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 chapter 64. 서울패션위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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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시크는 남성스럽지만 소년스러운 무드를 가지고 있는 브랜드다.
S/S 시즌, 봄과 여름이라는 계절이 물씬 풍기는 밝은 색상, 해외 수출을 인식해 가미된 난해한 디자인.
그렇다고 해서 전부 난해한 건 아니었다. 충분히 한국에서 입을 수 있는 무난한 디자인들도 있었지만.
적어도 이은석 디자이너가 나를 생각하며 직접 디자인했다는 이 의상은 평범과는 조금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의상을 소화해내는 것도 모델의 재량이지.
“GO!”
무대 바로 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스탭의 사인에 맞춰 무대로 나갔다.
서울패션위크의 패션쇼는 규모가 크고 그만큼 관객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장하거나 실수하는 건 하수나 하는 짓.
이런 패션쇼에서는 더욱이 용납할 수 없는 게 ‘하수’다.
정해진 동선과 리허설대로 첫 번째 의상의 워킹이 끝나고 돌아오자 백스테이지는 가히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
나는 빠르게 사람들을 지나쳐 뒤쪽으로 가 옷을 벗었다. 그러자 내게 붙어 옷을 내미는 두 명의 헬퍼들.
“여기 발 넣어주세요!”
“팔이요! 반대 팔도!”
정신이 없을 법도 했지만 그들의 도움을 받아 오히려 빠르게 환복을 마쳤다. 그리고 모델 대기선으로 가 서있으니 헬퍼와 메이크업 담당이 다가왔고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메이크업을 수정하며 액세서리를 바꿔 끼웠다.
귀걸이와 팔찌, 신발 끈을 제대로 묶으며 준비를 끝내자
‘모자.’
머리에 씌워지지 않은 모자를 쓰기 위해 헬퍼를 쳐다봤으나 그의 손에는 모자가 있지 않았다. 미친 건가.
“모자 어딨어.”
“헉 잠시만요!!”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있던 헬퍼가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총알같이 튀어 나갔다.
가뜩이나 촉박한 시간에 모자를 갖고 올 시간 따위 주어지지 않았다.
앞에 있던 모델들이 차례로 나가기 시작하고, 결국 내 바로 앞 차례인 모델이 나가고 나서야 헬퍼는 모자를 갖고 올 수 있었고.
‘지금.’
“GO!”
모자를 낚아채듯이 가져간 뒤 속으로 예견하고 있었던 사인에 맞춰 나는 무대로 걸음을 옮겼다.
오른손에 쥐어진 망사가 올려져 있는 보트햇 모자.
모자를 신경 써서 팔의 각도를 재조정했고, 왼손은 예정대로 주머니에 넣은 채 워킹 했다.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관객과 가까운 거리기에 모든 걸 세세하게 신경 쓰면서 워킹해야 했고
무엇 하나 놓치지 않으며 나에게 집중했다.
지금은 오른손에 모자라는 변수가 있으니 리허설 때와는 다른 포즈를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탑에 도착하자
가장 깔끔한 움직임으로 부드럽게 모자를 썼고, 머리 사이즈보다 큰 걸 감안해 뒤로 약간 젖혔다,
이어서 포즈를 취하고 그대로 턴.
등 뒤에서 들렸던 음악 소리가 이제는 앞에서 들렸다. 중간에 다시 한번 턴을 하고 포즈를 취한 뒤 백스테이지로 돌아왔다.
책임 같은 걸 물을 시간은 없었다.
아까와 똑같이 분주하게 옷을 갈아입으며 일련의 준비를 반복했고 그렇게 세 번째 의상까지 소화해낸 뒤 마지막 피날레를 기다리면서 조급한 마음을 달랬다.
피날레를 위해 모델 대기선에 한 줄로 선 모델들.
끝까지 집중해야 했다. 서울패션위크에서 실수라는 건 모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GO!”
수없이 들린 사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앞뒤 모델과 간격을 유지하며 걸음을 옮겼다.
무대에 서 있는 한 끝까지 긴장을 놓치면 안 된다. 무엇보다 이런 런웨이 패션쇼는 더욱 워킹에 신경 써야 하고.
그렇게 피날레를 마지막으로 백스테이지로 모든 모델이 돌아오자 쇼의 막이 내렸다.
S/S 이은석 디자이너의 맨시크 패션쇼.
무대에 서느라 한껏 달아올랐던 희열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전에 했던 패션쇼와는 다르게 다양한 패션 업계 종사자들이 관객석에 앉아 있었겠지만,
‘잘 보셨으려나.’
이번 패션쇼는 맨시크를 통해 받은 초대장으로 가족들이 관객석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숨을 조금 고르고 나서야 쇼가 끝났음을 실감했다. 쇼에 집중하느라 예민해져 있던 신경은 그대로였지만.
“정말 죄송해요......”
“......”
