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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살아가는 법-87화 (87/137)

〈 87화 〉 chapter 86. 물만 마셔도 살 수 있나요?

* * *

“어떻게 됐을까요. 설마 결과가 아직도 안 나온 건 아니겠죠?”

“일단 진정해.”

“충분히 진정한 상태예요. 아마 이보다도 더 진정할 순 없을걸요.”

“내가 봤을 땐 오늘 거기서 말해줄 거 같아.”

하긴. 지금쯤이면 뭐든 간에 유필리아 측도 전달받은 게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봤고, 익숙하지 않은 장소들이 빠르게 바뀌어 가는 걸 보면서 마음을 진정시켰다.

지금 우리의 목적지는 유필리아 브랜드의 본사.

이전에도 한 번 갔었지만 고작 한 번만으로 익숙해지진 않았다.

‘앞으로는 익숙해지겠지?’

미팅 시간이 나름 넉넉한 오후 시간대였으나 오히려 그 시간까지 기다리면서 궁금증만 더 가증되고야 말았다.

예진이 혹시나 해서 데마시아에 연락해 봤지만 그쪽도 딱히 들은 건 없다고 하고.

물론 나온 결과가 안 좋을 수도 있기에, 먼저 밀라노 패션위크에 대해서 언급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 위상이 위상인 만큼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기에

어떻게든 나에게 말을 해주리란 걸 알고 있었다.

“저 모자 잘 씌워져 있죠?”

“응. 내리고 나서 한 번 더 봐줄게.”

“고마워요.”

오늘 패션의 포인트는 모자.

당연히 유필리아에서 제작한 모자였고, 옷들은 유필리아의 것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코디하느라 신경 좀 썼지.’

내가 아니라 데마시아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고생했겠지만 그래도 모자를 고른 건 나였다.

이번 방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확정된 콘티를 받으면서 대화를 나누고, 일정을 확정 짓는 것뿐.

하지만 오랜만에 유필리아의 수석 디자이너를 만나다 보니 아침부터 지금까지 물만 먹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얼굴에는 붓기 하나 없는 게 최상의 컨디션이었고.

“도착했습니다.”

“고마워요.”

택시가 멈춰 서자 예진이 택시비를 지불하고 우리는 내렸다.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모자를 점검한 뒤 우리는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고, 이번에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로비에 있던 직원을 따라 어딘가로 이동했다.

‘저번이랑은 다른 곳인가 보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층수 자체가 다른지 낯선 풍경이었다.

그렇게 안내받은 곳으로 들어가니 넓은 내부 공간과 가운데 놓여져 잇는 탁상, 소파들이 보였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가 자리를 잡았다.

“마실 것들 가져다드릴게요.”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약속한 미팅 시간 5분 전.

우리를 안내해준 직원이 마실 걸 가져다주겠다면서 자리를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문이 열렸다.

그리고 들어오는, 기억 속과 전혀 다른 차림의 마크 바이에른.

수석 디자이너의 뒤를 따라온 다른 이들이 줄줄이 들어오면서 탁상 위에 파일들을 올려놓고, 행거를 놓고 옆에 섰다.

“오랜만이에요 우연.”

“다시 만나 뵙게 돼서 영광이네요.”

“별말씀을.”

능청스럽게 인사한 수석 디자이너가 예진과도 짧게 인사하더니 이내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마실 걸 가지러 갔었던 직원이 들어와 우리의 앞에 하나씩 커피를 놔주고, 목을 가볍게 축이자 수석 디자이너는 탁상 위에 올려져 있던 파일 중 하나를 집어 들어 펼쳤다.

‘콘티네.’

촬영을 위한 컨셉, 각도 등 옷들이 찍힌 시각적인 자료와 함께 디테일들이 적혀 있었다.

그중에서도 수석 디자이너는 전부 다 설명할 건 아니었는지 중요해 보이는 몇 개의 옷들을 가리켜 가면서 설명했고, 나는 그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렇게 대략 콘티 설명이 끝났을까.

내 사이즈를 한 번 실측하겠다면서 줄자로 재더니 행거에 걸려 있던 옷들을 대보면서, 옷을 두 번 갈아입었다.

“다른 건 담당 디렉터한테 물어보면 될 거고, 아마 그녀가 다 해줄 거예요. 관리는 지금도 잘하고 있는 거 같긴 한데 여기서 살 좀 더 뺐으면 좋겠네.”

자세를 바로 앉은 수석 디자이너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도 나쁘진 않지만 나쁘지 않은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거예요. 이번 F/W 패션쇼가 갑자기 밀라노 패션위크로 바뀌면서 모델들을 갈아엎자는 얘기도 나왔으니까.”

그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예진이 입을 떼려고 했지만 막혔다.

수석 디자이너의 말은 끝나지 않았고, 그런 그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머리 아픈데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니까. 우연은 내가 강력하게 주장한 덕에 그대로지만 아직 밀라노 패션쇼에는 확정되지 않았어요.”

결국 유필리아 브랜드가 밀라노 패션위크 브랜드에 선정됐다는 말이었다.

