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 chapter 11. 신사데이 (1)
* * *
“이름 한 명씩 호명할 테니까 성적표 받아가라.”
“아아......”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애들 한 명, 한 명씩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고 나는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뭘 사달라고 하지?’
과학 지문에서 헷갈리는 게 몇 개 있었고, 국어 지문에서는 긴가민가 한 게 하나 있긴 했지만 전부 90점 밑으로 내려갈 일은 없었다.
중학교 1학년 수학은 껌값이어서 안 봐도 백 점일 테고. 물론 미래에는 내가 껌이 되겠지만.
항상 성적표를 받아가는 날이면 어머니나 아버지나 입꼬리가 승천해서 원하는 게 있냐고 묻곤 했었다.
‘이번엔 컴퓨터를 사달라고 할까?’
근데 그건 또 너무 비싼 거 같기도 하고......
그렇게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가 내 이름이 호명됐다.
“이우연.”
“네.”
“공부 열심히 했더라. 잘했어”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뒤를 돌자 그런 나를 배신감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어린양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공부는 평소에 잘했어야지.’
물론 난 평소에 안 했다. 이미 있는 지식인데 벼락치기가 제격이지.
[국어 96 수학 100 영어 98 사회 100 과학 92]
“헷갈렸던 것들 다 틀렸네.”
운이 안 좋았던 건지 긴가민가했던 것들 중에서 맞은 게 하나도 없었다. 영어는 서술형에서 a 하나를 빼고 써서 2점이 깎였고.
그래도 뭐 이 정도면 괜찮네.
주위를 둘러보니 안색이 안 좋은 애들부터 싱글벙글 웃고 있는 애들까지 다양했다. 자리에서 엉덩이 떼기 직전인 애들도 있었고.
“성적표는 꼭 부모님한테 보여드려라. 이상 끝! 다들 집 가”
“안녕히 계세요 선생님~!”
준비, 땅. 교실 문을 박차고 애들이 뛰쳐나갔다.
“너도 같이 놀러 갈래?”
“으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이틀 전에도 놀기도 했고 이 성적표를 빨리 보여주고 얻을 보상을 생각하면 이쪽이 더 끌렸다.
“나중에 가자. 오늘은 패스”
“오키염. 그럼 먼저 간다 빠이.”
손을 흔들면서 나도 집에 갈 준비를 느긋하게 했다. 오늘따라 발걸음이 좀 가볍네.
올백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금의환향 받을만한 점수였다.
그리고 그 보상은 내 예상보다 훨씬 더, 더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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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여보! 이거 얼른 옷 갈아입고 와서 앉아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어머니를 아버지가 밝은 목소리로 반겼다. 집안에는 노래 소리와 함께 치익ㅡ 하고 고기 올라가는 소리가 울려 펴졌고.
나는 쇼파에 앉아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상 차리는 거라도 돕고 있었겠지만 오늘은 주방에서 강퇴 당했다. 거실에서 쉬고 있으라고.
그래서 지금 상을 차리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다윤아 빨리 밥 퍼! 물도 떠야지.”
“아아 알겠다고! 진짜 나한테만 그래”
“너한테만? 너도 공부 잘하면 이런 거 안 시켜!”
다윤이었다.
학교가 같아서 그런지 학부모 메시지와 함께 일괄로 성적표가 배부된 탓에 그 사실을 알게된 아버지는 자식 둘의 성적표를 한 번에 얻을 수 있었다.
‘비교 대상이 되어버린 건 유감이지만.’
어쩌겠는가. 한쪽이 너무 시험을 잘 본걸.
나는 쇼파를 뒹굴면서 페룩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제는 사진 하나 올리면 좋아요 4000개가 기본이네.
“다들 밥 먹자~!”
핸드폰을 끄고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자 된장찌개부터 잘 익은 고기, 햄, 계란말이 등등 반찬들이 즐비해 있었다.
‘아주 상다리가 휘겠네 휘겠어.’
다윤도 배가 고팠는지 일찌감치 자리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애들 성적표 나왔는데, 이거 좀 봐봐요.”
“...... 오, 우연이 공부 열심히 했네.”
“그러니까 말이에요. 우리 아들 전교 1등 하는 건 아닌가 몰라.”
“에이, 전교 1등은 못해요......”
노력 몇 스푼을 더하면 아직까진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고등학교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높은 성적은 바라지 않았다.
“다윤이도 저번에 비해서 성적이 올랐네 잘했다. 근데 여전히 수학이 문제구나”
“수학은 포기했어요 이미.”
“뭘 벌써 포기를 해 포기를!”
아버지가 다윤의 머리를 안 아프게 쥐어박았다. 어머니는 자기도 수포자였다면서 허허, 웃고 있고.
‘사실 나도 잠재적 수포자이긴 한데.’
고등수학은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아마 처음부터 공부해야 할지도. 그건 그때가서 생각해보기는 하겠지만.
중간중간 다윤이 투덜거렸지만 나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었다.
그렇게 밥을 거의 다 먹고 앉아 있을 때,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 우연이가 피팅 모델하고 싶댔지?”