사과하는 헬퍼를 보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단 몇 분의 무대를 위해 준비하고 들이는 시간과 비용은 이 헬퍼가 감당할 수 없을 만치 컸으니까. 애초에 사과한다고 해서 내가 받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델분들 사진 다 같이 한 장 찍을게요!”
카메라를 든 스탭이 외쳤다.
아직 의상을 갈아입지 않았기에 모델들이 곧바로 백스테이지 한쪽으로 모였고 나도 그들을 따라 옆에 붙어 섰다.
찰칵ㅡ 찰칵ㅡ
몇 차례 플래시가 터진 후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모델들이 흩어졌다.
입고 온 의상으로 갈아입은 뒤 모자를 쓴 나는 주변 이들에게 인사를 하며 백스테이지를 벗어났다.
아쉽게도 이은석 디자이너와는 인사를 나누지 못했지만, 아마 나중에 어떤 연락이라도 오겠지.
이번 서울패션위크의 결과나 반응에 대해서도 아마 에이전시를 통해 알 수 있을 거다.
“순식간에 끝나버렸네.”
이 하루를 위해 준비했던 모든 것들이 끝나버렸다. 공허한 마음 대신 충족감이 차오르고 후련했다.
‘오늘은 먹고 싶은 거 먹어야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며 먹고 싶은 메뉴를 골랐다. 다른 준비도 해야겠지만 오늘만큼은 배 터지게 먹어도 되지 않나.
****
‘우연이는 왜 모델이 되고 싶어?’
‘그냥.’
‘응?’
‘그냥 하고 싶어서, 딱히 다른 이유는 없는데?’
우연의 아버지, 한성은 아주 어렸을 적 우연에게 했던 질문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작고 소중한 내 아들.
TV에 나온 것도 아니고 실제로 본 적이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모델이 되고 싶다고 했던 아들이.
퍽이나 그 직업에 잘 어울려서, 처음 들었을 때는 내 아들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모의 입장.
어린 나이에 가진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정반대로 우연은 커갈수록 꿈에 한 발자국씩 더 가까워졌다,
평범하고 안정적인 직업이 아닌 만큼 불안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가 아들을 너무나도 예쁘게 낳아버렸지 않은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나이 들어서 울면 주책이라고 하던데.
패션쇼를 보는 그의 눈에서는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하지만 우연이 나오는 걸 놓칠세랴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나오는 모델들을 주시했고.
‘다 컸네.’
무대 위에 서 있는 우연을 볼 때면 저게 그토록 작았던 아들이 맞나 싶었다.
자랑스러우면서도, 씁쓸한 마음.
어렸을 때부터 조숙하고 남다른 아이였단 걸 알았지만 그것이 모델로서의 재능과 연결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정말 다 컸네.’
모델이 되고 싶다고 했던 것도, 피팅 모델을 하겠다는 말도, 에이전시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도.
항상 확신에 차 있는 선택이 부모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들곤 했다.
이 길을 너에게 허락해주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일지에 대해서 고민했고 불안해했지만
‘틀리지 않았구나......’
내 아들이 걷는 길이 가시밭길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맛있는 거 하나라도 더 먹이고 싶은 아들이 비쩍 마른 건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제는 정말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의 뒤를 응원해주는 것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
‘우리 에이전시 모델이라서 그런가.’
지정석에 앉아 맨시크의 패션쇼를 감상하면서 주성훈 대표는 생각했다.
우연이 나올 때면 항상 그에게만 고정되는 시선이 과연 자신의 에이전시 소속 모델이어서인지에 대해.
‘딱히 우리 모델이어서는 그런 건 아닌 거 같은데.’
직업 특성상 의상도 의상이지만 모델을 주로 살피는 주성훈 대표다. 그런 그가 우연의 뒤를 눈으로 좇고 있었으니 아마 다른 이들도 그를 눈여겨보겠지.
패션쇼는 굉장히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진다. 그 사이에 관객들은 모델을 보고, 모델들은 그런 관객들에게 보여지고.
확실히 이은석 디자이너가 뮤즈로 생각하고 제작한 의상이라더니
우연의 이미지와 꽤 잘 어울렸다.
‘룩북 몇 번 입혀보더니 감을 잡았나.’
그때와는 다르게 우연에게 입혀진 옷은 그의 이미지 자체를 다르게 보이도록 했다.
옷도 중요하지만 입은 사람이 더 중요하니까.
서울패션위크같이 큰 패션쇼에 섰으니 아마 우연에 대한 반응은 어떻게든 돌아올 게 분명했다.
그리고 과연 그의 눈에서만 우연이 눈에 띄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겠지.
주성훈 대표는 우연의 워킹을 다시 한번 되새김질했다. 우연은 확실히 무대 체질이었고
“기복이 없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최고의 칭찬일 정도로, 그는 기복 없이 처음 볼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내일이면 강원우가 서는 패션쇼에 가겠지만, 어쩐지 오늘 우연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릴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래서 외모가 사기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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