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76화 (76/137)

〈 76화 〉 chapter 75. 익숙해진 것

* * *

“으음, 마스크로는 하나도 안 가려지는 거 같은데?”

“그래?”

“어. 너 완전 멀리서 봐도 모델이야.”

“어쩔 수 없지 뭐.”

나는 어깨를 으쓱한 뒤 자리에 앉아 마스크를 벗었다.

‘안 그래도 답답했는데.’

밖에 나가서는 써야겠지만 지금은 실내이니 벗고 있을 생각이었다.

평일 오후 5시라는 애매한 시간대여서 그런지 카페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인터넷의 파급력이 크기도 하고 한동안 활동을 활발하게 한 탓인지 이제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하지만 그렇다고 후줄근하게 입고 나올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깔끔한 모노톤 옷으로 입고 나왔다.

“아무것도 안 먹었지? 여기 샐러드 말고도 샌드위치가 맛있다는데.”

“그러면 샌드위치 시킬래. 너는 뭐 먹게?”

“나도 샌드위치.”

원래는 샐러드를 먹을 생각이었지만 그거나 그거나.

자리에서 일어난 우리는 카운터 앞으로 걸어갔다.

같이 나란히 서서 걸어가다 보니 자연스레 시선이 옆에 있는 송이에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어째 더 작아진 거 같네.’

일어서니 확연하게 키 차이가 느껴졌다.

내가 키가 큰 것도 있겠지만 송이가 더 이상 크지 않는 것도 한몫한 거 같았다. 어렸을 때는 내가 더 작았을 때도 있었고 비슷할 때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역전하긴 했지만 새삼 키 차이가 많이 난다는 게 느껴졌다.

내가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송이는 내 쪽을 쳐다보면서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고.

“뭘 봐.”

“뭘 보긴 너 키 작은 거 구경하는데.”

“죽을래?”

“미안미안. 그래서 어떤 거 시킨다고?”

주먹을 치켜세우는 송이에 나는 빠르게 사과했다.

‘저거 진짜 맞으면 아프더라.’

과거에 뭣도 모르고 장난으로 맞아봤다가 아파서 눈물 찔끔 날 뻔했다.

아무튼 간에, 꽤 다양한 샌드위치 종류를 보면서 나는 단번에 에그 샌드위치를 골랐고 송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햄 샌드위치랑 아메리카노.”

“오케이.”

“아 내가 주문할게!”

“됐네요.”

카운터에 앞에 서자 옆에서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그대로 메뉴 이름을 불렀다.

“햄 샌드위치랑 에그 샌드위치 하나씩 주시고 아메리카노도 두 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결제는 앞에 카드 꽂아주시면 돼요!”

밝게 말하는 남자 점원에 나는 카드를 꽂았고, 영수증과 함께 진동벨을 건네며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오자 어딘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의 송이가 앉아 있었고.

나는 진동벨을 내려둔 뒤 겉옷을 벗었다.

‘몸 좀 녹였으니까.’

밖이 찬바람 쌩쌩 부는 거에 반해 안은 히터 때문에 따뜻했다.

“...... 뭘 봐?”

“허 참네. 그냥 본 거거든?”

“그래? 그럼 말고.”

내가 주섬주섬 겉옷을 벗는 동안 그런 나를 쳐다보는 송이에게 아까 했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자 그녀는 나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여전하네.’

오랜만에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색함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주문한 메뉴들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에 가볍게 얘기하기 시작했고

그중 송이는 자기가 소속된 엔터테인먼트 얘기가 나오자 흥분한 상태로 말을 이어갔다.

“아직 부족한 게 많아서 딱히 기대 안 했었는데, 소속사에서 진짜 한 번만 보라고 해서 오디션을 봤거든? 웹드라마 오디션인데......”

“응, 아 나왔나 보다.”

“내가 가지고 올게.”

진동벨에 내 손이 닿기도 전에 재빠르게 가져간 송이가 하던 말도 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카운터로 가버렸다.

‘뭐야 방금.’

한창 얘기하고 있었을 땐 언제고 순발력 개쩌네.

쿡쿡거리며 웃고 있자 송이가 쟁반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탁상 위에 올려진 쟁반에는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들과 아메리카노 두 잔이 올라가 있었고.

최근에 갑자기 카페인에 맛 들인 나는 거의 매일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트레이너에게 보내기 위한 사진 한 장 찍고 바로 보낸 뒤,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셨다.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그 웹드라마 오디션을 봤는데 거기 여주인공 친구 배역으로......”

송이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물티슈로 손을 닦은 뒤 샌드위치를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있네.’

먹으면서도 오디션에 합격해 캐스팅된 그 웹드라마가 어떤 웹드라마인지, 배역이 어떤지에 대해 작게 말하는 송이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너무 나만 말한 거 같은데 이제 네 얘기 좀 해봐. 어떻게 지냈는지”

“으음. 잠깡망.”

자기 얘기를 끝낸 송이가 그동안 말하느라 손도 안 댄 샌드위치를 들면서 내게 말했다.

