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chapter 53. 작은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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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델이 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애초에 쉬운 일이 뭐가 있겠느냐만.’
사람들은 키가 크면 모델이나 하라는 소리를 종종 하곤 했다.
모델이라는 직업이 키가 작거나 비율이 안 좋으면 입구에서부터 컷 당하기도 하지만 막상 입구를 통과하면 키는 별 상관없다.
모델은 철저한 이미지 사업.
키가 조금 작더라도, 크더라도 상관없다. 겉으로 보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평가 요소이고 스펙이며 그 사람의 이미지다.
피부톤, 자세, 골격, 걸음걸이도 그 사람의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한몫한다. 여기에 자기의 개성과 스타일을 곁들여야겠지.
전생에 나는 모델학과도, 번듯한 에이전시도 나오지 못해서 많은 고생을 겪었다.
뒤늦게 구축한 나만의 이미지는 모델로서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게 해준 경험이었다.
하여 이번 생에는 그때 얻지 못했었던 것들을 얻고자 노력했고, 지금의 내 모습도 그 과정의 결과다.
어려서부터 피부에 신경 써서 흉터 같은 건 일절 없었고, 그 외 키 같은 것도 있었지만 좋은 걸 해서 좋아질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니 안 좋은 걸 안 함으로써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한편으로는 그냥 모든 시간을 활동에 투자해서, 해외를 돌까 생각도 해봤지만.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일에 열중했던 다른 모델의 경험담이 생각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확실히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면 더 빨리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 몰라도
지나간 나의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으니까.
모델로서의 나를 위해 포기한 시간들을 나중에 후회할 바에는 조급해하지 말자는 생각을 가졌다.
이곳은 남자 모델에 대한 수요가 높고, 인기도 많은 곳이니 내가 설 자리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교복을 입고, 등교해서 수업을 듣고 공부하는 일상을 나는 꽤 만족했다.
노아 예고 패션모델학과.
정확히는 모델학과라는 스펙보다 그 안에서 만날 사람들에게 의미 부여를 했고 나의 학창 시절을 채워 나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팔 각도 신경 쓰랬지? 45도 15도. 어깨 흔들지 말고 다시”
이 수업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적을 받은 남자애는 다시 줄 맨 뒤로 가서 섰고, 통과한 애들에게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선생의 기준에 적합하지 않은 워킹을 하면 다시 반복되는 워킹.
‘하필이면 담임 수업이어서.’
담임은 반에 속한 해당 학생에 대한 개인 정보를 알고 있다. 간단한 성격부터 시작해서 모델 경력까지 알고 있기에
“어렸을 때부터 키즈 모델 했었다고 들었는데 워킹 실력이 늘지를 않네. 런웨이 설 생각 있으면 연습 열심히 해야겠다 다인아.”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다인이라는 여자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줄 맨 뒤로 가서 섰다.
‘말을 참 기분 나쁘게 하네.’
다그치는 게 아니라 마치 타이르듯이 부드럽게 말하는 게 더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통과하는 애들이 많아지고 통과하지 못한 애들만 남게 되었고
“우연아.”
“네.”
“잠깐만 거기 서봐.”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와. 상상도 못한 전개.’
묵묵히 워킹을 하고 난 후 통과 소리가 안 나오면 다시 줄에 가서 섰다.
어차피 돌아가는 인원이 있어서 내가 혼자 워킹 연습하는 것보다 안 힘들었다. 통과한 애들을 비롯해 줄에 서 있는 애들까지 워킹을 할 때면 쳐다보고는 했지만.
‘아무렴 어때.’
쇼에 서면 이거보다 더 많은 눈총을 받는다.
“얼마 전에 이한나 디자이너 패션쇼에 섰다고 들었는데.”
“네.”
“다른 애들이면 모를까 우연이는 직접 런웨이에 서봤는데 이런 워킹 수업쯤이야 금방 통과해야 맞는 거 아닐까?”
살살 달래듯이 말하는 말투가 짜증 났다.
‘자기가 가르치고 있는 게 맞는 건지도 잘 모르면서.’
변변치 않은 활동 경력으로 왜 모델학과 선생님이라는 자리에 앉게 되었는지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전 세계를 통틀어서 ‘워킹을 가르친다’라는 개념을 가진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당장 외국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봐도 워킹은 스타일이고 개성이며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 텐데. 한국은 이상하게 워킹을 가르치면서 중요시 여긴다.
찍어내는 워킹을 만들고 싶어 하는 건가.
테크닉 워킹이라는 과목 자체를 봤었을 때부터 알아차렸어야 했다.
