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37화 (37/137)

〈 37화 〉 chapter 36. 디자이너 패션쇼 오디션 (1)

* * *

“키 컸네.”

“키 컸나 봐.”

다윤과 내가 동시에 말했다.

바지 기장이 짧다는 게 확실히 눈대중만으로도 보일 정도였으니까.

‘키가 컸다니!’

이보다 더 호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키가 크길 바라면서 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마치 보상을 받는 것과도 같은 기분.

웃음이 자동으로 나왔다. 내일 회사 가서 키 재봐야지.

“역시 손님 너무 잘 어울리십니다! 모델 하셔도 되겠어요!”

“감사합니다.”

“으음, 근데 여기서 더 기장이 길어지면 허리가 아예 안 맞을 텐데......”

교복점 주인이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안쪽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이미 모델이에요.’

하지만 이제 막 활동한 건 잡지 촬영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기성 모델들도 연령대에 따라 인지도가 나누어지니 모르는 것도 당연한 일.

아마 교복점 주인 입장에서는 좀 생긴 학생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그동안 예외적으로 누려본 인기가 SNS의 작은 연못이었다고 생각하니 앞으로 더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한 번 입어봐요! 옷 자체가 좀 작게 나온 건데 기장이 길어서 아마 이거 입으면 딱 맞을 거 같어! 어후, 완전 개미허리야.”

“갈아입고 올게요.”

안 그래도 지금 입고 있는 교복 바지도 허리춤이 흘려내서 손으로 붙잡고 있었다.

검은색 바지를 들고 탈의실 안으로 들어가서 입자 그래도 아까보다는 허리가 덜 남았고 기장은 이게 딱 맞는 것 같았다.

“아이구~ 진짜 모델 해도 되겠다니까! 허리는 아무래도 수선해야 될 거 같구먼.”

“네, 부탁드려요.”

“잠깐 길이 좀 재보고.”

교복점 주인은 줄자를 갖고 와서 이리저리 움직여가며 길이를 재더니 손을 거뒀다. 그리고 종이에 쓱쓱 적어 내려가면서 내게 물었다.

“이름.”

“이우연이요.”

“전화번호 여기 적어주고, 이틀 뒤에 찾으러 와요.”

“네 감사합니다.”

탈의실로 들어가서 다시 입고 왔던 옷으로 환복했다.

12시에 도착했지만 20분 동안 교복을 맞추면서 교복점에는 사람이 한 명도 안 왔다.

‘덕분에 편하긴 했지만.’

사람이 많으면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두고 왔는데 오히려 예상한 것보다 빨리 끝나버렸다.

그러면 남은 시간 동안 뭐하냐는 건데.

오늘 하루를 통째로 시간을 빼버려서 오랜만에 평일에 주어진 자유의 몸이었다.

내일은 하루를 통째로 오디션을 보는데 써야겠지만.

“야 이제 우리 뭐해.”

“집 갈까?”

“...... 이왕 나왔는데 조금만 이따가 들어가.”

왜인지 뾰로통한 얼굴로 말하는 다윤에 나는 그러던가, 라고 말했다.

‘집에서 뒹굴거리면서 소설 보는 게 얼마나 개꿀인데.’

하지만 이미 밖을 나온 거 그 일은 이따 저녁에 하는 걸로 하고 잠시 미뤘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나 내일 오디션 있는데.”

“...... 그냥 만화카페나 가자.”

“오케이.”

키 차이 때문에 다윤을 내려다보는 상태가 되자 뭔가 기분이 묘했다. 분명 어렸을 때는 다윤이 나보다 훨씬 컸었는데.

‘이제는 완전 꼬맹이네.’

163cm에서 키가 멈춘 다윤은 나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뭘 꼬라.”

“아니 그냥 작길래.”

“이게!”

“으악 살려줘!”

실수로 속마음을 그대로 말해버리자 다윤의 얼굴이 야차처럼 변했다.

우리는 대낮에 잠깐 동안 술래잡기로 했고, 내 종아리가 한 대 차이고 나서야 우리는 만화 카페로 향할 수 있었다.

‘보는 건 딱히 없지만 가서 재밌는 게 있으면 그거나 봐야지.’

사람이 꽤 있었지만 우리는 굴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만화책 두 개를 골라서 들어간 나는,

“야. 일어나라. 이제 나가야 돼.”

“... 으어?”

만화책을 베개 삼아 그대로 자버렸다.

‘낮잠은 어쩔 수 없지.’

침을 흘렸나 해서 입가를 만지니 다행히도 묻어 나오는 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딱히 밖에서 할 게 없어 집으로 돌아게 되었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멈춰! 풀떼기 멈춰!”

물론 나는 밥이 아니라 샐러드를 먹었다. 아 오늘따라 치킨이 땡긴다.

****

디자이너 패션쇼 오디션 당일 아침.

“오랜만이에요.”

“저희 하루 만에 보는 건데요?”

“크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마른 기침을 하는 예진을 보고 나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래 그렇게 매일같이 보는데 하루 안 봤으니 오랜만일 만도......

하지 않는데?

아무튼, 우리는 곧장 데마시아로 향했다. 오늘 볼 오디션은 나만 가는 게 아니었으니까.

“왔어요? 여기 메이크업리스트 분들한테 메이크업 받으면 되고, 우연 군 옷은 저기 걸려 있으니까 입으면 돼요.”

