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chapter 72. 덫
* * *
“이걸로는 안 되나요?”
“네, 아무래도 지금 모은 증거로는 부족한 게 없잖아 있습니다. 비교적 약한 처벌은 가능하겠지만......”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이어지는 변호사의 말에 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어물쩡하게 한 번 힘을 뺄 바에야 차라리 기다렸다가 크게 한 방 먹이는 게 나을 거 같으니까.
지금 같은 일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이놈의 지긋지긋한 스토커는 언제쯤 떼어낼 수 있으려나.’
크게 바뀌지 않는 사실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생각해뒀던 방식을 이젠 진짜 실행시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머리가 아파졌지만 굳이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변호사의 말을 들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 앉아있던 예진도 그런 나를 따라 일어섰고 그렇게 우리가 사무실을 나오자
지잉ㅡ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설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설마 하는 마음에 핸드폰 화면을 켜자
다행히도 진동 소리의 정체는 광고 알림이었다. 스토커에게 뚫린 폰은 여전했지만 그나마 이 폰으로는 연락이 안 와서 다행이지.
“대체 아이돌들은 이런 걸 어떻게 버티는지 모르겠네요.”
“...... 걔네도 다 힘들어해. 티를 안 내서 그렇지.”
그럴만도.
예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애들이 한 둘이 아닐 테니까.
처음에는 불안했고, 그 뒤부턴 어떻게 잡아서 족쳐야 할지 고민했었지만 종종 하는 행동을 보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있었다.
‘무섭나?’
무섭다기보다는 아마 불안하다는 말이 더 정확하다.
일단 내 주변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불안감, 나에게 언제든지 접근할 수 있다는 불안감.
덕분에 크리스마스에도 일을 하면서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는데 그것을 대신해 어김없이 꽃다발이 놓여있더라.
바로 버려버렸지만.
신경을 안 쓰려고 해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절대 못 쫓아오게 돌아서 갈게.”
새해가 밝고, 주어진 삼일이라는 시간 동안 본가에 돌아가기 위해 예진의 차를 탔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건 말도 안 되고, 혹여나 스토커가 따라올까 돌고 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저번에 다짐했던 자주 오겠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오랜만에 보는 가족.
‘진짜 여기까지 따라오면 죽기 살기지.’
만약 가족을 건드린다면 그때야말로 눈에 뵈는 게 아무것도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잘 따돌린 것인지 스토커에게 연락이 오는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미친 듯이 왔다.
그 반응을 보면서 한결 마음이 편해진 나는 예진에게 인사한 뒤 집안으로 들어섰고
“왜 이렇게 말랐어!”
“뭐야, 너 안 먹고 살았냐? 아앙?”
집에 들어서자마자 잔소리를 시작한 가족들을 보면서 스토커에 대한 생각을 온데간데없이 지워버렸다.
그렇게 삼일 동안 본가에 있으면서 일상을 되찾은 나는 다시 한번 더 계획을 머릿속에서 재정립했다.
한 번, 딱 한 번이면 된다.
****
“우연 씨 살 빠졌어요?”
“아, 네.”
“으음 봤었던 프로필보다 더 살이 빠진 거 같아서요, 뭐 오히려 좋아요.”
“다행이네요.”
“마르면 마를수록 좋으니까요.”
제우스 코스메틱 관계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번에 제안 온 광고 계약 건 중에서 가장 큰 브랜드이자 광고였다.
TV에도 송출될 예정이라며 영상 촬영과 오프라인 매장에서 홍보할 화보 광고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고.
오늘은 촬영 전에 있는 사전 미팅 날이었지만, 그런 나를 훑어보는 제우스 코스메틱 관계자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마르면 마를수록 좋다라.’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했다.
카메라를 받으면 얼굴이 더 부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카메라에 비추어지는 것과 실물로 보는 게 차이가 많이 일어나니까.
그걸 줄이기 위해 많은 연예인들이 살을 뺀다.
스토커 때문이기도 하지만 입맛도 없고, 최근 밥을 챙겨 먹는 게 귀찮아서 잘 챙겨 먹지 않았더니 살이 꽤 많이 빠졌다.
‘아마 광고 영상 속에서는 잘 나오겠지만.’
이어서 컨셉과 홍보 제품, 콘티가 적혀 있는 종이를 가져온 제우스 코스메틱 관계자는 지금껏 찍었었던 광고 화보들을 예시로 들면서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했다.
“원래는 남자 아이돌로 기획했는데, 어떤 분이 우연 씨를 강력 추천해 주셔서요. 이번 섀도우 팔레트랑 립스틱이 전부다 소년스러운 컨셉으로 출시......”
제품 설명을 경청하면서 나는 대략 포즈나 구도에 대한 의견을 간간이 제시했다.
의상도 어느 정도 살리면서 상반신 촬영 때는 어깨라인과 팔 동작으로 이미지를 어필하고, 표정을 어떻게 할지까지 차근차근 구상했다.
“그럼 촬영 때 봬요.”
“네! 감사합니다. 촬영 때 봬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성황리에 미팅이 마무리됐다.
