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chapter 26. 남자의 적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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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엘 컴퍼니, 에이전시 데마시아, 제이딘 모델.
내가 메일을 돌린 모델 소속사들이다.
하나같이 간판 모델들이 있고, 소속 모델들의 활동이 활발한 전문성을 갖춘 소속사들.
항시 메일 접수를 받고 있었기에 첫 시도에 바로 답변이 오지 않더라도 두세 번 정도 더 보낼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전부 면접이나 실물 오디션을 보자는 답변이 돌아왔다.
‘르엘 컴퍼니는 어제 갔다 왔었는데.’
해외에 본사가 있어서 모델 계약을 하면 우선 해외에서 3개월 동안 활동을 해야 한다는 말에 배제했다.
경력을 쌓고도 해외에 나가면 어떤 대우를 받을지 모르는 게 모델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가 가서 쉽게 뜰 수 있더라도 그만큼 힘들 테니까.
난 학교도 다녀야 하고.
그래서 남은 곳이 두 곳. 에이전시 데마시아와 제이딘 모델.
에이전시 데마시아는 오늘 오후 12시에, 제이딘 모델은 오후 4시에 면접이 있었다.
덕분에 아침 10시부터 샵으로 가야 돼서 아침부터 집을 나서는데, 신발장 앞에서 다윤이 불쑥 방에서 튀어나왔다.
“맞다 너 오늘 거기 어디 면접 보러 간댔지 하암.”
“응. 게임 좀 적당히 하고 잠 좀 자.”
“어어 이제 잘 거...... 근데 너 옷이 왜 그러냐?”
“옷?”
“아니 좀, 그 너무 야한 거 아냐? 단추 좀 잠가.”
“단추는 무슨 이 정도면 무난한 거지. 요즘 다들 이러고 다녀.”
“미친놈아 그냥 내 말 들어. 아니다 그냥 내가 해줄 테니까 이리 와”
눈을 반쯤 감고 있던 다윤이 날 위아래로 스캔하더니 이내 눈을 매섭게 뜨면서 순식간에 내 멱살을 잡아챘다.
‘아 그냥 겉옷 입고 나올걸.’
모델은 어디를 가나 몸선을 가리지 않는 게 좋았다. 오늘은 면접도 봐야 해서 흰색 와이셔츠의 단추를 두 개 정도 풀었고.
하지만 이쪽 사회에서는 남자에게 더 보수적인 성향을 보였고 맨살을 노출한다던가, 딱 붙는 옷을 입는다던가 등은 보편화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건 우리 집도 마찬가지고.’
다윤의 손안에서 풀어져 있던 단추 두 개가 잠겼다.
내가 보기에는 이걸 푸는 게 패션의 완성인 거 같은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족하지 못했는지 매섭게 치켜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이거 말고 다른 예쁜 옷들도 많잖아. 그냥 다른 옷 입고 가면 안 돼?”
“모델이 몸을 가려서 뭐해. 애초에 오늘도 보여주러 가는 건데.”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이상하잖아!!”
“너 때문에 늦었어. 나 간다.”
“아씨 누나라고 하라고!”
다윤의 머리를 꾹 누르고 신발을 신은 뒤 밖으로 튀었다.
누나라고 부르라면서 궁시렁거리는 소리가 잠깐 들렸지만 그런 건 내 안중에도 없었고, 엘리베이터를 누르면서 잠겨 있던 단추 두 개를 다시 풀었다.
구겨진 셔츠를 탁탁 치면서 피고, 겉옷을 입었다.
‘으, 추워.’
얼어 죽을 패션이라는 게 이런 건가.
몸을 잠깐 움츠렸다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을 타면서 몇몇 이들의 시선이 몸에 닿는 게 느껴졌는데, 그냥 무시했다.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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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이우연으로 예약했는데요.”
“어서 오세요! 오늘 10시 20분에 예약하신 이우연님 맞으신가요?”
“아 네. 맞아요.”
“네에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와주세요!”
싱긋 웃으며 안내하는 갈색 머리의 남자는 어제까지만 해도 못 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은 여자가 꽤 많네.’
일요일 아침 시간이기도 하고, 어제에 비해 못 봤었던 남자 미용사들이 꽤 많았다.
어제 미리 예약 안 했으면 앉아서 기다려야 했을 정도. 손님의 성비도 여자가 반, 남자가 반이었다.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주시면 담당 쌤이 오실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음료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따뜻한 녹차에 시럽 한 번 넣어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아!”
밝게 대답한 남자가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오늘 얼굴이 좀 부은 거 같아서.’
녹차는 평소엔 안 마셨는데 녹차에 당류를 추가하면 혈액순환이 잘되고 얼굴에 부기가 빠진다는 사실에 얼굴이 부은 날이면 마시곤 했다.
그렇게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으로 아웃스타그램이나 들어가서 구경이나 하고 있으려던 찰나, 샵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헉 원장쌔앰~ 안녕하세요!”
“안녕, 잘하고 있네. 음...... 손님도 오랜만에 뵙네요.”
“손님이라니, 전처럼 이름으로 불러주시죠.”
“공과 사는 확실하게 해야죠. 성윤쌤 조금만 더 힘내주시고 손님도 머리 잘 나오셨는데 모쪼록 만족하시고 가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이만 두 분 다 수고하세요.”
