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chapter 47. 디자이너 패션쇼 D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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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네요. 그래도 속도에 조금 더 신경 써서 보폭을......”
저기요 선생님, 아직 속도 조절은 안 배운 걸로 아는데요. 아니 애초에 할 줄 알긴 하지만.
“우리 패션모델과 맞아? 왜 이렇게 이론 시험이 많아!”
그거야 아직 우리가 1학년이라서 그런 거 같은데, 아마 2학년만 돼도 ALL 실기일 거 같았다.
“자유다! 자유!”
그렇게 마의 중간고사 기간이 끝났다.
다들 시험 기간 내내 골골거리면서 있었지만 시험이 끝나자마자 좀비처럼 벌떡 일어나더라. 다들 전에 없던 높은 텐션들을 보여줬다.
나야 첫 시험은 무난하게 다 잘 본 거 같아서 이번에 나올 성적도 꽤 볼 만할 거 같은데.
“시험도 끝났는데 주말에 한 번 만나서 같이 한 번 놀래?”
“미안, 나 바빠서 못 놀 거 같아.”
“아.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될 때 놀자.”
“그래.”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했던 서아도 시험이 끝나자 선뜻 놀자고 제안해왔지만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시험은 끝났는데 아직 끝난 게 하나도 없네.’
아직 잡혀 있는 5월 일정 중에 끝난 거라고는 시험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이한나 디자이너 패션쇼도 다음주 중으로 예정되어 있고 7월 패션 잡지 화보 촬영, SNS 광고 촬영, 개인 프로필 촬영까지 일정이 잡혀 있었다.
안타깝게도 시험이 끝났지만 나는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매일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하면서 몸을 관리했고 에이전시에도 수시로 가야 했으니.
모델 일로 인해 제일 바쁜 시간들을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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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 관객석에서 캐스팅 팀장님이랑 실장님 볼 수 있을걸?”
“그래요? 근데 그쪽에서는 저를 봐도 저는 그쪽을 못 볼걸요.”
“하긴 조명이 너무 쎄니까.”
조명이 아니더라도 볼 수 없지만, 거기에 대해서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내 옆에는 그때 오디션을 같이 봤었던 두 명이 있었고, 우리는 다 같이 패션쇼장으로 가고 있었다.
헤어 메이크업부터 의상까지 전부 가서 해야 했기에 전부 생얼인 상태였는데
‘화장이 왜 사기인지 알겠네.’
한 명은 평범했지만 다른 한 명은 차이가 극명한 걸 보고 나는 감탄했다. 화장을 잘하는 것도 능력이지.
생얼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를 썼지만 마스크를 벗은 얼굴을 본 나로서는 그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었다. 분명 사나운 형이었는데 말이야.
패션쇼장 안으로 들어서자 상당히 많은 스탭들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예진은 차로 가 있을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말했고, 우리 셋이 안으로 들어서자 곧장 한 스탭이 우리에게로 다가와 말했다.
“어디 소속이신지랑 이름 말씀해주세요.”
“에이전시 데마시아 이우연입니다.”
“한동현입니다!”
“양현우입니다......”
“네, 확인되셨고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스탭은 들고 있던 종이에 무언가를 체크하더니 그대로 자리를 떴다.
덕분에 그 자리에 덩그러니 셋이 남게 되었지만 장소가 익숙해서 그런가 나는 오히려 편안했다. 하지만 다른 둘은 아니었는지
“어디 가신 거지?”
“으음, 여기 계속 서 있어도 될까?”
사람들이 오가고 있는 곳에서 서 있기가 뻘쭘했나 보다.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에 그런 그들을 보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아마 저희 담당 헬퍼들 데리러 가신 걸 거예요. 곧 있으면 오실걸요.”
“어, 어 그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야에 남자 둘, 여자 한 명이 아까 우리에게 말을 건 스탭과 함께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여기부터 우연 군, 동현 군, 현우 군이에요. 이분들은 담당 헬퍼 분들이시고 그럼 이만 저는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빠르게 소개를 마친 스탭이 자리를 떴다.
그러자 목걸이를 달고 있는 헬퍼들이 다가와 자기 담당인 모델에게 말을 걸었다. 내 앞에 선 사람은 아쉽게도 남자 헬펴였다. 이왕이면 여자...... 흠,
아무튼 간에. 담당 헬퍼는 디자이너 지시서가 내려져 있는 종이를 들고 모델에게 스타일링 유의사항부터 시작해서 의상, 순서와 동선까지 하나하나 브리핑하고 점검한다.
이번 패션쇼는 순수한 의류 패션쇼여서 동선이 길지 않았지만 아마 그걸 감안해서 신인들을 뽑은 거겠지.
