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63화 (63/137)

〈 63화 〉 chapter 62. 내가 서고 싶은 곳은

* * *

모든 공연에는 항상 관객들의 평가가 잇따른다.

누가 잘했고, 누가 못했다.

연출이 좋았고, 연출이 별로였다.

무대가 괜찮았고, 무대가 안 좋았다.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물건에 대해 평가하고, 사람에 대해 평가하는데 공연이라고 해서 뭐가 다를까.

하여 이러한 패션쇼에서도 평가는 극명하게 갈렸다.

모델과 의상.

단 두 개밖에 등장하지 않는 이 쇼에서 평가요소라 할 거는 딱히 없었다. 물론 조명이나 무대 스케일, 연출이 부가적으로 따르겠지만 주력은 아니지.

모든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쇼의 메인이야말로, 사람들의 평가 대상이 된다.

쇼가 시작되자 스크린에는 해당 브랜드의 짧은 영상이 틀어졌다.

이후 로고가 띄워지고 음악이 깔렸으며 세 명의 모델이 나옴과 동시에 쇼가 시작됐다.

‘아쉽네.’

걸을 때 팔 전체를 쓰는 모델도 있고, 팔꿈치를 쓰는 모델도 있었으나 개인적으로 팔꿈치만 쓰는 모델이 팔을 너무 크게 움직여 해당 자켓 팔 부분이 자꾸만 구겨졌다.

워킹 스타일은 다 다르겠지만, 의상과 어울리지 않네.

그리고 이어진 두 번째 브랜드 스테이지에서는 전부 밝은 표정들의 모델들이 나왔다.

중간에 모델들끼리 하이파이브를 하는 부분에서 탑 쪽으로 가던 모델의 걸음 템포가 순간적으로 빨라지는 실수가 있었지만.

이외에도 자잘한 실수들은 조금씩 보였다.

“저기 신발 끈 풀어졌네.”

서아가 옆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실제로 조명이 무대에만 비추어지기 때문에 저런 것들도 잘 보이기 마련이다.

‘그래도 의식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넘어지면 큰일이지만 모델이 내색하지 않고 워킹을 당당하게 해 커버했다.

쇼는 중간에 있는 공연을 포함해서 총 50분 동안 진행됐고

의외로 꽤 많은 브랜드가 의상 협찬을 해준 것 같았다. 학생들 사이에서 유명한 브랜드부터 디자이너 개인 브랜드까지.

완벽한 패션쇼라고는 볼 수 없겠지만 저 위에 선 이들의 나이를 감안하면 꽤 괜찮다고 볼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인물들도 있었고.

관객 중에서는 학생들도 있었고, 부모들도 있었으며 어린아이도 있었다.

‘서울패션위크에서는 보지 못할 광경.’

초대장을 받아야 올 수 있는 패션쇼와는 달랐다. 애초에 주차장에서 패션쇼를 연다는 것도 신기했을뿐더러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렇게 많은 학생들이 모델을 꿈꾸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현실에 벽에 부딪히면, 많은 사람이 포기하겠지만.’

나는 오로지 그들이 보여주는 쇼에 집중했다. 모델을 보기도 하고 의상을 보기도 하며 그들이 짓는 표정을 보기도 했다.

아마 이 첫 번째 줄에 앉은 이들이 이 패션쇼에 나온 모델들에 대해서 평가를 내려줄 테니.

그렇다면 나는 대신 이 쇼를 전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이다.

고등학교 예술제의 패션쇼는 브랜드 패션쇼와는 다르다. 컨셉을 소화해내는 개인이 달랐고 걷는 자세부터 모든 게 달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 얽매여 있지 않다는 게 그들을 열여덟 살로 보이게 해줬다.

‘나는 저런 무대에 서고 싶나?’

같은 학교에 고작 한 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저 무대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그래도

“...... 아닌가 봐.”

나는 저런 자유로운 무대가 아닌, 더 높은 곳에서 평가받고 싶었다.

평가에 뒤따르는 인정을 받고 싶으니까.

이 작은 예술제의 패션쇼를 보면서 느꼈다. 내가 서고 싶은 건 이런 자유로운 꿈을 가진 자그마한 런웨이가 아니라

이것보다 더 엄격하고, 평가받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런웨이를 원한다는걸.

그게 내가 바라 마지않는 무대.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50분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쇼가 끝나자 우레와도 같은 박수 소리가 장내를 가득 채웠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멋지다.”

“...... 그러게.”

“너도 내년이면 저렇게 서는 거야?”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서아를 보면서 나는 잠시 침묵했다.

내년에 저 자리에 내가,

“.... 아니. 대신에 초대장 보내줄게. 그거 보러와.”

없을 거 같아서.

나는 오늘 더 큰 패션쇼에 서보고 싶다는 열망을 인정했다.

