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81화 (81/137)

〈 81화 〉 chapter 80. 한 번 마음에 들면

* * *

“우연은 에이전시가 한국밖에 없었죠?”

“네.”

“다른 나라 에이전시와도 계약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된 걸까.

‘나도 모르지.’

불과 10분 전의 일을 회상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에는 남자 두 명이 있었고, 그중 한 명은 사진으로만 봤었던 마크 바이에른이었으며 유필리아의 수석 디자이너였다.

눈에 확 들어오는 남자였지만 그는 내 예상과는 굉장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일단,

들어서자마자 그는 내게 밝은 얼굴로 인사하며 악수했고, 나를 한 번 쭉 훑더니 나를 알게 된 과정에 대해 읊기 시작했으니까.

만약 이곳이 한국이었다면 몰카가 아닌지 의심해 볼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좋았고, 누가 봐도 내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으니.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의 말을 들으며 맞장구치고 대답했다.

“한 번 실측해봐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그러던 도중 수석 디자이너는 불현듯 사이즈를 실측해봐도 되냐고 물었고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오늘을 위해서 노력했지.’

제우스 코스메틱 촬영 당시의 몸을 유지해달라는 탓에 먹고 싶은 것도 먹지 못했다.

수석 디자이너의 옆에 서 있던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줄자를 들고 오더니 빠르게 내 몸 곳곳을 측정했다.

그런 모습을 훑어보는 게 느껴졌지만, 왜인지 호의적인 태도가 유지되고 있어서

‘아마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무리 없이 계약을 따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가 마음에 든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뭐, 그게 대수야?

“개인적으로 미스터 이와 꼭 한 번 작업해 보고 싶었어요.”

“저야 영광이죠.”

최대한 나는 사근사근 말했다. 성격 문제로 감점 당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사이즈 실측이 끝나고 내 사이즈가 적힌 종이를 받아든 수석 디자이너는 입을 열었다.

“한 번 다른 옷을 피팅 해보고 싶은데.”

“좋아요.”

“지금 사이즈랑 딱 맞는 걸로 가져다 줄게요. 잠시.”

수석 디자이너는 직원에게 귓속말로 지시를 내렸다.

‘나야 전부 다 오케이지만.’

지시를 받은 직원이 자리를 뜨고 수석 디자이너는 나를 빤히 쳐다보다 이내 다시 종이를 쳐다봤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직원으로 보이는 이들과 함께 행거 하나가 방으로 들어왔고.

“이거랑 이거.”

거침없이 행거로 다가가더니 나를 한 번 보고 옷을 꺼내 내게 건넸다.

‘익숙한 디자인인데?’

그리고 건네받은 옷이 무엇인지 확인했을 때는 조금 놀랐다. 유필리아에 대해 공부하면서 바로 전 시즌 룩북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옷이었으니까.

‘이게 또 이렇게 되네.’

하필이면 수석 디자이너가 골라준 옷이 그 옷이라니, 무슨 운명의 장난 같았다.

나는 옷을 받아들고 곧장 다른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고, 상의에 화려한 패턴이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거기에 존재감이 먹혀선 안 된다는 걸 알았다.

‘확실히 직접 입어보니까 다르네.’

룩북에 있었던 모델이 착용했던 것과도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역시 모델에 따라 달라지는 게 옷이니 어쩔 수 없지.

나만의 소화력을 보여줄 차례였다.

“어떤가요.”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방을 나오니 앉아 있었던 수석 디자이너부터 서 있던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한 데 모였다.

‘캐스팅 디렉터는 나갔나 보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좌중을 훑었다.

시선을 받는 건 익숙했지만, 확실히 나를 훑어보는 시선 자체에서 날카로움이 느껴졌고.

나는 그중에서도 수석 디자이너의 눈을 쳐다보며 가벼운 표정 연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아까와는 다르게 나지막하게 말을 내뱉었고

“한 번 걸어볼래요?”

나는 그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워킹을 하기 위한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조금 떨어져 이 정도면 됐다 싶을 정도의 거리만 벌렸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워킹을 시작했다.

음악도 없이, 그들 앞에 도착해 포즈를 취하고 주머니에 넣은 손 그대로 다시 처음 시작 지점으로 향했다.

런웨이가 아니었지만 순간만큼은 런웨이 못지않다.

“으음......”

그리고 정면을 응시하자 전과는 달리 미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침음하는 수석 디자이너가 보였다.

‘마음에 안 들었나.’

수석 디자이너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가만히 그를 응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입이 열렸고.

“한 번 더 걸어봐요.”

“네.”

그 말에 대답한 나는 방금 전과 다른 포즈를 취하며 워킹을 했다.

또다시 시작 지점으로 돌아가 수석 디자이너를 쳐다보니 아까와 다를 게 없는 표정.

‘뭐가 문제인 거지.’

침묵에 휩싸인 방의 침묵을 깨트릴 수 있는 건 오직 수석 디자이너뿐이었다.

