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화 〉 chapter 76.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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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왔었던 적이 있어서 그런가.
비록 이번 생을 살면서 한 번도 와보지 않은 곳이었지만 묘하게 익숙했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와본 공간이라 좀 어색하기도 했고.
오락실 안에는 남자 네 명이 각기 다른 게임을 하나씩 잡고 하고 있었다.
일단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는 일.
오천 원을 동전으로 순식간에 500원 부자가 됐다.
그럼 이제 게임을 해야 하는데
“하고 싶은 거 있어?”
“으음......”
주위를 둘러본 나는 침음했다. 내가 뭐했었더라.
‘철권?’
바로 떠오른 게임이 하나 있었지만 다른 게임도 떠오르면서 생각하느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내가 게임을 잘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송이가 내 팔을 잡고 한쪽으로 이끌었고.
“이거 해볼래?”
“뭔데?”
“약간 미니 게임들 있는 건데, 틀림 그림 찾기나 그런 것도 있어.”
큰 화면에 버튼이 3개 있고 펜까지 있는 기계 앞에 섰다.
‘지나가다가 본 거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거절할 이유도 딱히 없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동전을 넣었다.
둘이 같이 하는 게임이다 보니 게임이 시작하자 둘 다 펜을 들고 게임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하나 어딨지? 하나만 찾으면 되는데 안 보여.”
“어, 이거 아냐?”
그 이후로부터는 눈이 빠져라 틀린 걸 찾기도 하고,
“나 박치인가?”
“...... 그으래도 잘했어.”
리듬에 맞춰 버튼을 누르는데 처참한 점수를 얻은 송이를 보면서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기도 했다.
‘박치인가?’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조금, 아주 조금 그런 거 같기도.
그렇게 첫 번째 게임이 끝나자 근처에 있던 다른 게임으로 우리는 눈을 돌렸다.
“총 좀 쏠 줄 알아?”
“한 솜씨 하지.”
“흐응.”
송이가 마치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실력으로 보여주지.’
그래도 총 실력은 죽지 않았는지 쏘는 족족 좀비를 잡으며 게임을 캐리 했다. 중간에 옆에서 죽었는지 동전 넣는 게 한 번 보이긴 했지만.
“총 좀 쏘네?”
“내가 좀.”
게임이 끝나고 한 번 허세를 부려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한 번 게임을 시작하니 눈에 띄는 다른 게임들을 하는 건 쉬웠다.
500원이 두 개밖에 남지 않자 마지막으로 무슨 게임을 할까 둘러보면서 고민했는데.
“농구할래?”
“콜.”
네 개 놓여져 있는 농구 게임 기계에 시선이 고정됐다.
‘마지막으로 하기에 적합하네.’
불현듯 농구 게임 앞에 서자 송이가 말했다.
“농구 점수로 내기할래?”
“내기? 무슨 내기할 건데.”
“그냥 뭐 소원 하나 들어주기?”
대충 말하는 송이의 모습에 나는 지체 없이 좋다고 대답했다.
국민 게임 농구.
내 기억상으로 농구 점수는 그래도 한 300점은 찍었었던 거 같다. 지금은 안 한 지 너무 오래돼서 그 정도 점수는 나오지 않겠지만.
“한 명씩 하자. 네가 먼저 해.”
먼저 하라는 말에 나는 가방을 송이에게 맡기고 동전을 넣었다.
‘뭐지?’
방금 표정이 어딘가 의미심장했던 거 같은데.
가방을 맡기면서 힐끗 본 표정이 무언가 찝찝했지만, 나는 시작 버튼을 눌렀다.
Are you ready~!
동시에 농구공이 쏟아져 내려오고 곧장 농구공을 든 나는 차근차근 하나씩 던져 골대 안으로 넣었다.
2point! 2point! 3point!
“뭐야 잘하는데?”
“힘 빠져......”
공이 들어갈 때마다 점수 올라가는 효과음이 들렸다.
‘빡세네.’
초반에는 그래도 선방하는 거 같더니, 팔 근육을 쓸 일이 별로 없어서 후반으로 갈수록 적중률도 떨어지고 팔이 아파왔다.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고.
<208점/>
그렇게 간신히 200점을 넘기고 나서야 게임이 끝났다. 아 힘이 쭉 빠지네.
“남자 중에 200점 넘는 애 처음 봤어.”
“이게 다 실력이지.”
“그럼 이제 내 차례다?”
나는 송이에게 맡겼던 가방을 다시 건네받았다.
그리고 씨익 웃은 송이가 500원을 넣더니 곧장 시작 버튼을 눌렀고.
Are you ready~!
익숙한 소리와 함께 공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예사롭지 않은 손놀림으로 공을 던지기 시작했고 던져진 공은 부드럽게 골대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대로 점수가 되었다.
‘뭐야. 개잘하잖아?’
멍하니 공이 들어가는 걸 바라봤다. 무슨 진공청소기 마냥 던지는 족족 다 들어가네.
