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chapter 55. 좋아해버렸다.
* * *
“여기 완전 맛있다. 맛집 제대로 찾았네.”
“많이 먹어.”
“안 돼. 많이 먹으면 살쪄.”
단호하게 말하면서 포크로 스파게티 면을 돌리고 있는 우연의 모습에 웃음이 절로 나왔다.
‘뜬금없이 귀여울 때가 있단 말이지.’
평소에는 여자처럼 털털한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간혹 이렇게 종종 우연이 남자라는 걸 체감할 때가 있었다.
아까 영화 보고 펑펑 울 때도 새삼스럽게 뭔가 느껴지기도 했고.
“근데 너 수석은 어떻게 했냐? 그 무용 쌤이 점수 잘 줬음?”
“지적이란 지적은 다 해놓고 막상 점수는 잘 주는 편이더라.”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네가 제일 잘 추는데 너 아니면 누가 수석 해.”
우연은 피자를 입에 와앙, 넣고서는 우물거렸다.
먹는 양을 보면 왜 말랐는지 이해가 가는데, 참 맛있게 먹는다니까.
‘제일 잘 춘다라......’
우연은 가볍게 말한 거겠지만 그 말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수행평가를 했었을 당시에는 오히려 우연을 질투했었던 자신인데.
수석을 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실수하면 안 된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 두 가지에 사로잡혀 제대로 된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우연을 만나기 전까지는.’
사실 어쩌다가 우리가 지금 이렇게 밖에서 만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친해져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이렇다 할 친구가 없었는데 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생기다니 참으로 웃긴 일 아닌가.
여느 또래 애들과 같이 점심을 먹고 웃고 떠드는 일상이 숨구멍을 트이게 해줬다.
조금씩 마음의 안정이 차츰차츰 생겨 나갔으며 덕분에 근 몇 개월간 많은 것들이 변했다. 거기에는 나 자신이 제일 크겠지만.
“...... 그러는 너야말로 이미 모델이면서 네가 수석 안 하면 누가 하냐?”
“누가 하더라. 아오, 진짜 걔가 나 점수 깎을 거 알고는 있었는데 그거 아니면 수석이었다.”
“그래도 일하면서 차석이면 잘한 거지.”
“나는 1등 하고 싶었다고 1등.”
투덜거리면서도 진지하게 화내거나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 게 그저 불만을 토로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이우연 답네.
‘테크닉 워킹이라고 했었나.’
과목 담당 선생이 담임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담임을 볼 때마다 겉으로는 티 안 내면서 속으로는 열심히 씹고 있을 우연이 상상됐다.
생긴 거와는 참 다르게 그는 특이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배가 부른지 우연은 포크를 내려놓고 음료수만 마시고 있었고, 원체 둘 다 음식을 많이 먹지 않다 보니 꽤 남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갈까?”
“어.”
“어디 갈래?”
“으음...... 딱히 생각 안 해봤는데.”
잠깐 뜸을 들이다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하는 모습에 그럴 줄 알았던 내가 입을 열었다.
“노래방, 카페, 만화 카페, 룸카페, 오락실, 피시방......”
“만화 카페 가자.”
“그래.”
예상외로 명쾌하게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다.
그렇게 다음 행선지를 정하고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우연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동안 계산을 해둘 심산으로 카운터에 다가가자
“결제 이미 되어 있으신데요?”
“네? 그럴 리가요.”
“4번 테이블...... 아까 남자분이 계산하셨어요.”
계산서만 뺏기고 계산은 하지 못했다.
‘뭐야 언제 계산한 거지?’
눈을 깜빡였지만 그런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간 용돈을 쓸데가 없어서 고이 모아둔 덕에 꽤 쌓인 돈을 오늘 좀 쓰려고 했는데.
계산을 해놓고 정작 자신에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우연이 괘씸했다.
“언제 계산했어?”
“아까 화장실 가면서 했는데?”
“...... 내가 먹은 건 돈 보내줄게.”
“됐어. 네가 아까 말한 것처럼 나 일한다니까? 이따 만화 카페 이용시간이나 내주든지.”
그렇게 말하곤 성큼성큼 걸어서 가게 문을 열고 나가는 우연에 그 뒤를 쫓았다. 그러자 직원의 안녕히 가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고.
‘내가 내도 되는데......’
가게를 빠져나오자 괜히 머쓱해졌다. 애초에 먹자고 데려온 것도 나고, 메뉴를 다양하게 시켜서 가격도 적잖게 나왔을 거다.
만화 카페에서 음료라도 사줘야지.
걷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만화 카페 앞에 도착했다. 검색해본 결과 여기가 제일 크고 시설도 괜찮았다.
“아까 본 멸살의 날 만화책도 있겠지?”
“...... 설마 그거 때문에 여기 오자고 한 거야?”
“당연하지.”
만화 카페 안으로 들어가며 장난스럽게 씩 웃는 얼굴에 나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어쩐지 빨리 정하더라니.’
두 시간씩 결제한 뒤 안으로 들어서자 토요일이라서 사람이 꽤 많았다. 그리고 그 말은
‘좀 많이 쳐다보네.’
쳐다보는 사람도 많다는 거지.
모두가 그런 건 아니지만 만화책을 고르고 있던 여자 둘이 이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게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연을 쳐다보는 거겠지.
“우리 어디서 읽어?”
“...... 저기 굴방으로 들어가자.”