“일단 기초가 받쳐줘야 다른 걸 할 수 있어.”
나는 내 워킹에 나름대로 자부심이 있었다.
‘지금 내가 이러고 있는 이유?’
내 워킹 스타일은 어깨와 팔을 최대한 상체에 고정시키고 걷는다. 팔의 각도가 컨셉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수는 있어도 그가 원하는 45도, 15도라는 각도와는 맞지 않았다.
눈 딱 감고 어떻게든 해보라면 해볼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하다가도 본래 스타일이 나오고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다 보니까.
‘자퇴 마렵네.’
현타가 왔다. 어쩌면 테크닉 워킹이라는 과목 자체가 내게 지뢰였는지도.
“이대로면 좋은 성적 얻기에는 힘들 거 같다. 유의해서 연습하렴.”
“......”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돌려서 줄 맨 뒤로 가 섰다.
‘못 바꿔.’
저 발상을 바꾸기에는 이미 다른 모델학과, 아카데미, 학원에서도 워킹을 가르치고 있었다.
용기 내서 내 생각을 전한다고 해도 저 선생이 바뀔 건 없었다.
워킹을 가르치는 선생, 배움을 받는 학생.
“여러분이 배우는 워킹은 정말 기초예요. 실제로 많은 모델들이 쓰고 배우는 워킹이고......”
이 관계에서 내가 말을 꺼내봤자 오히려 찍히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이미 찍힌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말을 안 했으니 덜 찍혔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호기롭게 수석을 노렸는데 이래서야 이 한 과목 때문이라도 수석은 물 건너간 것 같다.
“언제 끝나냐......”
작게 중얼거리자 앞에 서 있던 애가 들었는지 몸을 움찔거렸다.
아마 이 친구도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고작 수업 하나에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었지만 듣기 싫은 건 싫은 거지.
저번에 서아가 무용 선생님에 대해 열성적으로 토로했던 게 떠올랐다.
‘나도 말해줘야지.’
그렇게 수업이 끝나고 나는 점심시간에 워킹 선생이자 이하 담임 선생의 뒷담을 서아와 함께 깠다.
학교 다니기 힘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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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같았으면 자고 있었을 시간인데, 일찍 일어나니까 힘들지?”
“아뇨 진짜 좋아요.”
운전하면서 건네진 말에 나는 곧바로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그것도 그럴게
‘일부러 테크닉 워킹 수업 들은 날 뺐거든요.’
덕분에 듣기 싫은 수업을 합법적으로 안 들어서 좋다는 말을 삼켰다. 원래 같았으면 또 수업 시간에 회의감에 차 있었을 거다.
기분 좋네.
“그래도 이렇게 일이 많이 들어오는 건 좋은 일이야. 안 들어오는 것보다는 낫잖아?”
“알죠.”
진짜 좋다는 나의 말을 믿지 않는가 보군.
‘그래도 일리 있는 말이야.’
전생에 프리랜서 모델로 활동하면서 일이 들어오지 않아 발로 뛰었던 걸 생각하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일이 들어오는 지금이 훨씬 더 나았다.
“오늘 룩북 몇 컷 찍는다고 했죠?”
“열 컷 정도 실리는 거 같더라,”
“촬영 빡세겠네요.”
“화이팅.”
어쩐지 아침부터 촬영한다 싶었더라니, 옷을 계속해서 갈아입으면서 촬영할 내 미래가 보였다.
이번에 가는 촬영은 브랜드 룩북 촬영. 갈수록 촬영의 종류가 다양해지는 건 내 의견이 반영돼서 그랬다.
모델로 정식 데뷔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사실 외국에 나갈 때 한국에서의 모델 경력은 그렇게 크게 인정받지 않는다.
대신 포트폴리오로 쓰일 모델북에는 도움이 되겠지.
그래서 들어오는 걸 족족하는 게 아니라 되도록 컨셉이 괜찮거나 디자이너를 보고 일을 받아들였다.
‘뭐 좀 유명하다 싶으면 바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최근에 학교에서 내가 뭐하고 있지, 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해외로 나가 더 다양한 경험을 하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어디까지나 한국은 발판.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해외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하고 싶은 건 아니니까.
‘냉정하게 생각하자. ’
“누나.”
“응?”
“저 사춘기 오려나 봐요.”
“사춘기? 갑자기?”
예진이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요즘 들어 자꾸만 기분이 다운되는 게 잡생각이 많아졌다. 다른데 신경을 쏟으면 금방 사라지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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