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chapter 60. 시동
* * *
“하아...... 예진 씨. 그런 말 듣자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죄송합니다. 전부 제 불찰입니다.”
우연의 매니저를 그만두라고 하시면 그만두겠다는 예진의 말에 실장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 속 시계 초침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여전히 예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있었고, 만약 여기서 더 뭐라고 했다간 무릎까지 꿇을 기세였다.
그것도 그럴게 하루 동안의 일을 보고하면서 예진은 죄책감에 빠져 있었다.
“실수할 수도 있지. 근데 그 실수를 한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우연이 항상 콘티 확인해서 아마 자기가 무리라고 생각했으면 미뤘을 텐데.”
특히 이번에 하는 영상 촬영 같은 경우 처음으로 해보는 촬영이었다. 여태껏 했었던 사진들은 전부 화보 사진 촬영이었으니 영상 촬영은 또 다른 영역.
최근 간판 모델인 강원우에게 신경을 많이 쏟은 나머지 우연을 안 본지도 꽤 됐다.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싶었건만,
‘쓰러질 줄은 몰랐지. 독감이면 대체 어떻게 촬영한 거야?’
버티고 버텼을 우연을 생각하며 실장은 다시 또 한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실장의 머릿속에 이우연이이라는 모델은 고등학생이 아니라 하나의 모델이었으니까.
“우연이는 아까 괜찮다고 연락 왔어요. 이번 일이야 어찌저찌 수습했다지만 콘티 잘못 주는 건 정말,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자칫 잘못하면 촬영 자체를 망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비단 그건 우연이 아파서 뿐만이 아니라, 컨셉이나 촬영 기획을 아예 다르게 안 상태로 가버리면 모델에게 혼선이 생기니까.
촬영을 당일에 미루는 건 욕 좀 먹고 어떻게든 미루면 되는 일이지만, 현장에 도착해서 촬영을 미루는 건 또 다른 일이다.
일단 ‘왜’ 촬영을 한 번 더 하게 되었는지가 사람들에게 인식될 거고 그 이유가 좋지 못하면 소문이 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우연이랑 가족분들한테는 제가 연락 따로 보내놓을게요. 예진 씨는 따로 사과하시고. 자칫하면 촬영 망치는 길이니 다음부터는 꼭! 주의하세요.”
이미 반성하고 있는 듯해 보였지만 꼭 주의하란 말을 강조한 실장은 이만 나가보라고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예진은 그대로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그래도 진심으로 반성하는 거 같아서 다행이네.’
전에 한 연예인이 매니저와 스캔들이 터진 이후로 에이전시 데마시아 또한 남자 모델의 매니저를 여자로 뽑을 때마다 고심해서 뽑았다.
예진은 다른 소속사에서 나름 이름이 알려진 남자 아이돌 그룹 매니저를 했었던 경험도 있었고, 그래서 우연의 매니저가 될 수 있었다.
여차하면 바꾸면 됐지만 그래도 본인의 잘못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이번만 넘어가지 뭐.
실장은 핸드폰을 들어 직원에게 이번에 우연이 촬영한 브랜드에 촬영본을 먼저 받아볼 수 있겠냐고 연락하라 지시했다.
“후아...... 얘는 정말 뜰 수 있을 거 같은데 말이지.”
핸드폰을 내려두고, 그동안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우연에 대해 다시 떠올렸다.
여론 반응도 좋고, 인기도 있었지만 사실 모델 업계에서 입지는 부족한 편이었다. 이제 막 반년차 모델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했지만.
모델계는 신입이 진입하기에 굉장히 어려운 곳이기도 하고, 특히 한국 패션계는 작은 물인데도 그 안에서의 인맥이 중요했다.
단순히 SNS 팔로워가 많고 팬층이 두꺼운 것보다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서 패션의 선두주자가 되는 것.
뭔가, 아주 뭔가가.
지금 여기서 더 뜰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결과물을 볼 때면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게 되고, 실제로 다른 기성 모델들에 비해 부족한 점이 없다.
‘해외로 나가면 더 쉬울 거 같은데......’
빠르게 성공하는 길이긴 했지만 그 길은 험난했다. 우연의 나이도 걸리고 그렇게 되면 학교도 쉬거나 그만두어야 할 텐데
어린 나이에 잘못해서 데이기라도 하면 큰일 나니까.
실장은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1년 정도는 두고 봐도 된다.
똑똑ㅡ
“저 실장님!”
“어 왜?”
“그 캐스팅 팀장님이 전화받으시라고......”
“아.”
전화가 왔었나.
핸드폰 화면을 켜니 부재중이 2통 찍혀 있었다. 최근 강원우 일과 관련해서 캐스팅 팀장과는 연락을 꽤 자주 해서
‘이번에도 강원우 일이겠지 뭐.’
메모할 포스트잇과 펜을 찾으며 실장은 곧바로 캐스팅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팀장님, 죄송해요 잠깐 무슨 일이 있어서......”
“괜찮아! 그것보다......”
어쩐 일로 다음부터 빨리 받으라는 말을 안 하네.
왜인지 흥분한 듯한 캐스팅 팀장의 목소리가 수화 너머에서 들려왔다. 메모하려고 적기 위해 들었던 펜은
“우, 우연이요?”
