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화 〉 chapter 58. 화장품 광고 영상 촬영
* * *
여름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그 개가 나였나 보다.
“야 너 오늘 못 간다고 해. 새벽까지 계속 열났잖아.”
“촬영 하나 미루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 보는데. 오늘 촬영은 그래도 짧으니까 괜찮아.”
“고집은. 너 이거 아빠한테 말하면 피해고 뭐고 집 못 나가는 거 알지?”
“알지. 그러니까 누나 쉿, 비밀로 해줘야 돼”
“맨날 이럴 때만 누나래.”
다윤이 투덜거리면서 데워온 죽을 내게 건네주었다.
입맛이 없었지만 그래도 일단 먹어야 기력이라도 좀 생길 테니 한 숟갈을 떠서 먹었다.
‘맛있네.’
그러자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죽. 편의점 죽이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금세 그릇이 비워졌고, 내가 먹고 있던 걸 지켜보고 있던 다윤이 밥그릇을 빼앗아갔다.
“병원 갈까.”
“어제 갔다 왔다니까.”
“약 먹었는데 왜 더 아픈 건데? 그 병원 말고 다른 병원 가자.”
“됐어.”
5분 정도 지나자 다윤이 건네주는 약을 먹었다.
바로 다음날이 촬영인데 기침을 계속해서 감기인 것 같아 바로 병원에 가서 약을 타왔는데, 그러면서 다윤에게 아무 생각 없이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하자
평일이지만 방학인 탓에 학교를 가지 않는 다윤이 집으로 쳐들어왔다.
처음에는 어차피 내일 촬영 나가야 하니까 가라고 했었지만, 오히려 다윤이 없었다면 아마 응급실이라도 갔었을 판이었다.
처방받은 약에는 해열제도 없어서, 다윤이 급하게 약을 사오고 죽을 사온 실정.
밤부터 슬슬 한기가 돌았던 몸은 새벽이 되자 본격적으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덕분에 다윤이 밤새 간호해줬고.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면서 알람을 맞췄다. 이제 한 세 시간 있으면 예진이 데리러 올 테니 그때까지 눈 좀 붙여야지.
“누나도 빨리 자.”
“어. 자라.”
“...... 나 알람 맞춰놨어.”
“꺼버리기 전에 자라.”
“응.”
진짜 꺼버릴 거 같아서 입을 꾹 다문 채 눈을 감았다.
죽겠는 거 아니면 촬영은 펑크 내는 게 아니다. 지금도 열이 나긴 하지만 그래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니까.
약 기운이 도는지 잠이 솔솔 오기 시작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져 있길 바라야지.
잠결에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나갔다 들어올 사람은 다윤밖에 없지 뭐.
띠링링띠링띠링
맞춰놨던 알람 소리가 울리자 못 일어날까 봐 여러 개 맞춰놓은 게 무색할 정도로 바로 깼다. 열은 내린 거 같네.
“미열이다.”
“아까보다 꽤 많이 괜찮아졌네.”
“하아...... 이거나 마셔라.”
다윤이 쌍화차 병을 건넸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쌍화차를 한 번, 다윤을 한 번 본 뒤 왜인지 모르게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걸 받았고
‘으 맛없어!’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마셨다. 원래 약은 쓴 법이랬어.
1/3 정도 남았을 때 내려놓으려고 했지만 다윤이 째려봐서 결국 다 마실 수밖에 없었다.
’아까보다 괜찮아졌으니까 뭐,‘
상대적으로 아까보다야 훨씬 나았기에 나는 주섬주섬 침대를 벗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씻고 나온 뒤 옷을 갈아입었고 얇은 긴팔과 슬랙스에 가디건을 따로 챙겼다. 담요는 차에 있으니까.
작은 핸드백에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과 다윤이 사온 해열제를 넣자 드디어 나갈 채비가 끝났다.
어째 좀 많이 느릿느릿했던 거 같지만.
“다녀올게.”
“아프지 말고.”
“이미 아픈데?”
“죽는다.”
