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chapter 79.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 * *
“확실히 건물들이 다 예쁘네요.”
“그러게, 되게 감성적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해가 떠 있어서 그런가 건물 양식이 더 눈에 잘 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이게 예술의 나라라는 건가.’
남다른 디자인의 건축물들만 봐도 예술의 향기가 물씬 느껴졌다.
예술 분야에서 유학을 간다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나라 중 하나가 이탈리아인데, 왜 유명한지 알았다.
‘물론 프랑스도 빼놓을 수 없지만.’
애초에 유럽이라는 곳은 예술에 대한 존중 의식이 높았기에.
모델도 한 사람의 예술가로 인정해 준다는 말도 있었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그런 대우는 받아본 적 없지만
이번 생에는 어쩌면.
“도착했네. 먼저 내려.”
“...... 네.”
나는 잠시 빠져있던 생각을 접어두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러자 내 시야에는 건물 하나가 보였는데, 출입구에는 유필리아의 브랜드 로고가 위치해 있었다.
“들어가자.”
계산을 마치고 내린 예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화려하네.’
조명부터 시작해서 내부는 어느 하나 평범한 게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덩치가 있는 여자 경비원이 이쪽을 주시하는 게 느껴져 작게 고갯짓으로 인사했고.
나는 화려한 샹들리에에 잠시 눈길을 준 뒤 그대로 예진과 함께 데스크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서 있던 직원이 미소를 짓더니 자연스럽게 영어로 말을 꺼냈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나요?”
“오늘 미팅 관련해서 방문한 모델입니다. 한국에서 왔고 이름은 이우연이에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예진의 말에 잠시 내 쪽을 쳐다본 직원이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하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뭐라고 말하는지는 안 들렸지만, 아무튼.’
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보면서 나는 들떴었던 기분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지금부터는 완벽한 비즈니스고 좋은 결과를 얻어야 하니까.
‘일하러 왔으면 일해야겠지.’
옆을 바라보니 이미 예진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누가 데리러 온다니까 조금만 기다리래.”
“알겠어요.”
잠깐 기다리는 것 정도야 뭐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구두 소리가 들려왔고, 구두 소리의 주인은 어떤 한 남자였다. 그는 우리에게 점차 가까워지더니
“미스터 이?”
“맞아요. 반갑습니다.”
성큼성큼 다가와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맞잡고 대답하자 남자는 싱긋 웃으면서 웰컴, 이라고 말한 뒤 예진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시작이네.’
남자의 행색만 봐도 평범한 이는 아니었다. 아마 우리에게 다가오면서 나에 대한 스캔도 끝마쳤겠지.
‘뭐 원래 이런 곳이니까.’
사람의 겉모습이 누구보다 중요했다.
그렇게 우리는 남자의 뒤를 따라갔고, 그는 안내원 역할인 듯 엘리베이터에 오르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금 바로 캐스팅 디렉터 제인을 만나러 갈 거예요. 매니저는 같이 못 들어가니 다른 방에서 대기하시면 되고.”
그 말에 예진은 나를 쳐다봤지만 우리의 입은 착실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로 들어가자 곧바로 어느 방 문 앞에서 선 남자는 문을 열더니 예진에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고 말했고.
“잘하고 와.”
“네.”
짤막하게 나눈 대화를 끝으로 복도에는 남자와 나만이 남겨졌다.
“가시죠.”
남자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니 꽤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다시 어느 문 앞에서 멈춰 선 남자는 아까와는 다르게 노크를 했고
안에서 들어오라는 말이 어렴풋이 들려오자 남자는 내게 눈짓했다.
“고마워요.”
“행운을 빌어요.”
굿 럭.
남자의 말에 나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에 있던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는데, 방이 넓어서 그녀와 나 사이에는 거리가 꽤 있었다.
‘마치 코앞에 있는 것 같지만.’
찰나의 정적을 뚫고 그녀는 나를 보면서 무심하게 말했다.
“거기서 걸어와 봐요.”
****
“이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요.”
“네.”
들어오자마자 걸어와 보라는 지시를 내렸던 날카로운 첫인상과는 달리 여자, 아니 제인은 그래도 성격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녀의 말투가 부드러워지는 게 느껴졌다.
‘이 바닥에 한 성격 하는 사람 많은 건 다 아는 사실이고.’
안경을 쓰고 키가 큰 제인은 누가 봐도 첫인상이 쎄 보이는 편에 속했다. 거기에는 그녀가 일하는 유필리아라는 브랜드도 한몫했겠지만.
그래도 말투가 부드럽다는 것만으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아마 내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전부 그녀에게는 평가 대상일 게 분명하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나는 제인이 가리킨 방 안에 있는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가 그녀가 준 옷으로 갈아입었다.