****

서아와 함께 보낸 예술제의 첫째 날과 달리 둘째 날은 혼자였다. 오늘은 실용무용과의 공연이 있는 날이니 아마 오전 시간 내내 공연 준비를 하느라 바쁘겠지.

그래서 나는 넉넉하게 집에서 샐러드로 점심을 때운 뒤 여유롭게 출발해 먼저 자리를 맡아놓을 생각이었다.

‘어차피 언제 등교하든 상관없으니까.’

예술제 기간 동안에는 조례와 종례가 없었다. 부스야 어제 돌았고, 둘째 날에 혼자 가봐야 할 것도 없으니.

공연 시간에 맞춰 갈 생각이었다.

“교복 말고 사복 입을까.”

옷장을 열며 사복을 입을지, 교복을 입을지 고민했지만 그냥 교복을 입었다.

나이 먹으면 그렇게 교복이 입고 싶고 후회하게 되더라.

‘하루라도 더 교복 입어야지.’

기껏 샀는데 돈 아깝지 않은가.

마이까지 걸치니 거울에는 완벽한 고등학생 한 명이 서 있었다.

공연 시작은 12시.

11시 20분에 학교에 도착해 30분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을 생각이었는데 이미 와 있는 사람도 있었다. 나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꽉 찼고, 일찍 온 덕에 비교적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진행 MC가 나옴과 동시에 시작된 실용무용과의 공연.

서아는 1학년 수석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계속해서 나왔다. 의상이 체인지 될 때도 있고, 음악 장르가 바뀔 때도 있고.

‘잘 추네.’

무용과 몸 시간 때도 알아보긴 했지만 정말 춤을 잘 췄다.

‘울고 있었던 얼굴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야.’

나는 작게 웃었다.

저번에 점심을 먹으면서 서아가 한 말실수 덕분에 우리의 첫만남이 무용 시간이 아니라, 실기 고사 날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서아가 그때 그 하루 동안 잊지 못했던 여자라는 사실을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고.

만약 내가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는 걸 알면 놀릴게 분명했댜.

‘절대 말 안 해야지.’

첫만남부터 그녀는 울고 있었지만, 수석인데도 엄청난 연습량과 함께 은연중에 드러나는 불안함은 종종 무언가에 쫓기듯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함께 있을 때면 더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를 하고 놀았었는데.

‘그냥 기우였나 보네.’

무대 위에서 훨훨 날아다닌 걸 보아하니 괜한 걱정이었다. 무대에서 빛을 발한다는 게 이런 건가.

외모도 한몫했지만음악에 맞춰 움직이는 몸이 역동적이다가도 부드러웠고, 강약 조절도 남달랐다.

어쩐지 저 무대 위에 있는 녀석이 내가 아는 애가 아닌 거 같아서 어색했네.

나는 순식간에 무대에 빠져들었고, 중간에 서아와 한 번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정확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어진 3시간의 공연이 막을 내리자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말이 방송을 통해 들렸다.

앉아있느라 쑤신 몸을 가볍게 스트레칭했다.

“으으, 이제 갈 시간이네.”

느릿느릿 운동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에 비해 확실히 교복을 입은 사람보다 사복을 입은 사람이 많긴 했다. 전학년이 한데 모이니 운동장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고.

예술제 시상식을 끝으로 노아예고의 예술제가 끝났다.

사람들은 저마다 밝게 웃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면서 서 있었다.

“역시 수석이네, 엄청 잘 추더라. 그동안 연습하느라 수고했어.”

“고마워! 그, 그......”

그런 내게 다가온 서아는 마지막 무대에 섰던 상태 그대로였다.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 같지만, 뒤에서 같은 실용무용과인 애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걸 보아하니

“너 기다리는 거 같은데?”

“...... 아. 오늘 뒤풀이 있어서, 아무래도”

“오늘 저녁은 다른 날로 미루자. 빨리 가봐.”

예술제가 끝나면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지만 혼자 뒤풀이에 빠지면 좀 그럴 거다.

내 말에 잠시 우물쭈물하던 서아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 연락할게!”

실용무용과가 있는 쪽으로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녀석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고작 알게 된 지 반년을 조금 넘은 수준이지만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무슨 걱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털어놓지 않았고

그건 우리가 그어놓은 암묵적인 선이다.

‘그거면 됐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겨 교문을 빠져나갔다.

“집에 가서 콘티나 한 번 다시 봐야겠네.”

매일 같이 보고 있지만 오늘따라 유독 보고 싶은 콘티였다. 곧 있을 서울패션위크.

‘보기만 해서 그런가 몸이 근질거리네.’

직접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고, 기대하지도 않았건만 고등학교의 예술제는 여러모로 내게 영향을 주었으니까.

많은 걸 깨닫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계기와도 같았다.

내 열일곱의 고등학교에 예술제가 가져다준 의미처럼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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