미팅이 끝나고 예진과 함께 에이전시로 돌아가는데, 그런 우리를 맞이한 건 직원이나 실장이 아닌 꽃바구니였다.
“하아.”
나는 붉은 장미가 담긴 꽃바구니를 쳐다봤다. 저기 어딘가에 꽂혀있을 카드도, 아니 애초에 저 꽃바구니를 만지지도 않겠지만.
‘역시 악질이라니까.’
미팅이 끝남과 동시에 스토커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생각도 끝낸 나는 그대로 꽃바구니를 지나쳐 위층으로 올라갔다.
완벽한 타이밍은, 계획적으로 다가가야 하니까.
****
스토커는 한 명이지만, 그 한 명이 다른 사람이 해줄 짓도 전부 다 해주는 느낌이었다. 혼자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도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뭐.’
일반적으로라면 그냥 이대로 당하고 있었을 수도 있지만, 나는 내 저 스토커를 완전히 감방으로 밀어 넣어 떨어트리고 싶었다.
단순 스토킹 자체로는 경범죄 처벌인 거에 비해 다른 형사범죄가 성립한다면 형사범죄로 형량이 주어지니까.
전에 살던 집에 주거침입한 것도 죄로 물을 순 있었지만 증거가 미약했다.
그래서 얻기 위한 확실한 증거, 그 증거를 얻을 타이밍.
‘협박을 한단 말이지......’
스토커에게서 연락이 오는 핸드폰 메시지 내역을 보면 가끔 협박을 가장한 메시지들이 보였다. 이걸로는 부족하단 말을 들었지만,
주로 내 주변에 있는 여자들에게 반응하는 거 같았다.
어딜 가나 이런 정신병자에게 자극 하나를 주면 그만큼 확실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나는 덫을 놓기로 했다. 이 스토커가 나에게 가져다줄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한 덫.
“누나, 알죠? 저랑 애인인 거처럼 행동해야 해요.”
“으응.”
일단 덫을 놓기 위해서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그리고 실행 일자는, 제우스 코스메틱 촬영의 마지막 날.
다음날에 일정이 없기도 하고 아웃스타그램과 같이 SNS를 통해 촬영 사진과 셀카가 올라가서 아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집 근처에서 대기를 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동안 단순히 스토커를 잡을 순 있었겠지만, 잡지 않았다.
완벽한 한 방을 위해.
SNS에서도 예진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고, 일부러 예진과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지금.
예진의 차를 주차장에 댄 뒤, 우리는 주차장에서부터 오피스텔 건물까지 팔짱을 끼고 애인처럼 들어갈 예정이었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면 스토커도 그 장면을 목격하겠지.
“나는 아직까지도 반대야. 해코지 같은 거 당할 수도 있잖아.”
“그전에 당연히 경찰 불러서 잡고, 변호사 불러서 고소 먹여야죠.”
“...... 후 일단 알겠어. 최선을 다할게.”
어쩐지 비장한 얼굴인 예진이었지만 최선을 다한다니 말리진 않았다.
‘애인처럼.’
스토커를 자극할 포인트였다.
그렇게 우리는 차에서 내려 팔짱을 끼고 천천히, 오피스텔 건물로 향했고 나는 일부러 중간중간 예진에게 머리를 비볐다.
그런 나를 예진은 웃으면서 쳐다보며 머리를 쓰다듬어줬고.
오피스텔 건물 앞에 도착해 비밀번호를 누른 뒤 안으로 들어가자
‘아.’
닫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왠지 모르게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주민일 수도 있겠지만, 머릿속에선 당장 뒤를 돌아보라고 말했었으니까.
그렇게 몸을 틀자
“......”
너구나.
투명한 유리로 된 출입문을 두고 후드티에 모자를 눌러쓴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퀭한 얼굴에서 흉흉하게 빛나는 눈빛.
‘누가 봐도 스토커네.’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저 눈빛을 마주하니 몸이 오싹했다.
비밀번호를 치고 들어와야 해서 스토커는 못 들어왔다. 나는 팔짱을 끼고 있던 예진에게 몸을 더 기대면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고 그러자
쾅ㅡ
“아 저년이 진짜......”
“가요.”
스토커가 주먹으로 출입문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들은 경비가 무슨 일이냐며 말해왔지만 나는 출입문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예진과 함께 타고 올라갔다.
예진의 표정은 보지 않았지만, 아까 그녀의 말에서 이미 화가 느껴졌다.
“괜찮아요. 괜찮아.”
“...... 후 그래.”
누구한테 괜찮다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은 채 집으로 들어서자 예진은 곧바로 쇼파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경찰 부를까?”
“아뇨, 조금 이따 부르죠. 아직 해야 할 게 남았으니까.”
예진은 여전히 인상을 쓴 채로 나를 보며 말했지만, 나는 그런 예진의 눈앞에 핸드폰 하나를 흔들었다.
무음으로 처리해놔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켜진 화면에서는 계속해서 무언가가 올라오고 있었으니까.
‘아 전화 오네.’
“확실한 증거, 얻어야 하니까요.”
내가 원하는 건 ‘증거’고 스토커는 나와 직접적으로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을 알고 있다.
자극된 스토커가 나에게 줄 증거를 얻기 위해,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