내가 있던 곳이랑 가까워서 그런지 무슨 대화를 하는지 다 들렸다.
‘원장이 여잔가 보네.’
손님으로 온 듯한 남자의 말투가 묘하게 끈적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럼 기초부터 들어갈게요.”
“네. 괜찮아요.”
“여기 아까 말씀하셨던 음료 드릴게요!”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었던 자리에 남자 두 명이 연달아 도착했다.
갈색 머리 남자가 건네준 녹차를 크게 한 모금 마시자 반이 사라졌고, 다른 남자가 내 얼굴을 화장솜으로 닦았다.
“혹시 아이돌이신가요?”
“아뇨, 음. 모델이에요.”
“헉 그러시구나~ 피부가 너무 좋으셔서요. 오늘은 무슨 일로 메이크업하시는 건가요? 어떤 스타일로 해드리면......”
“안녕하세요~ 준수쌤 맡으신 손님분 얼굴이 멀리서 봐도 빛이 나길래 한 번 와봤어요.”
꽤 화려한 외모를 가진 여자가 거울에 비쳤다.
어쩐지 거울을 두고 눈이 마주쳤지만 내 감상은 딱 하나였다.
‘원장이 꽤 젊네.’
나이가 꽤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큰 샵을 운영하면서 젊어 보였다. 30대는 아닌 거 같은데.
눈이 마주쳤을 때 작게 고개 인사를 했다.
인사만 하고 가는 줄 알았는데 원장이라는 여자는 자리를 뜨지 않더니
“준수쌤, 이 손님 제가 메이크업해줘도 될까요?”
“오늘은 그냥 들르신 거 아니에요? 해주시면 저야 괜찮죠. 아마 손님한테도 그게 더 좋으실 거예요.”
“그러면 이 손님은 제가 맡을게요. 준수쌤은 잠깐 쉬어요~”
순식간에 내 담당이 되어버렸다. 굳이 저 사람한테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어서 그러려니 했다.
‘원장이면 실력이 더 좋겠지.’
하지만 실력이 좋아도 내가 원하는 메이크업이 아니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화장품 도구를 들며 다가오는 원장에게 나는 입을 열었다.
“모델 에이전시 면접이 잡혀 있어서요. 얼굴 톤은 피부색에 맞춰서 더 어둡게만 하지 말아주시고, 최대한 자연스러운 메이크업으로 해주세요.”
“아이돌 연습생일 줄 알았는데 모델이셨네요. 하긴 아이돌 쪽이면 내가 이런 얼굴을 모를 수가 없지.”
“얼굴에 음영만 세게 넣어주세요. 특히 코는 부담스럽지 않게 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메이크업하는 도중에 다른 의견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얼굴에 무언가 발라지는 느낌이 들면서 빠르게 메이크업이 진행됐다.
‘원장이라고 하더니 괜히 원장이 아니었네.’
얼굴에 닿는 터치감이 가벼워서 거슬리지 않았다. 메이크업을 하는 동선이 효율적이어서 완성도 있으면서도 빠르게 진행되고 거였고.
그녀가 간간이 던지는 질문에 내가 대답하는 걸 제외하고는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눈 떠요. 메이크업은 다 끝났네요. 혹시 수정할 점이나 더 추가하고 싶은 건 없나요?”
“음..... 턱이랑 목에 한 번만 더 쉐딩으로 음영 잡아주세요.”
“알겠어요. 그거 말고는 없나요?”
“네. 없어요.”
“오해해서 듣지는 마시고, 손님 정말 예쁘세요 지금. 아 그리고 헤어도 제가 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자연스럽게 펌만 살짝 넣어주세요.”
“맡겨만 주세요!”
고데기 두 개를 꼽더니 예열이 되자마자 신들린 손놀림으로 순식간에 헤어 세팅을 끝냈다.
‘11시 20분.’
늦게 시작한 거 치고는 원장이라는 짬밥이있어서 그런지 예상보다 더 빨리 끝났다.
여기서 에이전시 데마시아까지 택시로 15분 정도 걸리니 여유가 조금 있었다.
“마음에 드시나요?”
“네. 만족스럽게 잘 된 거 같아요.”
“근래 들어서 제가 뵌 손님분들 중에 가장 예쁘시네요.”
“감사합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절대 일반인이 아니라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래서 전문가의 손길에 맡기는 거지.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한 원장이 먼저 자리를 뜨고, 나는 벗어뒀던 겉옷을 입은 뒤 핸드폰을 챙겨 카운터로 향했다.
‘어째 손님이 더 는 거 같은데.’
실제로 기다리는 사람도 몇몇 보였다. 샵이 큰 만큼 미용사나 손님도 많아서 조금 부산스러워 보였고.
카운터에 도착하니 먼저 온 사람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남자 뒤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서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고 있는데
“쯧. 옷 입은 수준이 무슨 몸 파는 애 같네. 하여튼요즘엔 얼굴 믿고 나대는 애들이 너무 많다니까.”
앞에 선 남자가 작게 말하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지갑에서 카드를 떼고 앞을 보니 눈이 딱 마주쳤고,
‘그러니까 지금 이거 나한테 한 말?’
나보다 작은 남자를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남자의 적은 남자라더니 그 말 틀린 게 하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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