“파워풀 하게 걷지 말고, 좀 더 남성스럽게 걸어봐요.”

“네.”

몇 번이고 그가 걸으라고 하면 걸어야 했다.

‘걷는 기회조차 안 주어지는 것보다야 낫지만.’

그렇게 나는 세 번째 워킹을 시작했다.

하지만 전과는 180도 다른 워킹. 입고 있는 의상을 생각해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앞선 워킹과는 다르게 부드러웠다.

그리고 워킹이 끝났을 때는,

“perfect!”

(완벽해!)

퍼펙트를 외치며 찬사를 하는 수석 디자이너가 보였다.

‘이거 아까 들었었던 거 같은데.’

마치 데자뷰처럼 느껴지는 모습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수석 디자이너의 얼굴이 그 누가 보더라도 환해서, 거기에 동화된 듯 나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떠올랐다.

‘완벽하네.’

나는 속으로 이번 미팅이 대성공으로 마무리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

동양인이라서 그런가.

메이크업도 진하지 않아서 그의 본연의 미를 잘 살려냈다. 천사와 악마로 나눈다면 천사 쪽에 한없이 가까울 얼굴.

“베르사체에서는 절대 안 쓸 외모지.”

하지만 그런 외모가 마크의 마음에는 쏙 들었다.

일단 자신은 베르사체 디자이너가 아니고, 마냥 구상만 하고 있었던 이미지에 가장 걸맞은 인물이 나타났으니.

왠지 모르게 영감을 샘솟게 하는 모델이었다.

가볍게 구상한 시안들도 얼추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으니까.

그러고 보니 에이전시가 하나밖에 없었던 거 같은데, 아마 한국에 있는 에이전시가 마더 에이전시가 되긴 하겠지만.

‘그전에 내가 소개시켜 줄까?’

이탈리아에 위치한 괜찮은 에이전시 하나를 주선해주면 여러모로 이득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델은 하나의 에이전시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여러 에이전시와 계약할 수 있고, 확실히 해외 활동을 하기에는 그쪽이 더 편하니까.

“조쉬, 에이전시 리디아에 연락 넣어놔.”

“네!”

개인적으로 연락을 안 한 지는 꽤 됐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서로 필요할 때 연락하는 비즈니스 관계였으니까 뭐.

“그나저나 쇼도 나쁘지 않을 거 같은데.”

사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좋긴 좋았다.

거슬리지만 않으면 되는 워킹이라 딱히 신경 쓰고 있지 않았는데, 워킹을 하는 순간 옷에 시선이 확 집중됐었으니까.

화보에서 그치지 않고 워킹도 잘한다는 말이었다.

몸 자체의 흔들림이 적고 깔끔한 워킹이 옷에 더 시선을 가게 만든 것 같았다. 워킹이 거슬리는 스타 모델에게 보고 배우라고 해주고 싶을 만큼.

아무튼, 지금은 동양인 모델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둘 때다.

‘코앞으로 다가온 F/W 시즌에 집중해야지.’

이번 시즌을 성공적으로 끝내야 다음 시즌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본격적으로 일에 들어가기에 앞서, 몸이 두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

“이틀 동안은 자유네요.”

“하루 만에 끝날 줄 누가 알았겠어.”

“시간이 없어서 그랬을걸요? 엄청 바빠 보이던데.”

워킹이 끝나고 분위기가 한층 좋아졌던 것과는 반대로 수석 디자이너는 이만 가봐야겠다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계속해서 중간중간 직원으로부터 전달사항들을 보고 받고, 충분히 바빠 보였으니까 이해했다.

‘에이전시로 연락 오겠지.’

좋은 소식 전해주겠다는 말은 잊히지 않았다.

성공적으로 마무리됐고, 나는 예진에게 어떻게 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썰 풀 듯이 얘기해줬다.

그리고 운 좋게 하루 만에 끝난 일정 덕분에 남은 이틀간은 자유시간.

숙식은 전부 유필리아 측에서 제공해 주었기에 남은 이틀은 그저 마음대로 시간을 보내면 됐다.

“그러니 당장 계획부터 짜보죠.”

모처럼 이탈리아까지 왔으니 미팅이 완전히 끝나면 가볼 맛집은 미리 찾아놨었다.

하지만 시간이 더 주어졌으니 선택지의 폭은 넓어졌고, 앞으로 무얼 할지 찾아봐야 했다.

‘호캉스? 어림도 없지.’

간만에 뭐하고 놀지 고민하면서 내 얼굴은 싱글벙글 그 자체였다.

“너 지금 완전 사고 치기 직전에 악동 같아.”

그리고 그런 나를 보면서 예진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지만, 이내 피식하고 웃더니 핸드폰을 들었고

“빨리 찾아봐요.”

우리는 착실히 핸드폰으로 검색해가며 이탈리아의 명소와 맛집을 찾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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