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45화 (45/137)

〈 45화 〉 chapter 44. 자취

* * *

“연아! 빨리 타!”

“...... 연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

“으음, 그래도 뭔가 좋잖아?”

“좋긴 뭐가 좋아요.”

“네가 닉네임으로 설정해 놓은 거다?”

놀리는 듯한 말투에 나는 그냥 입을 꾹 다물었다.

저번 악플에 대응하면서 올린 입장문이 예전에 블로그에 올렸었던 공지와 매우 유사한 탓에 이슈가 됐다.

사실을 들은 에이전시 입장에서야 이때다 싶었는지 홍보 마케팅을 했고 덕분에 패션잡지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거기서 멈췄으면 문제없었겠지만 내 SNS 댓글에는 전부 블로거 연과 동일인물이냐는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나는 블로거 연이 내가 맞고, 동일인물이라는 글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로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았던 블로그에 들어가서도 글을 남겼으며

덕분에 더 이슈가 되었다.

‘이름이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전부 비공개를 돌려서 괜찮을 줄 알았던 글들은 이미 사람들이 다 퍼다 나르고 난 후였다.

그래서 삭제를 하나 마나 별 의미가 없었고 당장 페룩 페이지에만 가도 내가 쓴 글이 떡하니 있었다.

흑역사를 인기와 맞바꾼 거 같은 느낌. 왠지 기분이 묘했다.

여기저기 떠돌고 있는 걸 전부 내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애초에 내가 올렸던 글들이었으니 그대로 뒀다. 평소에는 딱히 크게 신경 쓰고는 있지는 않았지만

“나 그거 내 잠금 화면 사진으로 해놨다?”

“요즘 사람들 참 할 거 없나 보다.”

이렇게 주변 사람이 놀릴 때면 전부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예진이 보여준 잠금 화면에는 내가 찍은 패션잡지 화보를 흑백으로 바꿔서 가운데에 내가 쓴 글이 적혀 있는 사진이 설정되어 있었다.

원래 작가 옆에서 작가가 쓴 소설 대사를 읽으면 그렇게 손발이 오글거리는 법인데.

내가 작가는 아니지만 간접 체험을 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집에서 시도 때도 없이 와서 놀리는 다윤보다야 이 정도 수준은 그래도 약과긴 하지만.

“그래서 이번 주말에 이사한다고?”

“네. 원래 빈방이어서 바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확실히 편해지기는 하겠네. 학교도 가깝고 회사도 가깝고.”

“그렇겠죠.”

“..... 나도 거기 근처에 살아.”

“아 그래요?”

“응. 회사랑 가까운 게 편해서”

가까운 게 제일 편하긴 하지.

나는 맞장구를 치면서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 앱을 실행시켰다.

그러자 그런 나를 힐끔 보고는 예진은 입을 열었다.

“요즘 셀카 자주 올리더라.”

“딱히 제가 보여줄 게 이거밖에 없어서요.”

“팬들도 좋아하잖아.”

“으음...... 팬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 않아요?”

“애매하기는 무슨, 팬클럽 있으면 말 다 한 거지.”

어색하게 웃었다.

모델에게 가장 중요한 첫 번째는 이미지고 두 번째는 인지도다.

그런 면에서 내가 이 인지도를 유지하려면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SNS를 활발하게 해야 하는데, 나는 딱히 올리는 컨텐츠가 없었다.

그래서 사진들을 올리는 업로드 빈도수를 높였다. 예전에는 잘 찍지 않았던 셀카부터 시작해서 직접 찍은 일상 사진까지.

가끔 생각나는 말이나 문구가 있으면 적었었는데 그것도 나름 반응이 좋아서 조금씩 하고 있는 중이었다.

‘팬?’

확실히 예전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늘긴 늘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팬이라는 정의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팬이라 하면 일단 아이돌 팬이 제일 먼저 떠올랐고, 전생에서는 딱히 그런 팬이라고 할 만한 존재가 없었다.

이번 생은 다른 케이스긴 하지만 아직 이 사람들이 내 팬인가에 대해서는 긴가민가 했다. 그냥 가볍게 좋아하고 지나갈 수도 있지.

팬이라는 존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다. 나중 가면 나만 힘들어질 테니까.

좋아했던 사람이 떠나는 만큼 힘든 일은 없다.

“도착했다!”

“으으,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요.”

“...... 그러게.”

차에서 내리면서 말하자 예진의 대답이 한 박자 느리게 들려왔다.

‘퇴근을 빨리하고 싶은 건 본능 아닌가?’

학교를 빠지고 일을 하러 온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했지만 말이다.

오늘 할 촬영은 브랜드 기초화장품 광고 모델 촬영이었다.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자 여느 때처럼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마주했고

이어지는 촬영에서는 주로 상반신이나 얼굴 위주로 촬영했지만, 표정 연기에 능숙한 나로서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칼퇴근 성공.

****

“아 진짜 개힘들어.”

“짜장면 시킬까?”

“어. 탕수육도 시켜라.”

다윤이 바닥에 엎어져서 꼼지락거리고 있는 동안 메이버에 검색해 평점이 제일 높은 곳으로 짜장면 두 그릇과 탕수육을 시켰다.

‘그러게 무거운 거 나도 든다니까.’

내가 뭔가를 들려고만 하면 옆으로 와서 뺏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안 든 건 아니긴 하지만 다윤이 계속 나서서.