아까 워킹을 하고 난 뒤 나를 샅샅이 살펴본 그녀는 몇 가지의 질문을 끝으로 곧장 옷을 갈아입으라고 지시했으니까.
‘입고 나가면 다시 걸어보라고 하려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문을 열고 나왔는데,
“perfect!”
(완벽해!)
나오자마자 나를 훑어본 제인이 외치는 말에 잠시 몸이 굳었다.
그것도 잠시, 태연하게 웃으면서 말을 건넸지만
“잘 어울리나요?”
“매우. 당신을 처음 봤었을 때부터 잘 어울릴 거라고 예상은 했었지만......”
예상외의 반응이 돌아온 덕분에 오히려 당황하는 건 나였다.
어쩐지 흥분한 듯한 제인의 말을 들으면서, 시계를 보니 5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왜인지 더 길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말이 끝나자 갑자기 따라오라면서 방을 나섰고.
‘어디로 가는 거지.’
그런 그녀의 뒤를 따라가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더 높은 층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설마.
아까는 안내역인 남자가 캐스팅 디렉터인 제인을 만나러 가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지만 지금은 영문도 모른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예감이 좋은 게......’
잘하면 오늘 수석 디자이너를 만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따라와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제인은 거침없이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러다 멈춰 선 곳에선 문에 노크를 하더니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그녀의 뒤를 뒤따라 가고 있던 나는.
“hello.”
“hello.”
예상했지만 한편으로는 예상하지 못한, 그러니까 유필리아의 수석 디자이너인 마크 바이에른을.
사진이 아닌 실물로 마주친 순간이었다.
****
“정말 시도할 생각이야 마크? 아무리 도전 정신이 강해도 메인으로 실었다간 돌이킬 수 없어.”
“반항이라면 지긋지긋해. 차라리 내가 반항하고야 말겠어.”
그렇게 말하며 큰 액션을 보란 듯이 취하는 마크를 보면서, CEO은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는 몰라도 그는 얼마 전부터 다음 시즌 컨셉을 소년다움으로 하겠다며 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자기는 그 누구보다 반항하게 생겼으면서.’
베르사체부터 유필리아로 이적한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그의 디자인은 줄곧 반항아 컨셉을 유지했기에 그 유명세를 타고 유필리아를 단숨에 중상위권 브랜드로 안착시켰고.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이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가 어쩌다가 180도 다른 소년이라는 컨셉에 물들었는지는 CEO인 그녀도 몰랐다.
‘저 고집을 누가 꺾겠어.’
그리고 마크의 고집을 꺾기에는 역부족이란 걸 알았다. 아니 애초에 디자이너에게 창작에 대한 자유를 뺏는다는 건 말도 안 됐으니까.
다만 그 변화가 너무나도 갑작스럽고, 모험일 뿐이었다.
“내가 보낸 거 봤지? 시안만 봐도 마음에 들어.”
“시안은 괜찮아도......”
“결과물은 그것보다 낫겠지.”
마크가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가 추구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그것도 단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컨셉이다 보니 당연히 불안하지 않을 리 없는데.
‘묘하게 자신감이 차 있는 게.’
진짜 메인이 될 것만 같았다. 원래는 끼워서 선보이고 반응을 살필 예정이었는데.
뭐 디자인 시안이야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CEO인 자신의 눈에도 꽤 괜찮아 보이긴 했다, 그래서 그런지 마크도 강하게 의견을 내비치는 것 같고.
‘일단 화제를 돌려야겠네.’
화제를 돌릴 심산으로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모델은 누구 세우게?”
“모델? 오, 말 잘 꺼냈어.”
그리고 눈을 반짝이면서 말하는 마크를 보며 1초도 지나지 않아 방금 전 자신을 욕하면서 후회했다.
‘괜히 말을 꺼냈네.’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될 것을, 아까 이야기의 연장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들어보니 아무래도 그가 생각한 컨셉에 딱 맞는 모델을 찾은 거 같은데.
“언제 보기로 했어?”
“그는 동양인이야. 내가 발굴해낸 것과도 다름없지. 아, 언제 만나기로 했냐고?”
그녀가 보기에 마크는 이미 그 모델에게 푹 빠져있는 것 같았다.
일단 이 대화가 끝나면 당장 비서를 시켜 그 모델에 대한 것들을 가져오라 시키겠지만.
“으음, 이틀 뒤에 오기로 했었던 거 같은데.”
저 단단히 꼬인 마크 바이에른이 관심을 가진 걸로 봐서 평범할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 메인은 그 모델이 장식할 거야. 왜냐면 작업물들이 전부 완벽했거든. 다른 것들이 아니라 그 모델이 완벽했어!”
큰일 났네 이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