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38화 (38/137)

〈 38화 〉 chapter 37. 디자이너 패션쇼 오디션 (2)

* * *

오디션장에 도착한 우리는 대기실로 이동했다.

실장은 우리를 데려다주고는 사라졌고, 대기실 안에는 전부 오디션을 보러 온 모델들로 차 있었다.

족히 서른 명은 되어 보이는 남자들.

향수 냄새가 섞여서 조금 역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버틸만했다.

“으아 진짜 붙었으면 좋겠다.”

“내 말이. 조금만 덜 치열했으면 좋았을 텐데.”

같이 온 두 사람이 하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풋풋하네.’

한 명은 스물, 다른 한 명은 스물하나로 나보다 3살에서 4살 정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긴장을 하고 있는 건 이 둘뿐만이 아니었는지 대기실을 둘러보면 몇몇 이들도 불안한 기색을 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오디션 기회는 일반인에게는 잘 주어지지 않으니 아마도 전부 에이전시나 소속사가 있을 텐데.

‘그나마 몇 명 괜찮은 새싹들이 보이긴 하네.’

실전에 들어가서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마스크가 꽤 독특한 이들이 눈에 들어오는 거 말고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 우연아 너는 안 떨려?”

“네? 아, 저도 떨려요.”

“역시 그렇지? 하긴 너는 완전 처음일 테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나도 이런 거 처음 보러 왔을 땐 엄청 떨었어.”

“실수만 안 하면 돼 실수만.”

내게 조언을 하는 둘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긴장감이라고는 하나도 없지만.’

굳이 그런 걸 입 밖으로 꺼내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실제로 나는 이번 오디션이 ‘처음’이었으니.

이왕 이렇게 된 거 긴장했다는 걸 핑계로 시선을 아예 바닥에 고정했다.

호들갑 떨면서 같이 대화를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러자 다시 둘은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지금 보는 건 그저 오디션일 뿐, 쇼에 서는 게 아니다,

쇼에 서는 짜릿한 경험이 무엇인지 아는 나로서는 고작 오디션으로 설렘과 긴장을 가지기엔 상대가 그런 수준이 안됐다.

세계적인 디자이너부터 브랜드 수석 디자이너처럼 판도를 바꿀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렇다고 해서 불성실하게 임한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긴장이 되지 않는 것일 뿐.

만약 이런 오디션에서 떨어진다면 아마 가장 충격받을 사람은 나이지 않을까.

“한동현 군 대기해주세요.”

“네!”

오디션은 한 명씩 진행되었기에 사람들이 차례로 불려 나갔다.

같이 온 두 사람이 내 바로 앞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중 한 명이 불러가자 이제 내 순서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내 순서는 14번째.

나는 여전히 호명이 될 때까지 손을 모으고 한쪽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있었다.

차라리 일찍 하고 가는 게 낫지. 뒷번호면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을 뻔했네.

“이우연 군 대기해주세요.”

“네.”

드디어 내 이름이 불리자 나는 대기실 밖으로 나와 오디션장 문 앞으로 가서 대기했다.

내 바로 앞 차례였던 스물하나인 모델이 나오면서 눈이 마주쳤고, 그러자 그는 작게 ‘힘내’라고 말했다.

‘귀엽기는,’

고개를 끄덕이자 그와 동시에 안에서 비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들어가시면 돼요.”

“네.”

그 말과 동시에 나는 문안으로 걸음을 한 걸음 내딛었다.

‘모델 이우연’으로 변한 채로.

****

“데마시아에서는 전부 신인을 보냈네요.”

“개인적으로 첫 번째는 괜찮았는데 두 번째는 별로예요. 마스크로 따지면 차라리 앞에 했던 애들이 나은 거 같은데.”

짧은 코멘트가 이루어지면서 다섯 명 모두가 종이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추 작성이 끝나자 음악을 틀라는 사인을 보냈고, 그 음악 소리와 함께 다음 모델이 들어왔다.

‘뭐야.’

볼펜을 손에 대충 쥐고 있었던 이한나의 손에서 툭, 하고 볼펜이 떨어졌다.

앞서 들어왔던 모델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워킹 속도. 무언가 빠르면서도 절도 있는 움직임과는 반대로 상체는 고정되어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워킹.

하지만 이한나가 주목한 건 워킹이 아니었다.

‘마스크가 왜 이래?’

얼굴부터 전신이 새하얀 피부는 백옥 같은 피부와 함께 얼굴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줬다. 조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화사해진 거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하지만 저 눈.

화장기가 없어 보이는 얼굴인데도 눈 주위에는 반짝이를 발랐는지 반짝거렸지만 오히려 위화감이 없었다.

이런 오디션에서 저런 메이크업을 하고 오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앞에 있던 모델들이 저런 메이크업을 했으면 눈살이 찌푸려졌겠지.

하지만 이한나는 모델이 앞에 도착해 포즈를 취하고 뒤로 돌아갈 때까지 설득당하고 있었다.

‘수수하지만 화려해.’

바지는 자신이 작년에 만들었던 옷이었고 상의는 그저 무난한 티였다.