잠깐 눈을 의심했지만 여과 없는 현실이었다.
‘이러다 지겠는데.’
아니나 다를까 송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점수를 가뿐히 넘었다.
그리고 2배인 487점을 기록하고 멈췄고.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송이를 보고 나는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얘 이거 왜 이렇게 잘하냐.
“너 이러려고 내기하자고 한 거지?”
“지는 싸움 따위는 하지 않아.”
아무래도 철저히 계획되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너 원래 농구 잘했어?”
“그냥 체육 시간 때 조금씩 하는 정도?”
같은 반이 아니라서 몰라봤네 이거.
하지만 승부는 승부였다.
진 건 깔끔하게 인정해야지.
“너무 무리한 거 시키면 안 되는 거 알지?”
“어. 근데 지금 당장은 생각 나는 게 없다.”
“그럼 나중에 써.”
그러다 잊어버리면 더 좋고.
뒷말을 삼킨 채 나는 이제 나가자고 말했다,
오락실에서 재미를 좀 봤는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송이는 걸음을 옮겼고 밖으로 나오니 깜깜한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오락실에 들어올 때부터 깜깜하긴 했지만, 더 깜깜해진 거 같네.
“데려다줄까?”
“아니 됐어. 어차피 택시 타고 갈 거야.”
“그래? 그러면 너 택시 타는 거 보고 나도 갈게.”
그냥 지금 헤어지는 게 낫지 않나.
라고 말하기에는 송이의 표정이 꽤나 단호했다.
‘그래 택시 타는 거까지야 뭐......’
송이네 집이 여기서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회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나이기도 했고.
‘보호받아야 된다고 하니까 뭔가 이상하네.’
어쨌든 우리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도착하자 나는 핸드폰으로 도착지를 입력하고 택시를 부르려는데
“다음에도 이렇게 재밌게 놀 수 있겠지?”
옆에서 나지막하게 말하는 송이의 말에 잠시 손이 멈칫했다.
진지하게 묻는 게 아무래도 빨리 대답해야 할 거 같아서 나는 입을 열었고.
“그렇겠지.”
그렇게 말한 뒤 핸드폰으로 택시를 불렀다.
핸드폰 화면을 끄자 우리 사이에 맴도는 침묵.
어색하지는 않았다. 불편하지 않은 편안한 침묵이었으니까.
‘다음?’
다음에는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장담할 수는 없었다. 모델 일이 일정한 것도 아니고 당장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모르니까.
사실 고등학교에 가면서 연락이 끊길 줄 알았지만 어쩌다가 이렇게 돼버렸다. 나쁜 건 아니지만, 약 1년 만에 만나는 건 아무래도 내 탓이 크겠지.
‘바쁜 걸 어떡해.’
바쁘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워커홀릭 기질이 다분했다. 그나마 남는 시간들은 가족들과 함께하는 게 전부.
그리고 꼭 사생활을 은폐해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씩 유명해지다 보니 이런 친구를 만나는 거에도 조심스럽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유필리아 브랜드를 시작으로 해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면
‘아마 보기 어렵지 않을까.’
일을 시작하면 최고의 결과물을 얻고 싶다. 나는 그 과정들 속에서 노력할 것이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송이를 신경 쓸 틈도 없겠지.
“앞으로 우리 둘 다 바빠지겠다. 나도 이제 촬영 들어가니까......”
“응.”
물론 송이가 웹드라마를 찍고 난 뒤에 송이의 상황도 변할 수 있었다. 송이가 바빠질 수도.
아무 말 없던 송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 년에 두 번, 아니 일 년에 한 번이라도 꼭 보자 우리.”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덧붙여 말했다.
“그게 내 소원이야.”
“......”
나를 쳐다보지 않고 앞을 바라본 채 말하는 송이였지만, 그녀가 나와의 관계를 앞으로도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느껴졌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그에 나는 아무렇지 않게 덤덤히 말했다.
“당연하지. 365일 중에 고작 이틀 시간 못 낼까 봐?”
“바쁘다고 내 연락 씹지나 마.”
“너야말로 빵! 하고 뜰 수 있잖아?”
순식간에 진지했던 분위기에서 장난스러운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티격태격하고 있자 택시 한 대가 와 앞에 섰고.
“먼저 갈게.”
“응 잘 가.”
문을 열고 택시에 타면서 우리는 작별 인사를 했다.
택시가 출발하자 비로소 오늘 일정이 다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는데, 핸드폰을 켜자
캐톡ㅡ
송이: (사진) 택시 번호 찍었다. 나도 가는 중
곧바로 캐톡이 울렸다.
원래라면 SNS에 들어갔겠지만 그렇게 가는 내내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캐톡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함이 몰려온 내가 졸기 시작하면서 대화가 끊겼다.
“도착했어요!”
“아 네.”
택시에서 내린 뒤 집으로 비척비척 걸어들어온 나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몸을 뉘었고.
또다시 기절하듯이 잠에 들어버렸다.
캐톡ㅡ
[송이: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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