“굴방? 아 저기? 좋아.”
작게 속삭이듯이 말하는 우연에 일부러 작게 말하며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이쪽을 쳐다보고 있던 둘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자리를 정했으니 이제 만화책을 고르는 일만 남았다.
아까 본 영화 만화책을 볼까 싶었는데 그건 우연이 본다고 하니까.
‘웹툰이나 봐야지.’
잠시 웹툰 만화책 코너로 걸음을 옮긴 나는 목록을 훑다가 몇 년 전에 보다가 말았던 웹툰을 발견해 두 권을 빠르게 뽑았다.
그리고 우연이 있는 멸살의 날 만화책 코너로 가자
“뭐야 왜 그래.”
“1권이 없어......”
“그럼 2권부터 봐.”
“2권도 없어......”
시무룩한 얼굴로 우두커니 서서 책장을 기웃거리는 우연을 볼 수 있었다.
슬쩍 멸살의 날 만화책이 있는 칸을 보니 텅텅 비어 있는 게, 가장 초반 걸로 가져간다고 해도 9권부터였다.
“너는 뭐 골랐어.”
“나? 예전에 보다만 웹툰.”
“나도 그냥 아무거나 추천해줘.”
딱히 추천해질 것도 없는데.
머리를 긁적이고는 우연을 데리고 다시 웹툰 코너로 향했다. 한번 골라보라고 하자 몇 개를 꺼내보더니 이내 2개의 만화책의 1권을 골랐고
우리는 드디어 굴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보니까 꽤 재밌네.’
몇 년 전에 봤었던 웹툰이어서 그런지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 시작했다.
가져왔던 한 권을 다 읽고 두 번째 권을 읽으려고 책을 내려놓는데
“...... 자냐.”
엎드려서 만화를 보고 있는 줄 알았던 우연이 자고 있는 걸 보고 헛웃음이 나왔다.
‘잘 자네.’
얼굴이 작고 피부가 뽀얘서 그런가 새근새근 숨 쉬는 게 아기 같았다. 아까 울기도 했으니까 뭐.
그렇게 만화책을 읽는 것도 까먹고 우연의 얼굴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그러던 도중 팔이 부르르 떨리는 한기에 정신을 차렸고.
“좀 춥네.”
에어컨을 빵빵하게 트는지 반팔을 입어서 추웠다. 그러고 보니 얘도 추위를 잘 타서 항상 교실에 담요를 두고 다닌다고 했는데.
‘담요가 어딨었더라.’
아까 스치듯 봤었던 기억을 떠올려 조용히 굴방을 빠져나와 담요 두 개를 가져왔다.
한 개는 우연에게 덮어주고, 만화책을 들어 다시 보기 시작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아까보다 재미가 없었고
우연이 깨나, 안 깨나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만화책을 봤다. 집중력 제로.
그렇게 두 시간이 넘고 세 시간을 살짝 넘어 우연이 깨어났다.
“뭐야. 지금 몇 시야.”
“9시 10분.”
“벌써? 그럼 나 얼마나 잔 거야. 그냥 깨우지.”
“너무 잘 자길래.”
“빨리 나가자. 너 통금 없어?”
“내가 통금이 있겠냐. 네가 있으면 모를까.”
“자취생의 특권은 통금에도 적용되지.”
비몽사몽 한 얼굴로 말하는 우연에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대로 굴방을 나와 추가 요금을 계산한 뒤 밖으로 나갔고,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해가 져 있었다.
‘이제 집 갈 시간이네.’
하루가 참 빠르게 흘러간 것 같았다.
서로 집 방향이 다르기에 우리는 갈림길에서 헤어지기로 했고,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지만 이 침묵도 이제는 익숙했다.
불편하지 않은침묵.
‘친구, 우리는 친구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오늘 논 건 친구여서이고, 그마저도 얼마 안 된 사이기는 하지만.
나는 오늘 약속을 잡고 빠르게 영화를 예매한 뒤 전날 옷장을 뒤져가면서 가장 괜찮은 옷을 골랐다.
그리고 오늘.
영화를 볼 때면 자꾸만 옆으로 신경이 쏠려서 괜스레 팝콘을 먹는 척 손이 닿아보기도 하고.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울고 있는 우연을 볼 때 들었던 감정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사람을 볼 때 얼굴은 잘 안 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닌가 보네.
오히려 얼빠라고 해도 할 말 없었다.
“잘 가. 조심히 들어가고 들어가면 연락해.”
깜깜한 밤을 배경으로 손으로 전화 모양을 하면서 흔드는 우연이 보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홀렸던 걸지도 모르지. 두 번째로 봤었을 때도 단번에 알아봤으니까.
그래서 그런가 낯도 덜 가리고 자꾸만 얘한테만 풀어지고.
‘얘는 나한테 아무 생각 없는데.’
그의 성격에 빠져들게 되고 의지하게 된다.
우리는 친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응, 오늘 재밌었다. 어두우니까 조심히 들어가 그리고”
아닌 척하면서 착각이라고 부정하고 있었던 것들을.
‘...... 좋아하나 봐’
오늘 확신해버렸다.
“그런 말은 원래 여자가 하는 거거든? 아무튼 잘 가.”
근데 절대 말 안 할거야.
그렇게 되면 친구로도 못 남을 테니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란 걸.
지하철 입구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멀어진 우연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나뿐인 친구를 좋아하게 되다니, 최악이네 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