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chapter 59. 컨디션 관리도 실력
* * *
“더 빨리 뛸게요! 표정, 표정! 더 활짝 웃으면서!”
“......”
진짜 어지럽다.
다른 촬영은 다 끝났고 이제 남은 건 대망의 전신 촬영, 물 장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촬영밖에 없었다.
촬영 후반부라 그런지 초반보다 상태가 더 악화된 건 물론이고, 중간중간 시야가 흐릿해지기도 했다. 두 발로 서 있는 건 맞는데 서 있는 게 아닌 거 같은 느낌.
카메라가 돌아가면 애써 지었던 미소와 표정 연기도 한계였다.
중간에 한 번 쉬긴 했지만 전신 촬영에 들어가면서 그 휴식 시간은 의미가 없었다.
물에 닿아 찰박찰박거리는 발은, 몸이 불덩이인 거에 반해 차가워 이질적이었고.
제자리에서 뛰면서 하는 표정 연기에 단 한 번의 촬영으로 체력이 훅하고 빠져나갔다.
촬영은 적어도 두세 번은 찍은 뒤 최상의 결과물을 고르거나, 그게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베스트를 뽑아야 하는데
‘베스트가 바로 나오겠냐고 지금.’
오히려 괜찮은 게 나올 때까지 촬영이 딜레이 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물 위에서 이어지는 두 번째 촬영만에 표정이 무너졌다.
몸이 무거워서 ‘발랄하게’라는 컨셉의 표정 연기는 온데간데 사라져 버렸으니까.
“잠깐 쉬었다 가야 할 거 같은데......”
다시 한번 지적을 받고 이어진 세 번째 촬영도 결국 아무것도 되지도 않은 채 끝나버렸다.
그 상태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내가 쭈그려 앉자 예진이 촬영 감독에게로 다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아. 헤이미시 촬영 때는 딜레이 한 번 안 됐다는데 지금은 뭐 건질 것도 없으니 쯧. 컨디션 관리도 실력이야!”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에잉. 잠깐만 쉬었다 가요!”
감독의 외침과 동시에 스탭 몇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괜찮냐는 말에 고개를 대충 끄덕였고, 그들의 부축으로 자리를 옮길 수 있었다.
물 위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느라 다리는 젖었고, 얼굴은 열 때문인지 땀에 젖은 것 같았다.
‘...... 최악이야.’
마른 세수를 했다. 컨디션 관리도 실력이라고 했던 촬영 감독의 말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주변에서는 괜찮냐는 말들이 속속들이 들려왔지만 그건 안중에도 없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니만큼 완벽해야 되는 게 맞는 거니까.
인기가 많으면 뭐하고 모델이면 뭐해. 컨디션 때문에 촬영 하나도 말아먹게 생겼는데.
자책을 하다가도 지금 이 상황이 변하는 건 아니기에, 나는 입을 열었다.
“저 물 좀 주세요.”
“여기.”
색색 몰아쉬고 있던 숨에 시원한 물을 단번에 들이부어 꿀꺽꿀꺽 삼켰다.
식도를 타고 몸에 시원함에 스며들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몸을 다시 지배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
이 기회 한 번이 나중에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고, 기회라는 건 왔을 때 잡는 거니까.
활동 하나하나가 나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5분 이따가 바로 촬영 들어가죠.”
“어...... 더 안 쉬시고요?”
“빨리 끝내고 싶어서요. 나아지는 것도 없고, 수정 화장만 하고 다시 찍죠.”
“알겠습니다! 그러면 감독님께 말씀 전해드릴게요.”
“고마워요.”
말 한마디 할 힘도 없었는데, 정신을 집중하니 그래도 솟아 나올 구멍은 있었나 보다.
스탭은 자리를 떴고, 메이크업 담당자가 와서 수정 화장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다시 선 조명 아래 세트장.
촬영 감독이 있는 곳을 쳐다보니 감독이 팔짱을 끼고 앉아있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좋지 않은 표정이겠지.