헬퍼는 브리핑이 끝나고 나서도 메이크업을 받는 걸 옆에서 지켜보면서 세심하게 체크해 나갔다.
눈썹이 조금 연하다 싶으면 더 진하게 해달라고 하면서.
그동안 나는 의상을 떠올리며 어떻게 해야 의상을 더 돋보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어울리는 포즈와 워킹, 표정을 구상했고
‘두 번째 의상은 시선을 조금 내리깔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서......’
메이크업이 끝나자 조금 시간이 남아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었을 찰나
“1차 리허설 들어갈게요!”
1차 리허설을 한다는 스탭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리허설은 시간이 부족하면 1차, 그게 아니면 2차부터 3차까지 이루어지지만 이번에는 2차까지만 한다고 들었고
백스테이지로 가자 메이크업만 받은 모델들이 순서에 맞춰 줄 서 있었다.
1차 리허설은 헤어와 의상을 피팅 하지 않고 동선만 확인하는 리허설.
T자형 런웨이는 동선이 길진 않았지만 다른 모델들과 합을 맞춰야 하는 구간들이 몇 있었다. 신인인 모델들이 많으니 아마 앞뒤 사람 간의 간격과 각도가 중요할 터,
“리허설 시작합니다!”
그 외침과 동시에 1차 리허설이 시작됐다.
한 명씩 무대로 나가는 모델들을 보면서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나는 긴장이 아닌 고양감이 일었다.
‘내가 여기에 있어.’
그 하나의 생각만이 모든 감각을 지배했다.
다시는 못 설 것만 같았던 런웨이를, 백스테이지에서 올라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수많은 콜라보와 런칭쇼, 모터쇼, 패션쇼를 서봤지만 지금 이 떨리는 마음만큼은 오로지 무대에 선다는 그 기대감 하나.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지금 나가시면 돼요.”
스탭의 사인에 맞춰 걸음을 내딛자 조명으로 환한 무대가 내 발밑에 놓였다.
환한 조명이 시야를 밝히고,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한 정신.
각인되어 있는 워킹과 표정, 포즈가 수차례 예행연습을 거친 것 마냥 자연스럽게 몸에 스며들었다.
디자이너의 니즈에 맞춘 당당한 워킹.
그렇게 순서에 맞춰 몇 번 더 무대 위에 올라가고 나서야 1차 리허설이 막을 내렸다.
이어서 2차 리허설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모델들은 준비를 하기 위해 전부 흩어졌고, 나도 메이크업을 받았던 것처럼 헬퍼의 도움을 받으면서 서둘러 헤어 스타일링을 마친 뒤 첫 번째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이거 허리 한 번 잡아서 핏 수정할게요.”
“네.”
운동과 식단 조절을 병행해서 그런가 허리가 조금 남네.
그걸 본 헬퍼는 체형에 맞게 핏을 조정해줬고, 거울을 보자 누가 봐도 ‘모델’이라고 할 만한 모습이 비쳤다.
“준비 다 했어요?”
“네 끝났어요.”
시간 여유가 없었던 1차 리허설과는 달리 2차 리허설이 시작하지 않아 준비가 이미 끝난 같이 온 다른 모델 두 명이 내게 다가왔다.
‘그래도 메이크업하고 옷 입혀놓으니까 확실히 모델이네.’
은연중에 별생각이 없었던 둘이 메이크업과 옷을 입을 걸 보니 모델이라는 게 확 느껴졌다. 역시 사람은 꾸미고 볼 일이야.
‘근데 2차 리허설은 언제 시작하지?’
지금쯤이면 준비하라는 말이 들려올 법한데도 말이 들려오지 않자 의문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봤다.
‘전부 준비 끝난 상태인데...... 아.’
주위를 둘러보자 준비가 끝난 모델들이 보였지만 한구석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으로 다가가고 있는, 이한나 디자이너?
언뜻 본 표정이 야차 같은 얼굴이었다. 다른 모델들도 그쪽을 힐끔거리면서 바라보고 있었지만 내가 있는 곳은 너무 멀어서 무슨 대화를 하는지 들리지 않았고,
“저 잠시만요.”
“응? 응.”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고 있던 둘을 두고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자리를 옮기자 소란이 일은 곳과 가까워졌고
“그래서 아예 안 들어간다고요? 하 진짜 씹.”
“네...... 이 의상은 아예 안 될 거 같아요......”
헬퍼와 이한나 디자이너의 대화가 들렸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는 아직 의상을 갈아입지 않은 모델이 서 있었고 이거 아무래도,
“이 쇼가 끝나는 즉시 그쪽 에이전시로 연락할게요. 내 쇼를 망치고 싶다면 말로 하지 그랬냐고.”
이한나 디자이너가 원했던 슬렌더 모델이 아닌, 살이 찐 모델이 이 문제의 원인인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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