입안에 이미 샌드위치가 들어가 있어서 몇 번을 더 씹고 난 뒤에야 말을 할 수 있었고, 어떤 말을 할지 고민하다

‘최근 일상은 전부 다음주에 가는 유필리아랑 연관되는데.’

어차피 얘도 나한테 웹드라마 관련해서 알려줬겠다, 이 얘기나 해야지 싶었다.

‘근데 내가 얘한테 이탈리아 간다는 얘기를 했었나?’

안 했었던 거 같다.

“나 다음주에 이탈리아 가거든. 확정은 아닌데 일단 미팅 차원에서 가는 거고 그거 때문에 요즘 체중 관리하면서 영어 공부하느라 바빠.”

“켁.”

“천천히 먹어.”

샌드위치를 먹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급하게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송이를 보고 나는 샌드위치를 다시 들었다.

말하다 보면 잘 먹지 못하니 틈새를 노려 작게 베어 문 한 입.

“뭐가 좀 많이 생략되어 있는 거 같다? 나는 그냥 저번에 있었던 일...... 그런 거 얘기할 줄 알았는데.”

“아.”

그것도 근황이라면 근황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스토커 관련한 문제는 이미 내 손을 떠난 문제였다.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도 이미 했고, 아마 지금쯤이면 청소나 하고 있지 않을까,

송이는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사실 최근에 워낙 바빴다 보니 생각하지 않으면 잠깐씩 잊어버리곤 했다.

“딱히 좋은 얘기는 아니잖아? 해결되기도 했고 너처럼 그냥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얘기한 거지.”

“그렇다면야 뭐.”

“아무튼. 유필리아라고 이탈리아 브랜드에서 연락 온 건데 거기 수석 디자이너가......”

약간 걱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송이에 나는 빠르게 화제를 전환했다.

맨 처음 유필리아라는 말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송이는 인터넷에 검색해 보더니 로고 사진을 보고 뭔지 알겠다고 대답했고.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하는 슬픔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자 그녀는 공감했다.

“나도 프로필 사진 찍는데 매일매일 몸무게 재면서 약간 압박? 같은 거 받았었어. 그렇게 심하진 않았지만.”

사는 게 다 똑같네.

우리는 순식간에 샌드위치 두 개를 먹어치우고 텅 빈 아메리카노를 빨대로 쪽쪽 빨면서 대화를 이어나갔다.

딱히 갈 곳도 없고, 이대로 헤어지기는 또 아쉬우니까.

“...... 음료 하나씩 더 시킬까?”

“마시는 건 살 안 찌잖아.”

그렇게 합리화도 한 뒤 나는 이번에 망고 스무디를 시켜서 떨어진 당을 보충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둘 다 웃기는 포인트가 있어 웃으면서 대화할 수밖에 없었는데, 불현듯 송이의 웃는 얼굴을 본 나는

‘귀엽네.’

아주 잠깐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소속사에서 웃는 법도 가르쳐주나.

우리는 앉아서 장장 두 시간을 대화하고 나서야 카페를 나왔다.

분명 나도 학교를 다녔는데, 학교 썰이 아주 흥미진진해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

“그래서 너한테 고백한 애는 없었어?”

“어? 있기야...... 있었지?”

송이는 우연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이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게 딱히 아무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인가 싶었지만,

지난날 친구에게 들었던 조언으로는 남자들의 사소한 질문 하나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근데 전부 다 거절했어. 소속사에서도 연애는 별로 안 좋아하고......”

연애 금지라는 조항이 있긴 했지만 사실 아직 데뷔도 안 해서 큰 의미는 없었다.

‘말로는 몰래몰래 한다고 했으니까.’

어째서인지 대답하는데 괜히 횡설수설 말한 것 같았다.

하지만 고백을 받으면서, 그런 연애가 굳이 끌리지 않았을 뿐이었다. 물론 종종 외롭다거나, 남자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들이 몇 있긴 했지만.

‘우연이 아니더라도.’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까진 들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중간중간 자신이 실수한 게 없는지 되돌아보면서 말을 했고.

‘갈 길이 머네.’

그러면서 자신은 이제 막 웹드라마에 캐스팅됐는데 우연은 이탈리아로 간다는 사실에 자조했다.

이후 우연이 중간중간 탁상에 턱을 괼 때마다 얼굴이 가까워져 나도 모르게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볼 때가 있었지만.

“오락실 갈래?”

“오락실? 너 한 번도 안 가보지 않았어?”

“어 뭐...... 그렇긴 한데 한 번 가보면 되지.”

머리를 긁적이면서 오락실에 가자고 제안하는 우연을 보면서 송이는 작게 웃었다.

여자애같이 털털한 것도 우연의 매력 중 하나.

그동안 보지 않아서 감정이 좀 사그라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그래 가자.”

나가기 위해 다시 마스크를 쓰는 우연을 바라봤다.

송이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우연을 바라보는 거에 익숙해져 갔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