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26화 (26/137)

〈 26화 〉 chapter 25. 준비

* * *

[노아 예고 패션모델학과 합격을 축하합니다!!]

성명: 이우연

­장학금 지급 대상자: 학년 전체 수석 입학자로 수업료 전액 면제

11월 27일. 실기고사가 있고 난 뒤로부터 5일이 흘렀다.

합격자 발표 시간이 10분 정도 지나고 느긋하게 핸드폰으로 들어가 보니 합격이라는 문구가 액정에 띄워졌다.

“붙었어?”

“떨어졌니?”

“에이, 그래도 뭐 떨어졌으면 그 사람들이 눈이 삔 거지 네가 못한 건 아닐 거야. 굳이 노아 예고에 가야 된다는 법은.....”

다윤이 눈치를 보면서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냥 빨리 보여주는 게 낫겠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나는 그대로 합격 문구가 떠 있는 핸드폰을 다윤에게 들이밀었다.

“헐 합격이네! 대박 야 내가 붙는다고 했지? 근데 이건 뭐냐. 학년 전체 수석 입학자? 장학금 대상자라는데?”

“그런 거 같더라.”

“오늘 저녁은 외식이다!”

다윤은 축하한다며 제자리에서 콩콩 뛰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내 머리를 한 열 번 정도 쓰다듬고 끌어안기를 반복하신 아버지도 덩실덩실 춤을 추시면서 거실로 나갔고,

“그 노아공연예술 고등학교 있잖아~ 거기 우리 아들이 패션모델학과로 실기시험을 봤는데~”

상대가 누군진 모르겠지만 아들 자랑을 시작한 아버지의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과 수석은 몰라도 학년 수석은 할 줄 몰랐는데,

‘운이 좋았나 보네.’

침대에 몸을 던졌다.

돈은 벌면 되기도 하고, 이미 모아둔 돈도 있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예고다 보니 학비가 그렇게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장학금을 아예 생각 안 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모델’ 한정이었다.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모르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학년 전체 수석 같은 건 바라지 않았으니까.

뭐 그래도 이렇게 한 번 수석을 해버리면,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잖아?”

한 번 1등을 하면 원래 넘겨주기 싫은 법이다.

차라리 2등이면 올라갈 자리라도 있지, 1등은 내려갈 자리밖에 없지 않은가.

‘할 수 있는 선에서만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하지만 현실은 아마 1등 자리를 내어주게 될 거다.

고등학교 생활을 하면서 아마 활동을 병행할 가능성이 높았고, 그렇게 되면 학교도 자주 빠질 게 분명하니까.

고작 성적 하나 좋게 받겠다고 다른 활동을 포기하기에는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할 수 있는 것만 최선을 다해서 하자.

“기분은 좋네.”

그렇게 다짐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은 건 변함없었다. 그리고 이건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그랬고.

그날 저녁 외식 자리에서 어머니는 자꾸만 입꼬리를 씰룩거리셨고, 아버지는 연신 자랑을 하셨으며 다윤은 자기는 붙을 줄 알았다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 화목한 가족이네.

****

“좋아요! 정면 보고 한 번만 더 찍을게요! 컷!”

“잘 나왔어요?”

“어우 말도 말아요, 이거 제가 찍었다고 온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 거니까.”

“큽, 그게 뭐예요.”

가슴을 쫙 펴며 말하는 사진 작가에 나는 작게 웃었다.

프로필 사진 촬영.

평소에 모델로서 찍은 사진들이 많기도 하고, 실제로 포트폴리오에는 활동했었던 사진들을 담느라 프로필 사진 촬영을 미뤘다.

굳이 안 찍어도 되기는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기 전에 제대로 한 번 사진 작가에게 맡겨서 프로필 사진을 촬영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었고.

그리고 그 계획이 지금 실행되고 있었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는 순조로운 촬영.

“우연 군은 진짜 키도 크고, 마른 게 완전 모델이 딱이에요.”

“저보다 큰 애들 엄청 많아요. 키커야 되는데......”

“ㄷ, 더 클 거예요! 클 수 있어요!”

문득 노아 예고 대기실에 있었던 이들의 키가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걔네는 대체 뭘 먹는 거지.’

대부분이 나보다 컸고, 비슷한 사람들은 소수였었다.

현재 키는 178cm.

평균 신장을 웃도는 키였지만 고등학교에 가서 더 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디자인의 옷이라고 해도 키에 따라 옷핏이 좌지우지되니 개인적으로는 컸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키가 작은 모델들도 있긴 하지만 키가 큰 모델들만 설 수 있는 쇼들도 많고.

아무튼 촬영은 막바지로 흘러갔다.

애초에 옷도 두 벌, 컨셉도 두 개. 1시간을 약간 넘어서 진행된 촬영은 순식간에 속전속결이었으니까.

