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chapter 85. 기회가 주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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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즌 런칭은 9월. 그러니까 적어도 8월 한 달 내내는 이탈리아에 있어야 했다.
룩북 촬영과 에이전시 계약 건으로 들러야 하는 곳도 있고 덕분에 우리는 조금 일찍 이탈리아로 출발하기로 했다.
며칠 쉬면서 가족들과도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아무래도 해외 활동이 잘 풀리면 부모님한테 집 하나 해드리고 싶고.
사람들은 다윤이 속을 많이 썩일 것 같다고 그랬었는데, 부모님의 걱정을 보면 정작 속을 썩이는 사람은 나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탈리아로 떠나는 당일, 짐이 가득 든 캐리어들을 이끌고 가족들과 공항에 도착했고.
“그럼 이제 한 달 동안은 아예 못 보는 거네.”
“어쩌면 그것보다 더 길어질 수도 있어. 혹시 모르니까.”
“...... 연락이나 많이 해. 캐톡으로 영상 통화 걸 테니까 받고.”
“시차 봐가면서 연락할게.”
“아오 그래라, 그래.”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슬슬 한계치였는지 다윤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걸 보면서 나는 가볍게 어깨를 한 번 으쓱해줬고.
‘좀 아프네.’
결국 한 대를 맞았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예전과는 다르게 힘이 좀 실린 게 앞으로 좀 사려야 할 거 같은데.
“잘 다녀오렴. 다치지 말고 아프지 말고...... 밥도 잘 챙겨 먹어야 돼.”
“알겠어요. 무려 호텔인데 삼시 세끼 든든하게 안 먹을까요.”
“이 녀석이?”
“물론 우리 아빠가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지만!”
급하게 뒷말을 붙이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도 얕게 미소 지었다.
한 달 동안 머물 숙소가 전부 호텔이 아닐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잘 챙겨 먹겠다는 말은 이루어질 수 없지만.
‘하얀 거짓말도 필요한 법이니까.’
도착하는 대로 빡세게 관리할 예정이었다.
“우리 아들 모쪼록 잘 좀 부탁해요.”
“걱정하시는 일 없도록 제가 옆에서 잘 챙기겠습니다.”
챙기긴 뭘 챙겨.
그렇게 예진과도 짧은 대화를 마친 후, 공항까지 배웅하러 나온 가족을 뒤로 한 채 비행기를 타러 갔다.
‘드디어 출발.’
이탈리아에 갔었던 게 불과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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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프다.”
“그러게 라면 그냥 먹지 그랬어요.”
“넌 못 먹는데 옆에서 라면 냄새나면 좀 그렇잖아.”
“저 때문이었어요?”
비행기에서 내리고 짐을 찾으면서 예진이 하는 말에 나는 살짝 놀라 그녀에게 반문했다.
‘나 때문에 안 먹은 줄은 몰랐는데.’
저번과는 다르게 비즈니스석으로 와서 라면 같은 거야 충분히 요구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유필리아에서 전부 부담했을 경비를 에이전시 리디아에서도 보태준 덕에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 시켜주었고 비싼 데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안락한 서비스.
다리를 쭉 펼 수 있는 공간 그리고 제공되는 기내식의 질이 달랐으니까.
내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예진이 그대로 내 짐을 빼앗아갔다.
순식간에 캐리어 하나를 빼앗긴 나는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도 내가 들겠다고 다시 빼앗아 오려고 했지만 실패에 그쳤고.
아무렇지 않게 내 짐을 가져간 예진은 택시 타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나름 두 번째 방문이라고 익숙해진 공항은 처음과는 다르게 낯설지 않았다.
“...... 여기도 엄청 좋아 보이네요.”
“그러게.”
우리는 택시에서 내렸다.
첫 일정이 리디아 에이전시 방문으로 잡혀 있었던 탓에 저번과는 다른 호텔이었지만 역시나 호텔은 호텔이었다.
처음 외관으로 보기에는 큰 곳이 아니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외관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었다는 듯 번쩍거렸으니까.
‘서비스도 좀 더 좋은 거 같고.’
붙임성 있게 말을 걸어오는 남자 직원의 말에 적당히 대답해 주면서 그대로 방까지 안내받고 내부를 소개받았다.
당연히 배정된 방은 서로 옆방.
짐을 대충 방에 둔 우리는 곧장 밥을 먹으러 식당으로 향했다.
“...... 맛있겠네요.”
“첫날이니까 많이 먹어.”
“누나야말로 저 때문에 못 먹지 말고 많이 먹어요.”
지금도 나를 배려한답시고 고기류나 냄새가 나는 음식들은 안 가져온 게 눈에 보였다.
내 말에 찔리는 게 있는지 예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샐러드와 과일로 이루어져 있는 접시를 보면서 포크를 움직였다.
저번에는 그래도 이탈리아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지만 이제 내 신세는 다시 샐러드만 먹는 신세.
‘앞으로 식사는 각자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그렇게 되면 또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서 접었다. 나중에는 그냥 혼자 방 안에서 먹던가 해야지.
예진이 몇 개의 음식을 더 가져오는 동안, 나는 음료수로 목을 축이면서 기다렸다.