그래도 자취를 빨리해서 다행이다.

부모님은 아직 고등학생인데 너무 이르지 않냐며 걱정하셨지만 학교와 회사를 오가면서 내가 피곤해하는 걸 보고 자취를 허락하셨다.

속전속결로 집을 알아보는데 꽤 괜찮은 오피스텔 매물이 있어서 바로 계약을 체결했고.

언제든지 들어가도 좋다는 말에 토요일에는 청소를 싹 하고, 가구와 옵션에 없는 가전제품 몇 개를 들였다.

그리고 일요일에는 대망의 내 짐들을 옮기는 일이었는데 다윤이 도와주기로 해서 이렇게 됐고.

“그러다가 내일 근육통 오는 거 아니야?”

“나를 물로 보는 거냐? 이 정도는 껌값이지.”

자기 가슴을 주먹으로 두 번 툭툭 치는 걸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저녁은 다윤을 픽업해갈 겸 부모님이 오셔서 이 근처에서 같이 외식을 하기로 했다. 그러면 그전까지는 적어도 정리를 좀 해야 하는데.

“근데 너 은근 짐 많다? 별로 없을 줄 알았는데.”

“옷이 많아서 그래. 하 저거 언제 다 정리하냐.”

“책들은 저기 책장에 꽂으면 되는 거지?”

“대충 꽂아두면 내가 나중에 다시 정리할게.”

다윤이 도와주면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집 안에 쌓여 있는 박스들을 보면 전의를 상실했다. 이걸 다 언제 하지.

평일에는 따로 정리할 시간도 없을 게 분명했다. 오늘 좀 해놔야 그나마 편하겠지.

‘일단 옷은 입고 다녀야 하니까 옷부터.’

사실 짐의 가장 큰 비율이 옷과 액세서리였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이걸 정리하면 짐 정리의 반은 했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오늘 안에 다 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박스를 좀 줄일 생각으로 나는 박스를 열고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야아!! 책 다 꽂아놨는데 이제 뭐 하면 됨?!”

“가방에 그릇이랑 젓가락 해서 있는데 싱크대에 정리해 줘!”

“알겠어!!”

굳이 크게 말하지 않아도 다 들리는데.

집에 울려 퍼지는 다윤의 목청소리에 나는 작게 웃었다.

띵동ㅡ

‘짜장면 왔다.’

옷을 정리하다가 울린 초인종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방을 나오자 바로 현관이었고 문을 열며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여기요.”

“네에, 잠시만요.”

음식을 건네주고 돈을 받아 가는 손가락이 얇았다.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여자였고 얼굴은 헬멧을 써서 보이진 않았지만.

‘여자가 배달하는구나.’

집에서 배달 음식 시켜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배달원과 마주칠 일이 없었다. 가끔 시켜서 음식을 받는 것도 내가 안 하다 보니까.

“자, 잠시만요!”

새삼스럽게 배달원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배달원은 잔돈을 거슬러 주지 않고 허둥지둥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안 가지고 왔나 본데.’

척 보아하니 잔돈이 모자란 듯 보였다. 있는 주머니를 다 뒤진 것 같은데 나오는 돈은 천 원 두 장과 만 원권밖에 없는걸 보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잔돈을 안 들고 온 거 같아서 다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집에 돈 있나 확인해볼게요.”

나는 문을 고정시켜 놓고 음식을 내려놓은 뒤 다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 오천 원 있어? 배달원이 잔돈을 두고 왔대서.”

“내 지갑 가방에 있으니까 꺼내 가. 있을걸?”

“오케이 땡큐.”

“배고파 뒤지겠으니까 빨리 갖고 오기나 해.”

마지막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다윤의 가방을 뒤져서 나온 지갑을 들고 현관으로 갔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는지 헬멧을 벗은 배달원과 눈이 마주쳤고 나는 다윤의 지갑에서 오천 원 한 장을 꺼내서 건넸다.

“여기요.”

“네, 네.”

“저 돈 돌려주셔야 되는데.”

“죄송합니다! 여기요. 맛있게 드세요.”

돈을 받고 다시 돈을 안 주길래 내가 말했다.

그러자 배달원은 내가 줬던 만 원 한 장을 다시 돌려주고는 급하게 자리를 떴고 나는 그러려니 했다.

‘시간 많이 잡아먹긴 했지.’

그래도 다시 오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배달은 신속이 생명인데 아마 돌아가면 좀 혼나지 않을까.

내가 상관할 바 아니지만.

문을 닫고 한쪽에 고이 모셔져 있던 봉투를 들고 거실로 갔다.

“무슨 배달원이 잔돈을 안 들고 다니냐.”

“아직 한 지 얼마 안 됐나 보지. 어려 보이던데?”

“궁랭? 츄릅, 야 긍데 여기 마시따.”

“다 먹고 말해 다 먹고.”

입안에 있는 걸 채 삼키지도 않고 말하는 다윤의 모습에 질색했다.

볼이 빵빵해져서 우물우물 거리는 게 햄스터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내용물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

짜장면을 섞고 한 입 떠서 먹자 입안에 퍼지는 짜장 소스와 면발에 젓가락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근데 너 이런 거 먹어도 돼?”

“조용히 해.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어.”

“아니......”

억울하다는 듯 다윤이 칭얼거렸지만 철저히 무시하고 탕수육을 공략했다.

맛있는 건 칼로리 0이랬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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