주먹을 치켜세우면서 말하는 다윤에 기운은 없는데 웃음이 작게 새어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시간을 보니 약속 시간 1분 전. 원래 같았으면 10분 일찍 나왔겠지만 오늘은 늦장을 부려서 딱 맞춰 나왔다.
현관을 나서자 바로 보이는 검은색 차.
평소였더라면 조수석에 앉았겠지만 나는 뒤에 문을 열었다. 감기 옮으면 안 되니까.
드르륵
“어? 뒤에 타게?”
“네, 제가 감기에 걸려서요. 옮길까 봐”
“많이 아파?”
“몸살기 조금 있는 거 빼곤 괜찮아요.”
“많이 아프면 실장님한테 말할 테니까 병원 가도 되고.”
몸을 완전히 뒤로 돌린 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예진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며 병원도 이미 다녀왔고, 약도 처방받아왔다고 말했지만 예진의 상태가 그대로이자 결국 내가 먼저 출발하자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 몸 상태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이 정도면 쓰러질 일도 없고 그냥 컨디션이 아주, 아주, 나쁠 뿐이었다.
다행히 콧물은 안 나왔지만 잔기침이 가끔 나왔고, 제일 문제라면 열이겠지만 해열제 있으니까.
“그저께 보내준 콘티, 스킨리어 광고 촬영 맞죠? 몇 시간 걸리려나.”
“아마 빨리 끝나면 4시간 정도일 거야. 포토 촬영 두 개랑 영상 촬영 있는데...... 괜찮겠어?”
“약 먹어서 괜찮아요. 저 도착할 때까지만 좀 잘게요,”
“응. 도착하면 깨워줄게.”
그 말을 듣고 나는 잘 준비를 했다.
의자를 약간 뒤로 젖히고 담요 두 개를 덮은 뒤 목베개를 장착.
차 안은 조용했고, 나올 때 씻고 나왔는데도 잠기운이 아직 남아 있었던 것인지 몸을 뒤척여 편한 자세를 찾자마자 곧장 수마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던 도중, 어디선가 여자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 아! 일어나. 도착했어.”
“으응, 일어났, 어요.”
그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을 때 꿈을 빠져나와 잠에서 깰 수 있었다.
‘꿈이었나 보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고 덮고 있던 담요를 접었다. 잠에서 막 깬 상태여서 꿈이 잊혀지지 않아 기분이 싱숭생숭했지만.
꿈을 꿔서 그런지 잔 게 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단 관계자분한테는 내가 미리 잘 말해둘 테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알겠어요, 이제 내려요 우리.”
꿈속의 내가 울고 있던 게, 아주 서럽게 울고 있던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그걸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꿈까지 이러니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가 보지.
차에서 내리며 걸음을 옮기자 몸이 무거운 게 느껴졌다.
‘영상 촬영......’
잘해야 되는데.
걱정도 잠시, 촬영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스탬들에게 인사를 하며 메이크업을 받기 시작했다.
****
“우연 군 지금 표정 약간 부자연스러워, 조금만 더 스마일~ 오케이!”
아 입꼬리에 경련 일어날 거 같다.
“지금 표정 그대로 제품 바꿔서 한 번만 더 찍을게요.”
사진 작가가 카메라를 내리면서 말하자 옆에 있던 스탭이 후다닥 달려와서 내게 다른 색상의 립스틱을 건넸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네.’
A컷 건진 것 같으면 넘어갈 법도 한데 자꾸만 제품 색상을 바꿔서 촬영하느라 심적으로 지치는 것 같았다.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이런 느낌.
사진 작가마다 촬영하는 스타일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잘 나와도 계속 촬영하는 사진 작가를 만날 줄이야.
차라리 화보 촬영이면 무표정으로 있었을 텐데, 이번 촬영은 전부 밝게 웃으면서 하는 촬영이었다.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중간중간 힘이 빠져 표정 연기가 어색해질 때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지적이 들어와 억지로 쥐어 짜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포토 촬영 두 개가 끝났다.
