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 chapter 39. 토끼와 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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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껏 많은 시선을 한 몸에 받아본 적은 많았지만, 지금과도 같은 상황은 달갑지 않았다.
‘...... 이름만 말하고 그냥 앉아야지.’
그로 인해 다른 아이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간에 일단 나는 이 상황에서 빠르게 도망치고 싶었다.
“17살 신입생 이우연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어어, 아직 앉으면 안 되지.”
“......?”
왜 안 되는 건데.
불성실한 자기소개이긴 했지만 그래도 소개할 건 소개한 거 아닌가.
앉으려고 했던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담임의 말에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런 나와 눈이 마주친 담임이 입꼬리를 싸악 올렸고.
“첫 타자가 그렇게 끝나면 다른 애들도 전부 그렇게 한단 말이지. 재미없잖아? 시간도 많은데.”
“......”
“데뷔했어? 소속사는 있고? 여자친구도 있나?”
장난기가 다분하게 섞인 질문 세례가 퍼부어졌다.
‘이걸 대답해야 해 말아야 해?’
첫날부터 담임한테 좋게 찍힌 건지, 나쁘게 찍힌 건지는 몰라도 싱글벙글 웃는 얼굴에 퇴짜를 놓을 순 없었다.
까라면 까야지 뭐 어쩌겠어.
반 아이들의 반응이 좀 있었으면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담임이 말할 땐 담임을 쳐다보다가 그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전부 다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에이전시 있고 모델로 데뷔도 했지만 여자친구는 없습니다.”
“시원시원하니 좋네, 그러면 본인 성격에 대해서랑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한 마디하고 앉자.”
이놈의 자기소개는 사실 말해야 했던 게 정해져 있었던 거냐. 그럴거면 처음부터 말해주지.
첫 번째 타자여서 희생양이 된 기분이었지만 빨리 해치우자는 생각이었다.
“성격은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시원시원합니다. 하고 싶은 말은...... 1년 동안 싸우는 일 없이 잘 지내고 싶다?”
빨리 해치우고 싶다는 마음에 머리에서 쥐어 짜내느라 의문문으로 끝났지만 담임은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라는 거겠지.’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임시 반장이 낯을 안 가린다니까 다행이네, 앞으로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오기 전에 임시 반장한테 가서 먼저 물어봐라.”
본심은 또 따로 있었네.
자연스럽게 자기 일을 나한테 토스하는 폼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거 같았다.
“우리 학교가 연애 금지는 아니지만 너희가 원하는 직업이 모델인 만큼 굳이, 이 나이에 연애를 추천하진 않는다. 알아서 잘할 거라 믿어.”
연애라는 건 원래 할 사람은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한다.
그런 의미에서 연애 금지를 한다고 해서 하는 애들은 하겠지.
아마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냐고 물어본 건 지금 이 말을 하기 위한 빌드업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자기소개는 방금 한 우연이를 기준으로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자. 간단하게 자기 이름, 성격, 한 마디만 하고 뭐 더해도 상관은 없긴 해.”
다른 애들한테도 나한테 했던 것처럼 할 수는 없다는 걸 알지만, 역시 첫 번째는 희생양이라는 게 정답이었다.
내 오른쪽부터 시작한다는 말에 왼쪽에 앉아 있던 옆자리 남자애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작게 예스, 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마지막이라고 딱히 좋은 것도 아니야 그거.
그렇게 내 옆 분단에 앉아 있던 여자애가 일어나면서부터 자기소개 릴레이가 시작됐다.
‘어차피 이거 들어도 다 기억 못 할 게 뻔하지만.’
그래도 나는 최대한 아이들의 자기소개를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애초에 이런 자기소개 한 번 듣는다고 해서 반에 어떤 애가 있는지 기억할 리는 만무하니까.
하지만 개중에서 몇몇은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 않아도 뇌리에 박히는 이들이 몇몇 있었는데.
“유성운입니다! 성격은 애교가 많은 편이구 어, 요리하는 거 좋아해여! 저희 반 모두 친해졌으면 좋겠어여! 저도 노력할게여 감사합니당!”
다행히도 이런 녀석은 한 명뿐이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일단 나를 제외한 37명 중에 제일 엮이고 싶지 않은 1순위가 정해졌다.
자기소개를 하던 도중 쉬는 시간이 한 번 주어졌지만 다들 친해지지 않아서 그런지 교실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그나마 몇 명이 대화를 하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왔었지만 눈치가 보이는지 복도에 나가서 대화하더라.
결국 쉬는 시간이 어영부영 지나고 4교시 수업 시간이 되고 나서야 우리는 전부 자기소개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 동안 자리를 비웠던 담임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왔는데
“자리는 앞으로 두 달에 한 번! 방법은 제비뽑기로.”
