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chapter 83. 변하는 것들
* * *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에이전시에서 유필리아 측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
자세한 건 나중에 다시 한번 연락을 주겠다는 말에 한 달 정도를 기다리자 F/W 시즌이 끝나고 계약서가 날아왔고.
“쇼에도 서는 걸로 바뀌었네요.”
“심지어 오프닝이야, 확실하게 세우겠다는 소리지. 그리고 화보 촬영도 예상했던 것보다 스케일을 크게 하려는 거 같은데......”
강성훈 대표의 말을 경청하면서 나는 계약서를 비롯한 자료들을 확인했다.
‘큰 문제는 없는 거 같고.’
오히려 문제라고 할 게 아니라 희소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차피 예정되어 있던 활동에 비중이 더 커진다면 환영할 만할 일이니까.
“전부 다 확인했고, 알겠어요. 그대로 진행하시면 될 거 같아요.”
“그럼 바로 계약하는 걸로 하고, 아 맞다. 아직 하나 남아 있는게 있는데.”
“뭐죠?”
“유필리아에서 에이전시 하나를 소개시켜 주겠대. 리디아라고 이탈리아에 위치한 에이전시야.”
리디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수석 디자이너가 해외에도 에이전시를 두는 게 좋다면서 언급을 했었는데, 에이전시를 소개시켜줄 생각이었나 보다.
‘아직 안 찾아봤는데.’
유필리아와의 일이 성사되었으니 이제 다른 에이전시와 계약을 하는 것도 시기가 적절했다.
“해외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려면 다른 에이전시랑 계약하는 게 훨씬 나아.”
“네. 안 그래도 생각해두고 있긴 했어요.”
모델은 여러 에이전시와 계약할 수 있다. 물론 그중에서 제일 먼저 계약한 곳이 보통 ‘마더 에이전시’가 되면서 다른 에이전시와 연결시켜 준다.
지금 내 마더 에이전시는 데마시아 일 테고.
여러모로 자국에 있는 에이전시가 일을 따내기에 쉽기에, 처음부터 해외 에이전시를 찾는 이들도 많았다.
리디아, 한 번 알아봐야겠네.
“일단 따로 고민해야 봐야 할 거 같아요. 당장 결정하기에는 어려워서요.”
“천천히 생각해 봐. 그리고 여기 리디아 에이전시 관련 서류고, 이건 우리 쪽에서 따로 알아본 에이전시들이니까 한 번 쭉 봐봐.”
“감사합니다.”
강성훈 대표가 종이 뭉치와 서류를 내게 건네주었다,
‘일은 제대로 하네.’
두께가 꽤 있는 게 아무래도 열심히 봐야겠지만, 확실히 도움이 됐다.
에이전시 하나 잘못 만났다가 호되게 곤욕을 치를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였다.
“일단 첫 해외 활동이 이탈리아라서 유럽 쪽 에이전시들 위주로 조사하긴 했어. 하지만 계약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당연한 소리였다.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의 강성훈 대표를 보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단순히 내가 계약하고 싶다고 해서 계약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원하는 에이전시가 생긴다면 거기서도 나를 원할 때까지의 과정을 또 거쳐야 했다.
“일단 힘써줄 수 있는 곳까지는 최대한 푸쉬해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감사해요.”
“이 정도로 뭘, 이제 나가봐도 돼.”
드디어 대화가 끝났다.
오랜만에 강성훈 대표와 만나는 거였지만 그에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시간이 훌쩍 지났으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그래도 이탈리아에 다녀온 후로는 꽤 괜찮은 일들만 골라서 해서 스케줄이 조금 줄었는데, 당장 몇 달 뒤면 일이 넘쳐날 거 같았다.
그렇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내려오자 사무실로 들어가니 예진과 실장이 함께 있는 게 보였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는지 나를 발견한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다가왔다.
“끝났나 보네. 내일 앤즈 인터뷰 있는 거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어요.”
“오케이 그럼 수고하고. 어차피 잘 할 거 아니까 딱히 말하진 않을게. 잘 가~”
“안녕히 계세요.”
나를 보는 실장의 얼굴은 아주 환한 게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보다.
그에 비해 예진의 표정은 평소와도 같았지만,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그대로 예진과 함께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제는 익숙하네.’
하도 자주 와서 그런가,
아니면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 그런가.
주차장으로 향하는 이 광경이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었다.
“집으로 바로 갈까?”
“네. 집으로 바로 가주세요.”
오늘 할 일은 에이전시에 들리는 것밖에 없었는데, 주성훈 대표를 만나서 기가 다 빨린 느낌이었다.
‘조금 피곤하네.’
최근 생긴 취미라고는 하나도 없이, 늘은 거라고는 잠밖에 없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차에서는 엄청 피곤하지 않는 한 안 자기로 혼자 다짐했고, 그때마다 나를 본 예진이 운전을 하면서 말을 걸어왔는데.
그럴 때마다 여태껏 차만 타면 잤었던 내가 떠올랐다.
미안해할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종종 자지 않고 대화하니 나쁘지 않았고.
