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49화 (49/137)

〈 49화 〉 chapter 48. 이 무대는 내 무대다.

* * *

주변에서도 저쪽을 힐끔거리면서 쳐다보기에 바빴다. 패션쇼의 주인인 이한나 디자이너가 저기에 있는데 당연히 시선이 갈만하지.

그런 이한나 디자이너의 앞에는 고개를 푹 숙인 남자 모델이 있었다.

눈대중으로 살짝만 훑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봐도 살쪘네.’

부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살이 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반인들이 본다면 저게 뭐가 살찐 거냐고 반박하겠지만 적어도 모델 기준에서는 저게 살찐 게 맞았다.

특히나 슬렌더 모델을 원하는 이한나 디자이너의 옷은 핏 자체가 타이트하고, 당장 헬퍼가 들고 있는 바지도 가죽바지인 걸 보아하니 안 들어갈 만도 했다.

“하 시발...... 얘 의상 리스트 가져와 봐요.”

“네!”

헬퍼가 허겁지겁 들고 있었던 종이 중에서 몇 개를 꺼내 이한나 디자이너에게 건넸다.

그리고 옆에 있던 행거에서 옷 몇 개를 앞으로 당겼다. 아마 의상 리스트에 있는 옷이겠지.

이한나 디자이너는 입술을 물어뜯으면서 의상 리스트를 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작게 한숨 쉬었다.

‘아무리 주목받는 신인 디자이너라고 해도, 신인은 신인이지.’

이 쇼 하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원되고, 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지. 고작 단 하루 쇼에 서는 모델은 모를 거다.

그나마 시간이 남아서 망정.

처음이라 꼼꼼하게 하려고 했던 건지는 몰라도 아직 쇼 시작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든 수습해야겠지.

‘상황 봐서 도와줘야겠네.’

해결한다면야 상관없겠지만 이번 기회로 도움을 주면 아마 제대로 그녀의 눈에 들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이 바닥에서 디자이너와 모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 훗날 나에게 도움이 되겠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이한나 디자이너는 이런 돌발 상황을 겪게 될 줄은 몰랐는지 찡그린 표정이 펴질 기미가 안 보였다.

‘이번 패션쇼는 디자이너도 신인, 모델도 신인.’

그녀가 과연 어떤 대처를 하는지 지켜보기 위해 이한나 디자이너를 주시했다.

“영훈 씨 좀 불러줘요.”

“넵!”

가시방석에 앉아있던 헬퍼가 쏜살같이 튀어나가더니 곧이어 다른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그러자 내내 찌푸리고 있었던 인상을 펴고 이한나 디자이너가 입을 열었다.

“모델 하나가 완전히 펑크 나게 돼서, 혹시 영훈 씨가 의상 두 개 추가로 맡아줄 수 있을까요? 돈은 따로 더 드릴게요. 사이즈가 영훈 씨한테 딱 맞더라고요.”

‘메인 모델이네.’

사이즈를 외우고 있을 법한 사람, 이런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만한 사람.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영훈이라는 남자는 키도 꽤도 컸고 몸도 말랐다. 당연한 거지만 슬렌더 모델에 적합했고, 음 나랑 사이즈가 비슷해 보이네.

이어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할 수야 있는데. 저한테 의상 두 개가 추가되면, 의상 개수가 너무 많지 않나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순서도 바꿔야 할 텐데......”

긍정의 말 뒤로 나오는 말들을 들으며 깨달음을 얻었는지 이한나 디자이너의 표정은 순식간에 다시 굳어졌다.

그의 말대로 메인 모델인 그에게 의상 두 개를 추가하게 되면 꽤나 많은 것들이 문제가 된다.

일단 원래도 다른 이들보다 한두 벌 많았던 의상에서 두 개의 의상이 더 추가된다는 것.

순서 조정이 불가피한 상황 속에서, 이미 그의 의상이 중심인 순서를 바꾸는 건 전체적인 밸런스에 무리가 간다는 것.

‘이 쇼가 큰 쇼라면 모를까 작아서 안 돼.’

여러 디자이너가 함께 주최하는 거면 몰라도 이번 쇼는 모델의 수도 많지 않았다.

자신이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아는지 영훈이라는 모델은 가만히 서 있었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이한나 디자이너는 돌처럼 굳은 상태였다.

‘아마 저걸 그냥 통째로 빼야 되나 생각하고 있겠지.’

경험이 많은 디자이너였더라면 아마 이런 상황을 헤쳐나갈 역량이 있었겠지만

‘이제 슬슬 나서야겠네.’

이한나 디자이너도, 나도 신인이었다. 같은 신인끼리 돕고 살아야지 안 그래?

“안녕하세요.”

“...... 어?”

“문제가 있는 거 같아서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거 같은데”

“......”

“도와드릴까요?”