자기가 원하는 결과물이 안 나오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안 드는 결과물을 만든 게 나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차피 얼마 안 남았으니까.
“갈게요! 큐!”
그 말과 동시에 제자리를 통통 뛰기 시작하면서 활짝 미소 지었다.
지금 몸 상태고 뭐고, 머릿속에는 컨셉 하나로 꽉 차 있었다.
몸 상태는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아예 다른 생각을 하면서 그쪽에 집중하니 아까보다야 훨씬 나은 것 같았다.
“오케이 좋아요. 바로 다음갈게요. 물 앞으로 한 번만 차 봐요.”
촤악ㅡ
“거기서 조금만 더 힘줘서 차면 될 거 같네! 오케이 큐!”
촤아악ㅡ
‘아, 방금 넘어질 뻔했다.’
표정도 신경 쓰랴, 물 차는 것도 신경 쓰랴.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랬으면 다 젖었겠지. 아주 난리가 아니었을 거다.
그렇게 두 번 정도 물을 차고 한 바퀴 도는 촬영까지 마친 뒤 영상 촬영이 끝났다.
극후반 촬영이 순조롭게 흘러가서인지 가까워진 촬영 감독의 얼굴은 밝은 표정이었다. 다행이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거봐 하면 또 잘하잖아. 오늘 촬영 수고했고 들어가서 쉬어요!”
“네, 감독님도 수고하셨어요.”
촬영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주변 스탭들을 더불어 감독님에게 인사하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우연아 옷 갈아입고 오면 바로 출발하자.”
“응...... 근데 나 화장도 지우고 싶은데.”
“클렌징 워터 있을 거야. 준비해놓을게.”
예진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탈의실 안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자 메이크업 담당자와 같이 있었던 예진이 내게 다가와 클렌징 티슈와 솜을 건넸다.
“너무 세게 닦는 거 아냐?”
“괜찮아. 지우니까 훨씬 낫네.”
“기다려봐 눈 밑에 반짝이 아직 남아있다.”
제대로 된 클렌징은 아니었지만, 면봉으로 눈 밑에 남은 반짝이까지 지우고 나서야 화장이 지워졌다.
답답했던 얼굴이 시원해지고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눈에서 자꾸만 느껴졌던 이물감이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주섬주섬 가디건에 팔을 꿰어 입었다.
“이제 가자.”
“...... 응.”
가자는 말에 예진의 등을 보고 따라 걸었지만
‘내가 지금 어떻게 걷고 있는 거지.’
지금 잘 가고 있는 건지도 확신이 없었다.
아까 촬영 때는 가끔 시야가 흐릿해졌다면, 지금은 아예 눈꺼풀 자체가 무겁고 시야가 흐렸으니까.
그렇게 촬영장을 완전히 벗어나는 동안 스탭들에게 인사고 뭐고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음을 옮겼다.
“괜찮아? 우연아 차 뒤에 탈래?”
걸음을 멈추자 마치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귀가 윙윙 울렸다.
흐릿했던 시야가 눈 한 번 깜빡이려는데 닫힌 채로 떠지지 않았고,
털썩
“우연아? 우연아?! 정신 차려!!”
어렴풋이 둘려오는 외침이 기억의 마지막이었다.
****
어라, 내가 자고 있었나.
희미하게 돌아온 의식이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해졌다.
그런데 몸은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누워있는데 손등에도 뭐가 꽂혀 있는 것 같았고.
“아.”
그렇게 눈을 떠보니 하얀 낯선 천장이 보였다.
‘병원이네.’
선명하지 않던 시야가 두 번 정도 눈을 깜빡이자 제대로 보였다. 그 상태로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 야. 너 죽을래?”
“안녕.”
옆에 앉아 무표정으로 핸드폰을 하고 있던 다윤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곧바로 야차같이 변하는 얼굴에 나는 슬쩍 다른 곳을 응시했고, 나름 구세주로 예진을 찾았건만 그녀는 병실 안에 없었다.
2인실인 거 같은데 다른 사람도 없었고,
“너 독감이래.”