그 정체는 바로 자리를 결정할 제비뽑기였다.
전부 제비를 하나씩 뽑고 나서 지믈 들고 38명이나 되는 인원이 뒤쪽으로 몰리자 바글바글했다.
내가 뽑은 종이를 펼치자
‘거북이?’
번호가 아닌 거북이라는 세 글자에 잠시 당황했다.
다시 포커페이슬 되찾긴 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이런 반응은 나뿐만이 아닌 듯 다들 당황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칠판에 자리 배치표를 그리는 게 아니라 A4 용지 하나를 든 담임은 입을 열었고
“백설공주랑 난쟁이!”
비로소 ‘거북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내 짝은 토끼인가?’
차례로 호명이 되면서 자리가 쭉쭉 차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지막 세 번째 줄이 되도록 거북이의 ‘거’자도 들리지 않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뒤로 가고 싶지는 않은데.’
결국 뒤에서 두 번째 줄밖에 남지 않은 상황.
다시 1분단으로 돌아와서 창가 자리를 호명할 차레가 되자 나는 제발 거북이가 불리길 기도했다.
“거북이랑 토끼!”
‘됐다!’
이런 내 기도가 들린 건지는 몰라도 거북이가 호명되자 나는 빠르게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같은 뒤쪽이라도 창가 자리면 나쁘지 않지.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에 착석하자 내 옆자리에도 누군가 풀썩, 하고 앉았다.
“안녕 이쁘니? 잘 부탁해애!”
“...... 어.”
책상에는 연분홍색 가방이 턱, 하고 올려지면서 들리는 말에 나는 속으로 경악했다.
토끼, 그러니까 내 짝이
“으응? 왜 대답 안 해줘어?”
“어 안녕. 나도 잘 부탁한다.”
기피 대상 1순위라니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군.
나는 다시 자리 뽑기를 하자고 말하고 싶었으나 말할 수 없었다. 이건 운명의 장난인가?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지.
“자아. 자리에 대한 불만은 일절 받지 않으니 참고하고.”
마지막 자리가 호명되자 내 희망의 불씨도 같이 꺼져버렸다.
일단 여자애가 아니라는 거에 한 번 좌절. 그리고 기억에 남는 이 녀석이라는 거에 두 번 좌절.
“흐흐흐흥.”
옆에서는 뭐가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면서 책상 위에 하나 둘씩 물건이 놓였다.
분홍색 텀블러, 분홍색 필통, 분홍색 노트.
이 녀석 다른 의미로 '천상남자'인 거 같다.
두 달을 어떻게 버틸지 벌써부터 막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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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은 자신이 우연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티 내지 않았다.
옆자리가 되었을 때도 이게 무슨 횡재냐 싶었지만 그것도 티 내지 않고 꾹 참았다. 혹시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르니까.
처음 봤었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분명 같은 나이에 같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우연은 뭔가 달랐다.
아웃스타그램에서는 웃는 사진이 잘 올라오곤 했는데 지금 지켜본 결과로는 무표정으로 있을 때가 더 많았고.
’핫. 너무 쳐다봤나?‘
옆자리여서 쳐다보면 바로 티가 날 걸 알고 있음에도 자꾸만 시선이 돌아가는 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정면을 바라보는 것보다 왼쪽을 바라보는 게 내 눈에 이득이라고 하는 걸 어떡해.
우연을 알게 된 지 반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성운의 머릿속에서 우연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처음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예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팔로우 하지 않고도 우연의 계정을 들락날락거리고 있었으니까.
입덕 부정기를 겪다가 결국 팔로우를 누른 후부터는 좋아요와 댓글을 꾸준하게 달면서 SNS 팬으로 진화하게 되어버렸다.
그런데 같은 학교에 같은 반, 심지어는 옆자리까지 되었으니 이건 친해지라는 신의 계시가 아닌가.
우연의 친구 자리를 따내기 위해서, 성운은 또다시 노트에 볼펜으로 글을 적고 그림을 그린 뒤 노트를 옆으로 스윽 밀었다.
입학식인데 정상수업 너무해 (?·?·?) 그리구 너 틴트 뭐 써?
자신에게로 밀어진 노트에 시선을 내린 우연이 볼펜으로 무슨 말을 적어줄지 기대하면서 성운은 애써 정면을 바라봤다.
나도 같은 틴트로 하나 사서 내일 그걸로 또 말 걸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성운에게로 밀어진 노트에 재빠르게 시선을 내렸다.
나 틴트 잘 안 써.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_^
왠지 모르게 원천 봉쇄 당한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에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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