불쑥 가서 말을 거니 옆에서 이건 또 뭐야, 라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정작 얼굴을 마주한 이한나 디자이너는 벙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 기억하려나?’

고작해야 오디션에서 한 번 본 것뿐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지금 이 제안이 조금이라도 더 좋게 받아들여지길 바라면서, 미소 지었다.

“...... 네. 도와주세요.”

그러자 이한나 디자이너가 나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고

“의상 두 개, 이우연 씨가 맡아주세요. 이 쇼 절대로 망치면 안 되니까.”

뭐에 홀린 거처럼 대답하는 이한나 디자이너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나왔다. 동시에 확신이 깃든 걸 보아하니

‘나를 기억하나?’

그렇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서게 될 쇼 두 번 더 올라가는 거야 나야 환영이니.

****

“여기서 뵐 줄 몰랐네요 유 팀장님.”

“하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저야 잘 지냈죠. 이번 쇼에는 어떻게 오게 되셨어요?”

“다름이 아니라 저희 신인 모델 애들이 처음으로 서는 쇼여서요. 그래서 한 번 살펴볼 겸 해서 와봤습니다.”

그 말에 눈썹이 잠깐 꿈틀거린 이은석 디자이너가 말했다.

“오. 데마시아에서 꽤 괜찮은 신인을 발굴해냈나 보네요. 유 팀장님이 오실 정도라니.”

“알아보실 거예요. 꽤 괜찮은 녀석이 한 명 들어왔습니다.”

“잘 봐야겠네요. 그럼 저는 이만 먼저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목례를 한 이은석 디자이너가 곧바로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실장은 캐스팅 팀장 옆에서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고, 대화가 끝나자 둘은 지정된 자리로 가서 착석했다.

데마시아의 간판 모델인 강원우가 이은석 디자이너의 쇼에 한 번 섰었던 탓에 실장도 그에 대해서는 빠삭한 편이었다.

“확실히 그냥 신인 디자이너 패션쇼라고 하기에는 좀 크네요.”

“이은석 때문이야. 국내에서는 그래도 알아주는 디자이너니까 어떻게든 눈에 비추겠다는 거지.”

“후우, 그래도 잘된 일이죠 뭐. 우연이가 눈도장 찍힐 사람이 많다는 거니까.”

“흐음,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당연하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실장을 보면서 캐스팅 팀장은 침을 삼켰다.

확실히 첫 만남 때의 강렬함은 잊을 수 없다. 실제로 그를 완벽한 모델이라고 생각했고, 계약을 맺을 때도 다이아몬드가 굴러들어왔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캐스팅 팀장은 너무 바빴다.

결과물을 볼 때마다 역시 내 눈이 아직 틀리지 않았구나 싶었지만 온전히 우연에게 신경을 쏟아부을 수 없기에 저절로 마음이 식을 수밖에 없었다.

캐스팅 팀장이라는 직책은 사실상 발로 뛰어야 하고 그만큼 해야 할 일들이 많았으니까.

그에 비해 그 시간 동안 실장은 우연과 붙어 있으면서 원래도 있었던 기대감이 더 부풀어 올랐는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새삼스레 우연을 처음 만나 그가 워킹 했었을 때를 회상한다.

‘네가 걸어 나오는 것만으로도 확신할 수 있었다.’

같이 간 다른 모델 둘은 별 볼 일 없는 무난한 모델. 그렇지만 이 쇼는 너무나도 우연에게 안성맞춤인 무대.

‘네가 성공하리란걸.’

이 쇼는 발판이다.

다른 디자이너에게 자신의 모델을 소개하는 건, 아마 이 쇼가 끝난 후일 거라고 캐스팅 팀장은 생각했다.

****

“메이크업 한 번만 수정할게요!”

“여기 이거 상자 뭐야?! 빨리 치워!”

“빨리 스탠바이 해주세요. 곧 쇼 시작합니다!”

백스테이지는 언제나 분주하고 정신이 없다.

무대 위에서의 화려함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이지만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 무대는 혼자만의 힘으로 설 수 없는 무대니까.

나는 의상 두 개를 더 입게 돼서 순서가 수정됐다.

쇼가 시작하면 긴박하게 옷을 갈아입고 무대에 올라야 할 것이며 그 옷들을 소화해내기 위해 그에 맞춰 모든 것들을 바꿔야겠지만

“기대된다.”

걱정은 없었다.

나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쇼는 시작됐고,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비트 소리에 맞춰서 모델들이 차례대로 나갔다.

순서를 바꾼 탓에 나는 당장 3번째로 나가야 했고

“지금 나가요.”

스탭의 사인과 함께 백스테이지를 벗어나는 순간은 짧았다.

어두운 장내와 빛나는 조명 그리고 하나의 길.

이 무대는 내 무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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