를 보고 방학을 하겠지.
‘비가 와서 그런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과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보고 있자니 뭔가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직 한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나날이 커져가고 있는 페룩을 제외하고는 커리어가 하나도 없었다. 마음만 괜히 조급해져가는 거 같고.
...... 그런 날 있지 않나, 아무 일도 없는데 뭔가 우울한 날.
그게 바로 오늘인 거 같았다.
****
종례가 끝나자 느긋하게 가방을 쌌다. 아이들을 비집고 문을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우산꽂이가 있는 곳으로 가 얌전히 꽂혀있던 우산을 꺼내 들었다.
“이우연,”
복도를 나오자마자 길이 막혔다. 그냥 빨리 나갈 걸 그랬나.
‘어디서 본 거 같은 얼굴인데 누구지.’
길을 막은 상대방의 얼굴이 기억이 날 듯하면서도 안 났다. 아무래도 구면인 거 같은데 선배인 거 같지는 않았다.
“나 너한테 할 말 있는데 시간 좀 내줘라.”
“...... 그래.”
“이여얼 역시 이우연!”
반을 지나가던 아이들이 이쪽을 흘깃거리면서 장난식으로 말하거나, 수군거리면서 지나갔다.
여자애의 붉게 물든 입술이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화장을 어설프게 하긴 했네.
‘아. 누군지 알겠다.’
여자애 뒤편으로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애 세 명이 눈에 들어왔다. 전부 다 3반 여자애들.
일주일 중에 딱 한 시간 있는 체육이 겹쳐서 알 수 있었다.
저 세 명이 3반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자 앞에 있는 여자애가 누군지 기억해내는 건 쉬웠다.
‘3반 반장.’
항상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고 있었는데 지금은 풀고 있어서 기억해내지 못했다. 음 머리 푼 게 좀 더 낫네.
“어디로 가서 말할까?”
“학교 뒤편 정자 있는 쪽으로 가자.”
“그래.”
어쩐지 성큼성큼 걷는 여자애의 보폭에 맞춰 뒤를 따라 걸었다.
가는 내내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정적이었지만 나는 굳이 입을 떼지 않았다.
‘무슨 말 할지 대충 알겠는데.’
적어도 대화의 목적을 자각한다면 침묵으로 일관하는 게 여자애한테도 좋을 일이었다. 음 근데 이렇게 불려 나가는 것도 중학교 들어와서는 처음이네.
초등학교 때야 그냥 애들 장난이긴 했지만.
팡ㅡ.
우산을 펴자 빗방울이 우산에 닿는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 좋네, 비는 싫은데.
얼마 가지 않아 정자에 도착했다. 나는 우산을 접었지만 여자애는 우산을 접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내려던 순간
“좋아해.”
아, 먼저 들어버렸다.
“...... 나랑 사귈래?”
결심 어린 표정이 엿보였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볼살이 꽤 귀여웠다.
하지만 이쪽의 답은 정해져 있는걸.
“미안, 받아주지 못할 거 같아.”
“...... 응 괜찮아.”
“그리고 좋아해 줘서 고마워.”
그렇게 말하며 작게 미소 지었다. 여자애는 잠시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왔고, 먼저 가보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나저나 참 순수하네.’
불순한 의도도 아니고 순수하게 좋아한다는 말을 이렇게 면전에다 대고 들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편인 건가?
이미지 관리보다는 그 애의 용기를 보고 나도 모르게 고맙다는 말이 나와버렸고.
“읏차ㅡ 이제 집 가야지.”
팡 하고 다시 우산이 펴졌다. 집에 가면 평소보다 늦게 도착할 게 뻔했다. 미리 연락을 안 해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올 게 훤하고.
하교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지 학교 앞으로 오자 사람이 별로 안 보였다.
원래는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갔겠지만 지금 거기로 가면 신발이 진흙투성이가 되기에 조금 돌아서 정문 쪽으로 걷고 있었다.
“워!”
“아 뭐야.”
“놀랐냐? 같이 집 가자.”
“놀라긴 무슨. 너 집 방향 다르잖아”
“버스 정류장까지만 같이 가면 되지.”
“그러든가.”
뒤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그게 한송이일 줄은 몰랐네.’
애초에 반이 달라서 종례 시간도 달랐고, 버스를 타는 송이와는 집 방향도 완전히 달라서 같이 하교할 일이 없었다.
마주치면 인사하고, 가끔 캐톡하고 종종 대화하는 건 변함없었지만.
길이 좁아서 파란색 우산과 검은색 우산이 닿을 듯 말 듯 했다.
“근데 너 왜 지금 이 시간에 가?”
“아. 누가 불러서 잠깐 얘기 좀 하느라.”
“누구? 누구랑 무슨 얘기 했는데?”
“음...... 말해주기 애매한 건데.”