“어. 어? 독감?”
그래서 그렇게 아팠던 건가.
사실 촬영 끝에는 거의 정신력으로 버틴 거나 다름없었다. 차에 가까워지면서 긴장이 풀리고 정신줄도 같이 놔버려서 쓰러졌고.
단순 감기로 치부했던 게 독감이라고 하니 어쩐지 몸 상태가 쓰레기였던 게 설명됐다.
손에 연결되어 있는 링거는 수액을 맞는 거란다.
“매니저 누나는?”
“내가 있는데 뭐하러. 그냥 가라고 했지.”
“그래?”
“야. 내가 너 쓰러져서 병원에 있다는 소리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냐? 그러게 촬영 취소하라고......”
시작됐다. 잔소리.
하지만 솔직히 그때는 할 수 있을 거 같긴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더 악화된 것도 문제였지만 예진이 콘티를 잘못 줘서 촬영 난이도가 높아진 것도 한몫했다.
애초에 지금까지 아팠을 때는 항상 약만 먹고 푹 쉬어서 이렇게까지 아플 줄은 상상도 못했고.
‘역시 사람들이 아프면 괜히 쉬라는 게 아니야.’
목이 부었지만 그래도 전보다 나아진 게 두통이 가셨고, 흐릿했던 시야가 이제는 선명했다.
“참고로 아빠한테 이미 연락 갔다. 수고해라. 내일 오신대.”
“...... 나 내일 퇴원 안 해?”
“하지. 근데 그전에 오시지 않을까. 당장 오겠다는 것도 내가 겨우 말렸는데.”
그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미래의 나에게 애도를 표했다.
아무래도 내일 내 귀는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 컨디션 관리는 기본인데.’
그 기본을 지키지 못해서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실정이었다.
개인적으로 오늘 촬영의 결과물이 어떻게 나올진 모르겠지만 최악의 컨디션으로 임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자기 관리 또한 실력.
몸무게가 모델한테 중요한 것처럼, 전생에도 몇 번 다이어트로 쓰러져 보고,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 관리가 중요하단 건 알았다.
컨디션도 그중 하나. 앞으로는 철저히 관리해야겠지.
그러자 ‘학교’가 떠올랐다.
지금은 방학이라지만 앞으로도 다시 학교를 다니면 모델 일을 병행해야 하니까.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전부 학교에 쏟아붓는 시간이었다. 촬영 일자는 저녁에 하거나 주말에 하는 등으로 조정하곤 했지만 사실 그것도 신인일 때나 가능한 거고.
‘내가 신인이기는 한가.’
여타 다른 신인들과 좀 다른 것 같았지만, 아무튼 학교생활은 몸 컨디션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여태까지는 녹초가 돼서 뻗어버리는 게 다였지만.
진지하게 생각하면
‘그만두는 게 나으려나.’
항상 그럴 때마다 나이와 학교를 핑계 대면 그건 꼬리표가 되어서 따라다닐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부여했던 학교라는 곳에 대한 가치, 그곳에서 배우는 것들을 떠올렸다.
모델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지 중,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학교를 그만두는 거겠지만.
아직 그 기로에 설 만큼 버겁지는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일곱의 나는 적어도 학교를 다녀도 되겠지.
결론이 나자 빠르게 생각 정리가 됐다.
“여기 병원 밥 맛있대.”
“그래?”
“안 먹어봐서 모르긴 한데, 그렇다더라.”
나도 모르게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다윤이 장난식으로 말을 걸었다.
‘일단 나는 환자니까, 회복에 집중해야지.’
그렇게 하루를 꼬박 먹고, 자고, 떠들고 시간을 보내자
“수고.”
“......”
다음날, 나는 정말 많은 사람들로부터 걱정의 안부 인사와 당부들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그중에서 아버지가 원탑이시긴 했지만...... 제발 멈춰! 독감 바이러스는 어쩔 수 없잖아!
다시는 아프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영양제도 챙겨 먹어야지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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