그 대상이 우연이라는 사실을 듣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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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참으로 빠르게 흘러간다.
달력이 한 장, 두 장씩 넘어갔고 개학을 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일상도 적응해 나갔다. 아무 일 없이 무탈하게 말이다.
아직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활동에 지장이 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스케줄 관리나 몸 관리에 힘썼으니까.
무난하게 수업을 듣고, 놀고, 일상을 보내면서
몇 가지 달라진 점이 있다면 길거리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조금 생겼다는 것과 ‘패션쇼의 이해’ 교과서를 완독해버렸다는 것 정도였다.
예습을 한 덕분에 수업 시간에는 책을 뒤적여가면서 봤던 내용들 중 다시 보고 싶은 내용들을 봤다.
그 외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 알고 싶은 패션에 관한 지식들을 쌓아갔다.
“우리 과 1학년만 하는 게 없다는 게 말이 돼?”
“영상제작학과도 1학년 거는 안 틀어준다고 하잖아. 1년 뒤면 우리도 서겠지.”
“솔직히 같이 해도 문제없을 거 같긴 한데.”
아, 곧 있으면 예술제지.
교실이 시끄러워 잠에서 깨버렸다.
개학을 한 8월, 순식간에 지나간 9월.
이제 막 10월에 들어선 참이었으나 10월 말에는 노아예고 예술제가 예정되어 있었다. 비록 패션모델과 1학년은 아무것도 못하는 에술제지만.
‘서아가 요즘 바쁜 이유가 있었네.’
신경을 못 써서 그냥 바쁜가 보다, 생각하고 넘겼었건만 예술제를 준비하느라 바쁜가 보다.
그에 비해 패션모델과는 2학년이 패션쇼에 서고3학년이 사진전을 한다. 1학년은 딱히 하는 게 없었다.
패션쇼 스탭을 자원 받는다는 공고를 봤지만 관심 없었다. 쇼에 서는 것도 아니고 굳이 스탭을 할 필요는 없으니까.
저거 기획, 메이킹필름 촬영, 패션 필름 제작, 의상 협찬도 전부 2학년이 한다는데.
선생들이 도와주겠지만 고생도 그냥 고생이 아니었다.
“누구는 좋겠다. 예술제 같이 작은 패션쇼는 안 서도 다른 패션쇼 설 수 있자나!”
“야야. 듣겠어.”
“쿨쿨 잠만 자는뎅?”
아, 누군지 안 봐도 알겠다.
‘유성운이네.’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거리가 가까웠는지 안 들릴려야 안 들릴 수 없었다. 그 뒤로는 작게 말하는지 딱히 아무것도 들려오지는 않았지만.
‘쟤도 원래는 안 저랬던 거 같은데.’
방학을 기점으로 사람이 완전히 싹 바뀌었다.
처음에 입학하고 나서, 부담스러운 짝꿍으로 만나 좀 피하긴 했지만 그 뒤로는 그냥저냥 같은 반의 일원으로 지냈는데 그게 기분 나빴던 건지.
정작 내 앞에 서면 서글서글 웃으면서 무슨 심보인지 저렇게 뒤에서는 종종 들으라는 식으로 말하곤 했다.
‘이제 와서?’
하지만 저런 건 반응해주면 더 하니 차라리 무시하는 게 나았다. 악플 수준에 비하면 귀엽지 뭐.
“으으......”
엎드려 있던 몸을 곧게 피면서 목을 스트레칭해줬다. 아직 수업 시간이 안돼서 저마다 무리를 지어 떠들고 있었다.
모델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묘하게 반에서 겉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별 과제나 조를 짜면서 꽤 많은 아이들과 안면을 터서 왕따 같은 건 아니고. 이미 무리가 확정된 상태라 혼자 남게 된 거랄까.
‘오히려 좋아.’
누가 사귀고 헤어졌더라. 누구랑 누가 싸웠다더라. 누가 누구 뒷담을 깠다더라.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화했는데도 더 퇴보한 것만 같은 이런 일들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방관할 수 있어서 좋았다.
실제로 10월부터는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돼서 바쁘기도 하고 정신없으니까.
그간 런웨이에 설 기회가 잘 없다 보니 스케줄은 화보 촬영과 룩북 촬영만 물밀 듯이 밀려들어왔다.
고르고 골랐지만 광고를 포함해 잡혀 있는 스케줄은 평일에도 꽤 있어서 노아예고가 외부 활동을 장려하지 않았으면 큰일 났을 일.
노아예고의 예술제는 1학년이라서 못 서게 되었지만 같은 10월 말에는
S/S 서울패션위크.
서울패션위크가 있었다. 이은석 디자이너의 모델로 서기로 예정되어 있었고 비록 착장 세 벌이 전부긴 했지만.
설 수 있다는 그 자체에 의미를 뒀다. 아직 신인이니 검증이 여러모로 안 되어 있는 상태일 테니까.
종소리가 울리자 반 아이들이 전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다음 과목이 뭐더라.’
영어네. 서랍에서 영어 교과서를 꺼낸 나는 볼펜을 손에 쥐었다. 단어나 암기하고 있어야지.
빨리 시간이 지났으면 좋겠다.
교과서 한 모퉁이에 영어가 아닌 다른 문구가 적혔다.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 시간 또한 빨리 지나가길 바라는 걸지도 몰랐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