“처음에 연락 왔을 때는 꿈인 줄 알았어요 진짜.”

“실력이 좋으셔서 맡긴 거예요. 앞으로 잘 되시게 되면 저 잊으시면 안 돼요.”

“제가요? 에이. 우연 군이 저를 잊으면 모를까요.”

“저는 한 번 본 사람은 잘 잊지 않아서요.”

사진 작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정말 지금 이 순간이 기억에 또렷하게 남을 거 같아요!”

노아 예고에 합격하고 난 뒤 SNS에서 평소 눈여겨보고 있었던 사진 작가에게 내가 먼저 컨택을 넣었었다.

개인 작업으로 프로필 촬영을 맡기고 싶다고.

결과는 당연히 성사였고, 메이저가 아닌 사진 작가는 젊은 사람이었다. 사진 작가 중에서도 유명세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 많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사람이 담아내는 사진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메이크업을 되도록 연하게 하고 수수한 사진을 찍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걸 잘 담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실제로 같이 작업을 해본 결과 괜찮았다.

“최대한 빨리 보정해서 넘겨드릴게요!”

“천천히 하셔도 돼요.”

그날 늦은 점심까지 같이 먹은 뒤 우리는 헤어졌고, 시간이 지나 메일로 받은 프로필 사진들은 전부 만족스러웠다.

찍은 프로필 사진들 중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 몇 개를 추려서 컴카드로 만들었고.

‘프리랜서냐, 에이전시냐.’

모델이 되는 방법은 정말 다양했다. 지인 소개로도 일을 할 수 있고, 아카데미나 학교를 나와서 일을 하는 경우도 있고 길거리 캐스팅도 있지만.

“지금의 나는 에이전시가 편해.”

다른 배움보다 나를 밀어주고 기회를 줄 에이전시가 필요했다.

모델 일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인맥이나 푸시가 받쳐줘야 하고 모델계에 종사하는 에이전시에서는 그런 기회들을 더 얻기가 쉬우니까.

모델리스트를 보낼 때 나를 추천해달라거나, 어떤 일에 모델로 추천해달라거나.

전생에 있었던 모델 에이전시들의 생태를 아는 나로서는 시작을 에이전시에서 하는 게 가장 쉽게 일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때처럼 어중간한 소속사에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렇게 간판 모델이 있고 소속 모델의 활동이 많은 대형 에이전시로 3곳을 골라 메일을 보냈다.

자기소개와 함께 간단한 포트폴리오, 프로필 사진과 만들었던 컴카드를 전부 넣어서 전송.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다리는 건 원래도 잘하기는 하지만,’

메일을 보낸 지 삼일 만에 세 곳에서 전부 연락이 와버렸으니까 말이다.

****

“원래 이렇게 뜨는 게 쉬웠던 거냐.”

눈을 깜박여도 좋아요 개수와 팔로워 수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게 지금 꿈이 아니라는 거지?

“미친 개꿀이네, 이게 다 뭐야아!”

물고 있던 담배를 그대로 지져서 꺼버렸다. 지금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녀의 SNS는 지금 호의로 가득 차 있었다. 촬영 제의부터 시작해서 개인 작업 연락, 단위가 달라진 팔로워 수까지.

원인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당장 그녀를 태그한 한 게시물을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

작성자: 우연

내용: 잘 챙겨주셔서 촬영하는 내내 편하고 좋았습니다. @MIN_9_9

(사진) (사진) (사진)

좋아요 89.2만개 댓글 30.5만개

이 폭발적인 반응에 비하면 자신의 SNS는 아주 티끌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하루아침에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그녀의 게시물들과 작업 사진들의 댓글로 사진에 대한 칭찬들이 담겨있고, 팔로워 수 몇 만 명이 한꺼번에 훌쩍 늘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셀럽들이랑 한 번이라도 작업하려고 하는 건가.

“맨 처음에 연락 왔었을 때는 이게 웬 떡인가 싶었는데.”

개인 메시지로 물밀 듯이 들어온 문의를 하나하나 읽어보면서 답장하기에 바빴다.

사진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했지만 매번 일거리가 들어오지 않아 전전긍긍하면서 발품을 팔았었던 게 엊그저껜데.

신인으로 뛰어들면서 겪어왔던 수모와 후회가 싹 씻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잘해야겠지.’

우연이 가져다 준 기회가 흔치 않은 기회인 만큼 단발성 인기를 유지하는 것도, 실력을 보여주는 것도 그녀가 해야 할 일.

한 번 본 얼굴은 잘 잊지 않는다는 말을 곱씹으면서 그녀는 사진 작가 일에 매진했다.

다음에는 자신이 우연에게 일을 제안하여 다시 촬영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고대하면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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