계약서가 있긴 하지만 거기엔 ‘밀라노 패션위크의 패션쇼’라는 게 명시되어 있지 않았고, 아마 서게 된다면 다시 따로 또 계약을 해야 할 게 분명했다.

사실 계약 자체도 유필리아에서 위약금을 물고 파기하면 그만이지만, 다행히도 수석 디자이너가 나선 모양.

“다음 주 중으로 유필리아에서 밀라노 패션쇼에 설 모델 오디션을 열기로 했는데.”

이미 대부분의 모델들은 다 계약한 상태다. 그중에 좋은 모델들은 독점이나 오프닝을 맡은 곳들이 있을 테고.

하지만 밀라노의 이름값이 만만치 않다 보니 괜찮은 모델들이 모여들겠지.

“어때? 오디션 볼 생각 있어요?”

순식간에 쏟아져 나온 정보들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여태껏 궁금해했던 모든 것들의 답이었다.

애초에 신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수석 디자이너의 입김 덕분이고.

‘오디션?’

밀라노 패션쇼에 서기 위한 오디션이라니.

그 까짓거야 뭐, 100번이라도 볼 수 있다.

“상관없어요. 패션쇼에 설 수만 있다면 오디션쯤이야.”

“좋아요.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네요.”

흔쾌히 긍정의 답변을 내놓자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수석 디자이너의 눈빛이 조금 너그러워졌다.

이에 관련해서 데마시아를 비롯해 리디아 쪽에도 연락이 갈 거고.

아무튼 간에 수석 디자이너는 원하던 답을 들은 것인지 흡족한 표정으로 나중에 보자며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그가 나가자마자 뒤에 서 있었던 여자 한 명이 소파에 앉아 자기가 담당 디렉터라며 일정을 조율하기 시작했고.

당장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촬영 일자와 함께 다음 주 월요일부터 잡혀 있는 오디션 일자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앞으로 물만 마셔야겠네.’

몸무게 상의 변화는 일절 없었지만, 나를 위아래 훑으며 말한 수석 디자이너의 말을 되뇌었다.

여기서 살을 더 빼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거 같은데.

동양인 모델이라는 것이 이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사실 마른 몸이라는 걸 알았다.

그렇게 디렉터와의 대화를 끝마치고 미팅이 전부 끝나자 파일을 챙겨 예진과 함께 건물을 나왔고.

택시를 기다리면서 나는 입을 열었다.

“저 오늘부터 다이어트하려고요.”

일단은 오디션을 볼 때까지.

그 이후로는 시즌이 끝날 때까지.

나는 다이어트를 선언했다. 앞으로 예진은 혼자 밥을 먹어야 할 듯싶었고.

****

“그 머플러 당장 다른 걸로 바꿔. 회의 1시간 앞당기고.”

“알겠습니다.”

“그래서 내 커피는 언제 오는 거지? 사오다가 죽었나?”

때마침 문을 열고 커피를 사러 갔던 이가 들어왔다.

마크는 그런 남자를 한 번 더 갈궈주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포스트잇으로 표시되어 있는 역대 F/W 패션지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밀라노 패션위크.

유필리아 브랜드를 이적하고 나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밀라노 패션쇼다.

그리고 그 패션쇼는 곧 마크의 얼굴이고, 마크의 얼굴은 그 패션쇼였으니.

마크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유필리아가 단숨에 치고 올라온 브랜드라곤 하지만 가만히 있던 이사를 포함한 몇몇 이들이 간섭하기 시작했고

‘자기들이 패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들이 기웃거릴수록 짜증만 날 뿐이었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건 CEO 정도였지만.

“할 게 너무 많아.”

보지 않아도 스케줄 표는 빼곡하게 채워져 있을 게 뻔하다.

‘아, 모델도 정해야 하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 만났었던 우연에 대한 감상이 떠올랐다. 사실 이제 우연이 신인이건 말건 간에 마크에게는 상관없었지만

그가 신인이라는 이유로 캔슬 시키려 했던 이사를 말리느라 좀 귀찮긴 했었다.

우연에게는 이번 컨셉에 딱 맞는 옷이 있었고, 그걸 다른 모델이 소화해내려면 또 귀찮은 일을 감수해야 하니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모델이야.’

물론 밀라노 패션위크에 서는 것과는 별개의 가치가 될 것이다.

그의 워킹이 좋고 컨셉이 맞다고 해도 오디션을 안 본다고 하면 밀라노 패션쇼에는 서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그가 오디션을 본다고 했으니.

패션쇼에 설 모델은 자신을 포함한 다른 이들이 심사해 뽑지만, 글쎄 앞으로 딱히 편을 들어줄 생각은 없어도

그 모습 그대로라면 아마 충분히 대상에 포함될 것 같았다. 신인이라는 꼬리표 없이.

“피날레 의상 지금 가져와 봐. 좀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마크에게 있어 패션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

베르사체를 나오면서 했던 목표들을 실현 시키기 위해서 못할 것이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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