“집에 가서 뭐 할 거야?”
“음, 숙제가 생겨서 아무래도 공부해야 할 거 같긴 한데 아무래도 뒹굴거리지 않을까요?”
“뒹굴거리는 것도 중요하지.”
이어지는 내 말에 예진이 열심히 뒹굴 거리라며 응원했다.
장난으로 말을 주고받자 얼마 안 있어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고, 예진이 차에서 내리려고 하길래 그걸 말리고 혼자 내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차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인 게 보여 나는 차 쪽으로 손을 휘적거리며 인사했고.
‘아, 집이다.’
집에 들어서자 밖에서 돌아다닐 때와는 다르게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은 대충 식탁 위에 올려둔 채 옷을 하나둘씩 허물 벗듯이 벗었고.
“일단 씻고 누워야지......”
눕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들었기에 일단 받아온 것들은 누워서 한 번 읽어볼 생각이었다.
‘일단 씻어야지.’
걸음을 옮겨 그대로 화장실로 직행했다.
****
“후우......”
해외 에이전시에 대한 정보는 단순히 인터넷 서칭만으로는 알아내기 어려웠다.
인터넷에도 뭐 잘만 찾아보면 나와는 있겠지만, 일단 찾는 과정 속에서 대놓고 나와 있는 게 아니라 나와 있는 정보들을 취합해야 했으니까.
덕분에 데마시아에서 준 것들이 도움이 많이 됐다.
‘리디아도 괜찮고, 파논도 좋은 거 같은데.’
리디아는 일단 유필리아에서 소개시켜준 것도 소개시켜준 거지만, 에이전시 자체가 소속 모델들도 동양인도 좀 있고 활동도 많이 하는 것 같았다.
파논 같은 경우에는 자세한 건 없었지만 소속 모델들만 보더라도 꽤 관심이 가는 에이전시여서.
비록 전부 서양인이었지만 떠오르는 모델부터 시작해 유명 모델들까지 다양했다.
‘문제는 그런 곳이 나를 받아줄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일단 한 번 얘기라도 꺼내 보는 게 낫다고, 일단 에이전시는 리디아와 파논으로 추리고 따로 또 인터넷으로 찾아볼 생각이었다.
“나중에 한 번 더 찾아보고.”
한 번 무언가를 하면 몰두하는 타입이어서 장장 세 시간을 읽고, 비교하는 데 썼다.
뻐근한 목을 돌리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고.
‘7시네.’
시간을 보니 뭘 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뭐 먹지.”
냉장고에 들어 있던 것들을 생각하다가 이내 딱히 먹을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연스럽게 핸드폰 배달 앱을 실행시켰다.
메인에 걸려있는 치킨이 잠시 눈에 띄긴 했지만, 최소한의 양심이 남아 있기에 샐러드 카페에 들어가 메뉴를 눈으로 훑었다.
‘샐러드만 시키기엔 아쉬우니까.’
샌드위치도 하나도 시켰다. 요즘에는 샐러드도 비싸.
주문이 완료됐다는 알림이 뜨자 그대로 배달 앱을 나갔다.
SNS에 잠깐 들어갔다가, 제대로 누운 채 손가락만 까딱여 너튜브에 들어갔는데.....
“맞다. 송이 웹드라마 나오지 않았나.”
전에 피드에서 송이가 올린 게시물을 봤었던 것 같았다. 그때는 촬영하고 있어서 못 봤지만.
‘근데 제목이 뭐였더라, 가물가물하네.’
최근 연락이 뜸해진 게 아무래도 촬영도 하고 그러다 보니 바쁜 것 같았다.
그동안 자잘한 안부 인사나 하는 게 다여서 그런지 송이도 내게 딱히 캐톡으로 웹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결국 송이의 SNS에 들어가 웹드라마 제목을 알아낸 나는 너튜브에 제목을 검색했다.
그러자 제일 상단에 뜨는 동영상은,
‘300만?’
무려 300만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고작 1화 하나 올라와 있는데.
여주인공 친구 배역이라서 그런지 썸네일은 송이가 아니었지만, 영상에는 조금 비중 있게 출연했다.
“...... 연기 잘하네.”
그 사이 샐러드와 샌드위치가 도착하고, 영상을 보면서 먹으니 어느새 싹 사라져 있었다.
뭔가 송이가 연기하는 걸 보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가 기분이 싱숭생숭 한데.
초등학교 시절 송이의 모습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런데 뭐지. 확실히 크긴 컸나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느껴지네.’
“연락이나 해봐야겠다.”
1화는 올라온 지 꽤 됐지만, 그래도 아예 연락 안 하는 것보다야 나을 거다.
나는 영상 중에 송이가 제일 잘 나온 장면을 하나 캡처해서 사진과 함께 캐톡을 보냈고.
: (사진)
: 뭐야 연기 왜 이렇게 잘해. 너 때문에 여기 채널 구독까지 해놨다ㅋㅋ 화이팅!
사라지지 않는 1을 확인하다가 이내 너튜브의 다른 영상들을 보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