“잠깐 쉬고 이따 촬영 들어갈게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촬영 도중 옷을 한 번 갈아입으면서 휘청거렸었지만 다행히 중심을 잡아 넘어지지는 않았다.
고개를 짧게 숙이며 인사를 한 뒤 나는 담요를 가져온 예진에게 담요를 받아 몸에 둘렀다.
여름이라고 옷이 반팔이라서 찬 에어컨 바람을 맞았더니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으슬으슬 춥기도 했고.
“너 열나는 거 같은데.”
“...... 이거 빨리 먹고 약 먹어야겠다.”
멍한 상태로 앉아 있는 내 이마에 손을 가볍게 올렸다가 뗀 예진이 말했다.
도시락을 먹기 위해 젓가락을 뜯고 몇 입 입에 넣었으나 입맛이 뚝 떨어졌고
‘아, 열나는 거 같네.’
아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열이 난다고 하니까 정말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원래도 미니 사이즈였던 도시락을 꾸역꾸역 몇 숟갈 먹은 뒤 남겼고, 과일을 조금 먹은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약을 삼켰다.
“밥 먹어요.”
“너 얼굴 지금 완전 창백해.”
“잠깐 쉬면 약효 돌겠죠 뭐.”
걱정이 담긴 예진의 말이 들려왔지만 나는 그대로 담요를 덮으며 눈을 감았다.
편한 장소가 아니어서 잠은 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분이라도 눈을 감고 있는 게 더 나을 거 같아서,
“이제 준비해주세요!”
“...... 네.”
스탭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리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담요를 두른 상태로 화장대 앞에 앉았고 그러자 아까 메이크업을 해줬던 여자가 와서 수정 화장을 해줬다.
갈아입은 옷은 흰색 얇은 쉬폰 블라우스 반팔과 무릎까지 오는 린넨 소재 반바지.
‘옷이 어째 더 시원해진 거 같네.’
몸이 뜨거운 걸 감안한 건지 옷차림은 시원했다.
“준비됐어요.”
“이제 촬영 장소로 이동 하실게요.”
담요를 전부 예진에게 맡기고 스탭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러자 나온 촬영 장소에는 영상을 촬영해야 해서 촬영 장비가 동원돼 번잡해 보였지만.
‘저건 또 뭐야.’
조명 아래 있는 세트 바닥에 물이 얇게 장판처럼 졸졸 깔려 있었다.
‘콘티에서 봤던 거랑은 다른데.’
지끈거리는 머리 오른쪽을 꾹꾹 누르면서 입을 열었다.
“누나. 오늘 영상 촬영 콘티 다시 줘봐요.”
“어...... 잠시만.”
촬영 콘티는 미리 받기도 했지만 원래 같았으면 오면서 들었어야 할 이야기다. 전날 아침에 읽어서 무슨 컨셉인지는 숙지하고 있었는데.
물이 있다는 건 처음 듣는 소리다.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었으나 대충 무슨 일인지 감이 잡혔다.
머릿속으로 이 상황을 파악하려고 팽팽 돌아갔고 답은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아..... 미안. 영상 촬영 콘티를 잘못 보낸 거 같아.”
“이번 촬영 콘티 줘봐요.”
그럴 줄 알았다.
‘이번 촬영 콘티를 잘못 줘서 잘못 알고 있었던 거겠지.’
말투가 저절로 날카롭게 나간 거 같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예진에게 건네받은 핸드폰에는 이번 영상 촬영 컨셉과 콘티가 적혀 있었고, 거기에는 저 장판 같은 물의 정체도 있었다.
‘제품은 토너, 발로 물장구를 치면서 촉촉함을 표현하고......’
끝까지 한 번 빠르게 눈대중으로 훑자 촬영 감독이 왔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핸드폰을 예진의 손에 쥐여준 뒤 촬영 감독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모델 이우연입니다.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나야말로 잘 부탁해요. 컨디션 안 좋다면서? 얼굴이 창백하네.”
그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고개를 숙이면서 두통이 순간적으로 심해졌다.
부디 이번 촬영이 무사히 빨리 마쳤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진심으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