“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우리 아들 모델 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한 번 해보는 게 좋지 않나?”
“네 완전 좋아요. 하고 싶어요!”
“여보, 아직 우연이는 어려요......”
“요즘에 TV에 나오는 애들도 다 어리잖아. 원래 이런 건 어려서부터 하면 좋은 거야. 경력도 되고 안 그래?”
나는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어머니.
아버지도 크게 말리진 못하겠는지 염려의 말을 몇 번 던졌으나 전부 어머니 선에서 기각됐다. 이게 바로 천군만마를 얻었다는 거냐.
“근데 그 피팅 모델은 어디서 하는 거냐? 받아주는 곳은 있고?”
“아빠. 얘 페룩 거의 스타예요 스타. 어딜 가든 받아줄 걸요?”
“그건 너무 과장이고. 음 허락받았으니까 지금부터 찾아봐야죠.”
“신중하게 결정하렴.... 이상한 거 같으면 바로 아빠나 엄마한테 말하고.”
“옙! 알겠습니다.”
예상치도 못한 허락을 받았다. 컴퓨터는 내가 번 돈으로 사면 되겠네.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한채 그릇을 정리하고 빠르게 그릇을 정리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자 어디 한 번 찾아볼까.”
어깨를 한 번 돌리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정보화 시대에서 인터넷으로 못 찾을 건 없었다.
일단 첫 번째로 한 건 가입해뒀었던 남성 모델 카페에 들어가 구인글을 뒤지는 일.
‘여기가 구한다고?’
최근 유명한 ‘소년나라’에서 모델을 구하고 있었다. 아마 10대들 사이에서는 지금 거의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지 않나?
하지만 개인적으로 여기 옷은 가격대가 싸서 그런지는 몰라도 옷의 질이 별로였다.
일단 한다고 하면 유명세는 보장받을 수 있겠지만...... 형형색깔의 어린 티가 나는 옷은 개인적으로 별론데.
물론 컬러 매치를 잘해서 괜찮으면 밝은색이라고 해도 상관없긴 했지만 그런 경우는 패션쇼에서나 있는 경우였다.
“올라온 글들 중에서는 딱히 마음에 가는 게 없네.”
카페에 올라온 글들을 살펴봤으나 소년나라를 제외하고는 딱히 관심이 가는 곳이 없었다. 홈페이지가 별로던가 질이 별로던가 둘 중 하나였다.
‘그럼 이제 직접 사이트를 돌면서 찾아봐야지.’
카페 구인글에 글이 안 올라와 있다고 하더라도 쇼핑몰 홈페이지에서 구인을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옷을 자주 샀었던 사이트 위주로 들어가 봤다.
스트릿, 남녀공용부터 메이저거나 그보다 한 단계 낮은 곳까지 전부 찾아봤으나 피팅 모델을 구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진짜 소년나라 가야 되나?’
머리가 아팠다. 이름값 하나는 확실하게 올릴 수 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옷이 별로라서 구미가 안 당겼다.
혹시 몰라서 페룩 개인 메시지도 확인해봤지만 아까 본 사이트들 중 몇몇 곳들에서 협찬을 주겠다는 메시지밖에 없었다.
‘페룩으로 협찬이나 광고 받으면서 할까? 아냐, 그러기에는 너무 페룩 자체가 광고용이 될 수 있어.’
생각이 복잡했다. 옷장에 걸려 있는 옷들을 빤히 바라보다가,
“아 맞다!”
번뜩 한 쇼핑몰이 떠올랐다. 워낙 가격대가 나가서 나도 한 벌밖에 못 가지고 있는 쇼핑몰이었다.
‘여기가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은 곳인데......’
사진으로 봐도 옷이 좋아 보여서 큰맘 먹고 구매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을 툭툭, 치다가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검색했다.
[신사데이]
홈페이지에 들어가자 역시나 높은 금액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진들은 모델이 없는 것도 있었고, 있는 것도 있었지만 대체로 사진을 잘 찍은 것이지 모델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느낌이 좋은데?”
배너에는 떠 있지 않았지만 나는 곧바로 공지사항을 찾아서 클릭했다.
그러자 각종 이벤트, 무료배송 등 여러 가지 공지사항이 보였고 그중 1페이지 다섯 번째에 위치해 있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신사데이의 남성 모델을 구합니다]
‘있다.’
제목을 클릭하자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
간단한 이력 사항부터 신체 정보, 경험 유무와 SNS 여부를 포함해 보정 없는 사진 메일로 첨부하라는 공고였다.
나이 제한이 큰 걸림돌이었는데 그거에 대해선 적혀 있지 않았다. 음 키랑 나이가 조금 부족하긴 해도 SNS 선에서 커버되겠지.
나름 이 사이트의 옷들과는 페룩에 올린 코디들과 결이 비슷했다.
“여기다. 내 첫 피팅모델 사이트”
눈을 빛내며 빠르게 글을 작성하고 사진 몇 장을 골라냈다.
[메일 전송 완료]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네.‘
연락이 오는 일만 남았다. 이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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