식사를 다 마치고 난 후에는 다시 각자의 방에 들어가 짐을 풀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팩을 한 무더기 챙겨온 나는 씻고 난 뒤 바로 얼굴에 팩 하나를 붙였다.
“해외 에이전시는 너무 오랜만이라...... 설레는데.”
직접 한 번 만나 보고 싶다는 제안이었기에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아마 내일 리디아 에이전시에 들릴 거다.
그 만남은 계약의 여부로 직결될 게 분명하지만, 사실 이미 호의로 시작된 만남이어서 웬만하면 성사될 거 같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이해지면 안 되지.’
만전을 기할 생각으로 나는 일찍 잠에 빠져들었다.
****
낯선 거리, 인종이 다른 사람들.
이곳이 대한민국과 확연히 다르다는 건 그저 길거리만 걸어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리디아 에이전시가 있는 건물에 도달하기까지 주위를 둘러보면서 낯선 공간을 눈에 담아냈고, 건물 내부로 진입하자 보안 요원이 다가왔다.
“무슨 일로 방문하셨죠?”
“모델 계약, 미팅 일로 방문했어요.”
“이름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연 리예요.”
그리고 통과한 우리는 비로소 건물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
로비에 미리 마중을 나온 직원을 따라 대표실로 향했으며 예상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진행됐다.
대표는 대체로 서글서글한 인상이었지만 내게 질문을 하다가도 몇 개의 질문을 예진에게 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고.
“남은 1년 동안 데마시아에서는 우연을 해외 활동 위주로 할 생각인가요?”
가볍게 꺼낸 말이었지만 그 말의 무게를 알기에 예진은 에둘러서 대답했다.
‘예진은 데마시아의 사람이니까.’
그래도 문제없이 대처하는 예진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가만히 있었다.
그렇게 성사된 계약.
물론 부모님의 동의와 데마시아 에이전시가 또 검토하고 계약을 맺겠지만 일단 성사된 계약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우연의 두 번째 에이전시가 되어서 기쁘네요. 첫 스타트가 유필리아라는 것도 좋고요.”
“운이 따랐죠.”
“으음, 제가 여태껏 많은 동양인 모델을 봤지만 우연처럼 나이가 어리고, 스타트가 좋은 경우는 많이 보지 못했어요. 그리고 유필리아는 지금 주가가 치솟고 있으니까.”
“칭찬 감사합니다.”
계약 이야기 이후에도 우리는 대화를 이어갔다.
이를테면 리디아 에이전시에 대해서라던지, 나에 대해 생각한 리디아 에이전시의 생각이라든지.
물론 앞으로의 활동을 짧게 언급하면서 ‘가능하다면’이라는 전제를 붙여서 말했지만
‘그건 아마 데마시아를 생각해서겠지.’
내 마더 에이전시가 일단 데마시아이다 보니 리디아에서는 활동을 확정 지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계약 기간이 짧았던 탓에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데마시아와의 계약은 끝나고, 리디아 에이전시와의 계약은 이어질 테니......
‘나중에 생각해 봐야 하지 이것도.’
그렇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도중 불현듯 처음 듣는 얘기 하나가 튀어나왔다.
“아직 확정된 건 없지만, 이번 밀라노 패션위크에 유필리아 브랜드가 들어선다는 말도 있다는 거 정도? 저번 시즌 반응이 꽤 좋았어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밀라노 패션위크?’
세계 4대 패션위크로 꼽히는 밀라노 패션위크가 여기서 왜 나와.
당연히 많은 브랜드에서 쇼를 열지만 내가 알기로 유필리아는 이번 시즌 패션쇼를 기업과 콜라보로 해서 크게 따로 연다고 들었었다.
그런데 밀라노 패션위크라니.
“아마 이틀 뒤면 결정 나겠네요. 사실 내부 사정이 있어서 그 자리를 유필리아가 대체하는 거라고 하지만, 아마 유필리아가 제일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요?”
어쩐지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는데, 유필리아 쪽도 아직 정해진 게 아무것도 없나 보다.
‘확정되면 불똥 떨어지겠네.’
하지만 괜스레 기대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원래 패션쇼에는 나도 서기로 했었으니 만약 그게 밀라노 패션위크로 바뀐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며 우연도 밀라노 패션위크에 설 가능성이 있죠.”
“...... 그렇다면 정말 좋겠네요.”
“맞아요. 그보다 더 성공적인 데뷔는 없을 거예요.”
마치 내 속마음을 들춰낸 듯한 말에 나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 이후로는 무슨 말을 더 이어나갔던 거 같은데, 기억에 남는 건 하나도 없었다.
내 기억에 남은 건 오직, ‘밀라노 패션위크’뿐.
한 5분 정도 더 대화하고 나서야 자리가 파했고, 우리는 리디아 에이전시를 빠져나왔다.
이틀 뒤면 딱 유필리아에 방문해야 하는 날이니 아마 어떻게 되는 건지 들을 수 있겠지. 그런데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창문에 머리를 쿵 하고 박은 나는, 옆에서 들려오는 예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채 창밖을 응시했다.
기회의 땅이라더니, 정말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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