“야, 아무리 다른 반 됐다지만 너무 거리 두는 거 아냐? 아오 내가 너 아이스크림 몰래......”
옆에서 궁시렁궁시렁거리는 송이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음, 다른 애면 몰라도 얘한테는 말해도 되지 않나.’
사실 감출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냥 고백을 받았고, 그걸 찼다는 아주 간단한 얘기일 뿐.
누구한테 딱히 말하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긴 했지만 얘한테는 말해줘도 될 거 같았다.
지금까지 딱 한 명 있는 소꿉친구 아닌가.
“아 됐어. 말해줄게. 너 3반 반장 알지? 걔가 오늘 불러서 고백받느라 지금 가는 거야.”
“...... 받아줬어?”
장난식이었던 말투와는 달리 조금 진지한 말투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니. 당연히 거절했지.”
“그래?”
“응.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받았어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
“...... 뭐?”
“장난이야 장난.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는데 나 편하자고 사귈 생각은 없다고.”
최근 들어 SNS 개인 메시지나 캐톡으로 연락하는 여자애들이나 고백하는 애들이 꽤 있었다.
가장 편한 건 여자친구 있다는 말이겠지만, 그럴 여자친구가 없으니 대충 안읽씹을 하거나 거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인기가 많으면 어쩔 수 없지.’
잘생긴 건 알아본다고, 같은 학교인 선배나 다른 학교에서도 연락하는 이들이 몇 있었다.
그에 따른 귀찮음은 내 몫이지만. 그런 애들을 생각하면 강단 있게 차이더라도 얼굴 보고 고백한 3반 반장이 훨씬 낫지.
하지만 명찰을 안 달고 있어서 그 애의 이름조차 몰랐다. 아니 다른 반 반장을 내가 어떻게 아냐고.
비록 좋아하는 마음은 그렇게 크지 않았겠지만 어린애가 고백하는 것도 귀여웠다.
“버스 정류장 도착했네. 그럼 난 이만 간다~”
“잠깐만. 나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
“뭔데.”
우산 밑으로 눈이 마주쳤다. 아 역시 잘 크고 있네. 내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넌 여자친구 안 만들어?”
“으음......”
아무리 그래도 젖비린내 나는 애들을 사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중학생이면...... 하아. 연상을 만난다고 해도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연애는 고등학교 들어가서 하지 않을까? 으음, 중학생 때는 안 할 거 같은데.”
“그렇구나...... 됐어 이제 가라”
“너도 잘 가고.”
어쩐지 맥이 풀린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나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기에 집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송이가 남자친구 있었나? 그런 얘기는 못 들었던 거 같은데. 집에 가서 다윤이나 놀려 먹어야지.
허기가 져서 그런지 파전이 먹고 싶었다.
‘파전에는 막걸리가 딱인데.’
바지 밑단은 이미 다 젖어 있었다. 아 막걸리 땡겨.
****
[오늘 고백하고 차였는데 포기를 못하겠음]
우리 학교 같은 학년에 진짜 말도 안 되게 예쁜 남자애 하나 있는데 고백 갈겼다가 차였다. 차일 거 알고 있었는데...... 거절하면서 자기 좋아해 줘서 고맙다고 웃는데 내가 미쳐버리겠더라.
비 오는 날 날 보면서 웃는 남자 잊을 수 없어....... 이게 첫사랑인 거냐 ㄹㅇㅋㅋ
추천 10 비추천 4
익명: 상여자네ㅋㅋㅋㅋ;; 그래서 예쁘냐? 얼마나?
ㄴ TV에 나올 듯. 이런 애가 연예인 안 하면ㅋㅋㅋ
ㄴ 그 정도임?ㅋㅋㅋ 그래서 어디냐 정보 공유 점
익명: 걍 얼굴 예뻐서 고백 갈긴 거?
ㄴ 절대 ㄴㄴ. 나 축구하고 무릎 갈렸는데 얘랑 같이 보건실 갔었음. 그때 이후로 사랑이 싹 틈ㅋㅋㅋㅋ 물론 나만 ㅅㅂ......
익명: 그런 남자가 어딨음 ㅋㅋㄹㅃㅃ
ㄴ 희귀종 한 명 있더라 ㅇㅇ
익명: 멘트 하나로 애가 착한 게 보이네. 근데 너 혹시 애니 봤냐ㅋㅋ?
ㄴ 믿지 마셈, 걍 평생 모르고 살아라
ㄴ 인간적으로 저런 남자 있으면 나 같아도 고백 갈김
ㄴ 내 친구들 중에서도 얘 좋아하는 애 있음
ㄴ ㅋㅋㅋㅋㅋㅋ 잘못된 만남?
익명: 비벼!!! ㅈㄴ비벼!!!!!
ㄴ 쪽팔려서 어케 하누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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