“알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라고 했었던 장소에 도착하니 곧바로 실장과 마주쳤고 나는 바로 의자에 착석했다.

이미 나를 제외한 두 명은 먼저 와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내가 앉자마자 내 옆에는 두 명의 메이크업리스트가 붙었고,

눈을 감으라고 하는 대로 감고, 뜨라는 대로 떴다.

그렇게 메이크업을 빠르게 하고 있는데 옆에서 어떤 여자가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더니 말했다.

“이 친구는 글리터만 눈에 좀 바르죠?”

“앗, 네 알겠습니다!”

“으음, 괜찮을까요?”

“안 하는 것도 충분히 청순하고 괜찮겠지만 이 디자이너는 화려한 걸 좋아해요. 확 튀는 그런 거. 아마 저게 포인트가 될 거고요.”

실장과 여자가 대화하는 사이 내 눈에는 하얀색 반짝이가 얹어졌다.

‘다른 건 안 하고 이것만 하니까 뭔가 분위기가 좀 다른데?’

아이라인이나 색조 화장을 안 하고 최대한 투명하게 한 메이크업에서 반짝이를 얹으니 유독 눈이 부각 되었고, 순하면서도 눈 주위가 빛나면서 화려한 얼굴이 완성됐다.

“머리는 내가 할게요,”

메이크업이 끝나자 아까 지시를 내렸던 여성이 다가오더니 말하자마자 메이크업리스트들이 전부 자리를 비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고데기로 내 머리를 만지자 세팅이 끝났으며

“완벽하네요.”

“이건 그냥 오디션을 봤어도 떨어졌을 일이 없었겠는데요?”

실장님과 메이크업리스트가 감탄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괜찮네.’

눈 주위에 있는 반짝이들은 위화감 없이 새까만 눈동자와 머리 색을 반대로 어울렸다.

거울 속에는 내가 여태껏 해보지 못한 머리와 메이크업이어서 그런지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것 같았고 세팅된 앞머리가 특히나 더 그 느낌을 살렸다.

준비되어 있던 얇은 흰색 긴 팔과 청바지를 입자 사이즈가 딱 맞아떨어졌다.

“이 바지 어디 거예요?”

옷을 입고 나오면서 앞에 있던 실장에게 물었다.

웬만해서는 맞는 바지가 없어 항상 벨트를 차거나 허리를 줄여야 했었는데 지금 입은 바지는 그런 게 없었다,

기장도 딱 맞았고.

“오늘 오디션 볼 한나 디자이너가 만든 청바지야. 근데 키 좀 컸나 보네? 약간 오버되도록 고른 건데.”

“네. 안 재봐서 모르겠지만 조금 큰 거 같더라고요.”

“정말? 완전 좋은 소식이네. 키 한 번 재고 가자.”

어쩐지 그냥 입고 다니기에는 청바지치고 디자인이 화려하다 싶었다.

기본적으로 스키니에 하이웨스트 바지로 무릎도 당연히 찢어져 있었다. 버튼도 세 개가 달려 있었고.

그렇게 실장을 따라 키를 재는 기구에 올라서니 180.1cm가 나왔다.

‘2.1cm나 컸어!’

저번에 쟀었을 때가 178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 사이에 2cm나 큰 거였다. 마의 180을 넘었으니 그래도 한고비는 넘겼다고 봐야겠지.

7과 8은 단위부터가 달랐다.

“새로 업데이트 해야겠네. 키 큰 거 축하해요 우연 군.”

“감사합니다!”

그동안 몸무게만 계속 쟀지, 키가 큰 걸 보니까 기분이 좋아졌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시 돌아오자 그런 나를 보고 영문을 모르겠는 듯 다른 두 명의 모델이 머리에 물음표를 띄웠다.

“그럼 출발하죠.”

우리는 벤 하나로 이동했다.

매니저들은 어디로 갔는지 실장이 운전석에 앉았고, 그녀는 이동하면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데마시아에서 브랜드 패션쇼도 아니고, 디자이너 패션쇼에 오디션을 왜 보러 가느냐 하면 이 디자이너가 요즘 떠오르는 신성이라 그래요.”

사전에 주어진 정보를 알았기에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서울 모델리스트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았다고 했었지.

“대상 수상한 거랑은 별개로 이은석 디자이너랑 친분이 깊고 마당발이라서 저번 S/S 패션쇼가 성황리에 끝나 이번 F/W에 경쟁이 치열해졌어요.”

실장은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사실 그것도 신인 한정이기는 하죠. 이한나 디자이너는 기본적으로 슬렌더를 선호해서 세 분이 선정됐고 그래도 데마시아가 있으니 어지간하면 뽑힐 거예요.”

그 말은 즉 떨어진다고 하면 ‘어지간히’ 별로여서 떨어졌다는 말로 해석된다.

내가 조수석에 앉았기에 백미러로 뒤를 쳐다보니 긴장한 기색의 모델 둘이 보였고,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 걸로 보아하니 경력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한 명은 약간 어리바리해 보이고 한 명은 긴장한 건가 표정이 굳었네.’

실장이 왜 걱정을 하는지 알 법도 했다.

우리 셋은 아마도 전부 다 신인.

인맥 좋고 검증된 신인 디자이너 패션쇼에 서게 된다면 아마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가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끊임없이 조언하는 실장의 말을 들으면서 그저 나는 창밖을 바라봤다.

신인이라고 해서 다 같은 신인은 아니니까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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