모델의 강렬한 눈빛과 반짝이는 메이크업, 뚜렷한 이목구비가 담긴 마스크가 한눈에 들어왔고 그다음은 특유의 워킹으로 몸에 시선이 갔다.

우아함? 화려함? 둘 중 뭐가 됐든 이한나 자신이 추구하는 옷의 방향성과 아주 일치했다.

워킹을 끝낸 모델이 질의응답을 받기 위해 앞으로 다시 걸어오자 그녀는 재빠르게 A4용지를 넘기면서 모델의 사진과 정보를 확인했다.

프린트되어 있는 컴카드에 담긴 프로필 사진 세 장은 전부 제각기 다른 컨셉.

사진으로만 봐도 모델의 존재감이 확실히 느껴졌다.

“몇 년 차죠?”

“정식 모델로 계약한 지는 반년이 채 되지 않았습니다.”

반년?

이한나는 프로필 상세 설명이 있는 정보 중 나이로 시선을 돌렸다.

올해로 17살.

‘하? 이제 막 고등학생밖에 안 됐잖아?’

모델 중에는 동안이 많으니 그래도 스물을 예상했었다. 그런데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미성년자였다니.

하지만 모델이라는 직업은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이한나는 종이를 내려두고 모델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워킹은 배운 적 있나요?”

“아니요 없습니다.”

“춤이나 발레, 무용 같은 걸 배웠던 적은?”

“없습니다.”

“런웨이를 걸어본 경험이 전무 한데, 무대 위에서도 본인이 지금 보여준 모습이 그대로 나올 거라고 생각하나요?”

차분한 모델과는 다르게 이한나는 조금 흥분했는지 말이 빠르게 나갔다.

심사위원 다섯 명이 전부 쳐다보는 시선 속에서 모델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그 장소가 어디가 됐건 제가 모델이라는 건 변치 않으니까요. 무대 위라면 더 특별해질 것이고 그 경험을 하나씩 쌓아갈 생각입니다.”

결코 오만하지 않은 확신에 찬 그 목소리에, 이한나는 고개를 아무 말 없이 끄덕였다.

‘무대에서는 더 특별해질 수 있다는 거지.’

이후 이어진 질문들은 전부 가벼운 질문들이었고, 이한나는 더 이상의 질문 없이 모델을 바라보기만 했다.

예쁜 얼굴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는데,

자꾸만 홀리는 것 같았다.

‘무슨 옷을 입히는 게 제일 잘 어울릴까.’

머릿속으로는 그와 가장 잘 어울릴 최적의 옷을 고민하고 있었다.

“수고하셨어요. 이만 나가보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벌써?

그러고 있던 사이 질의응답이 끝났는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 무조건 붙여야 돼요.”

“실전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 본 사람들 중에서는 비교 불가네요.”

이한나의 말에 옆에 있던 다른 심사위원이 덧붙여 말했다.

사실 모델 오디션은 98%가 보이는 외모로 인해 결정됐다. 나머지 2%는 모델의 풍기는 포스와 아우라의 차이.

하지만 그녀는 저번 서울패션위크에 섰었던 모델들이나 풍겼던 아우라가 17살 모델에게서 느껴졌었다.

그녀만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간에 결국 모델이란 이미지로 먹고 사는 직업. 그런 면에서 방금 모델은 자신이 원하는 컨셉에 꼭 맞는 이미지였다.

‘가공되지 않은 원석이라면, 내가 빛나게 만들어야지.’

단순한 신인 디자이너가 아닌 그녀는 의욕을 불태우면서 종이에 그에 대한 평가를 써 내려갔다.

****

“수고했고, 다들 실수한 점은 없었지?”

전부 없었다고 대답하자 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세 명의 얼굴이 모두 어둡지 않은 걸로 보아하니 결과는 좋게 나올 듯싶었으니까.

이번 신인 디자이너의 패션쇼는 참석하는 다른 디자이너들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오디션까지 볼 패션쇼는 아니었다.

꽤 인지도 있는 모델을 내보내기에는 애매하고, 그렇게 해서 나가게 된 게 신인 세 명.

사실 엄연히 ‘신인’은 한 명밖에 없었다.

‘신인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회사에 들어오면서 캐스팅 팀장부터 대표까지 구워삶은 그가 과연 신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 실장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니까 경력은 없어서 신인은 맞는데 또 하는 걸 보면 진짜 몇 년은 구른 기성 같단 말이지.

특히 그 나이대 같지 않은 성숙함도 한몫했다. 여타 다른 남자 모델들과는 달리 우연은 조용하고 또 고요한.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여유가 있었으니까.

회사에 처음 왔었을 때도, 오늘 오디션장을 향하면서도 그랬다.

오늘 오디션장을 오가면서 우연이 보인 모습만 하더라도 실장은 왜인지 모를 확실을 얻었다.

‘진짜 성공할 거 같단 말이지.’

캐스팅 팀장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전부 회사로 돌아간 뒤 각자의 집으로 귀가했고, 이틀 뒤 세 명 모두 오디션에 합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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