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chapter 87. 좋아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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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해야 할 일들을 다해서 그런가.
오후 9시가 다 되어가는 애매한 시간에 딱히 가야 할 곳도, 해야 할 것도 없어서 심심했다.
내일부터는 이틀 연속으로 룩북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고, 그 다음날에는 바로 또 오디션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으니
‘그걸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쉬는 게 맞긴 한데.’
뭔가 지금은 놀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들었다.
침대 바로 옆에는 유필리아에서 받아왔었던 파일이 놓여져 있었지만 건드리고 싶지 않았고, 오늘만 해도 두 번 이상 정독, 구상과 시뮬레이션을 마쳤으니까.
“너튜브나 볼까.”
침대 위에 몸을 비스듬하게 눕힌 나는 핸드폰을 들었다.
잠금을 풀고 들어가자 대부분의 핸드폰 알림을 꺼놔서 그런지 홈화면이 깔끔했고.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대로 영상 몇 개를 보다가 금새 흥미가 떨어졌다. 구독해놨던 채널들 마저도 그다지 보고 싶은 영상이 몇 개 없기도 했고.
그렇게 누워서 영상 두어 개정도 봤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너튜브를 나가고 SNS에 들어갔다.
‘좋아요나 눌러줘야지.’
피드에 새로 올라온 몇 안 되는 게시글들을 살피면서 좋아요를 눌렀다. 그리고 내 피드를 살펴보는데 딱히 올릴 사진도 마땅치 않고,
‘라이브 방송이나 켤까?’
충동적으로 든 생각이었지만 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었다. 에이전시에서도 SNS는 활발하면 활발할수록 좋다고 했었으니까.
“한국은 지금 몇 시지?”
앞으로 바빠질 걸 생각하면 지금 라이브를 잠깐 켜서 소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제 곧 있으면 모델도 성수기. 사실 비수기라고 해서 바쁘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성수기는 여기저기서 모델들을 찾기 일쑤였으니까.
시차를 보니 여기가 7시간 빨랐다. 아마 한국은 낮 시간대일 테고.
아주 짧은 고민 끝에 나는 라이브 방송을 실행시켰다.
“안녕하세요.”
뭐야 갑자기 라이브 방송??
알림 떠서 깜짝 놀랐음 ㄹㅇㅋㅋ
안녕!!! 안녕하세요!!
예고 좀 해주세요 ㅠㅠ
가벼운 인사를 시작으로 다음 말문을 트는 건 어렵지 않았다. 꽤 오랫동안 라이브 방송을 안 켜서 질문들을 비롯한 말들이 채팅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으니까.
지금 타지에 있기도 하고, 또 오랜만에 라이브 방송을 켜서 소통하다 보니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이탈리아 음식 중에서 어떤 게 입에 맞았었고, 지금은 관리를 하느라 잘 안 먹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자꾸 생얼만 보여줘서 좀 그런가? 다음에는 메이크업한 상태로 사진 올릴게요.”
오히려 좋아
둘 다 조음 ㅇㅇ 올려주기만 하세요
한국 언제와여 ㅠㅠ
거기는 지금 몇 시예요?
“아무래도 한 두 달? 정도는 여기 있을 거 같아요.”
물론 오디션에 합격해서 밀라노 패션쇼에 선다는 가정 하에 두 달이지만,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게 분명했기에 구태여 덧붙여서 말하지는 않았다.
몇몇 이야기들은 조심스럽게 꺼내거나 아예 꺼내지 않았고.
어떻게 보면 일방적인 소통이었지만 채팅창을 보면서 몰입해 읽느라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지나갔다.
‘더해서 내 기력도 딸리고.’
몸에 에너지가 없다 보니 조금 지치는 게 느껴졌지만 그런 게 대수겠는가.
나에게 어떤 브랜드가 잘 어울리는지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채팅창을 보면서 흐뭇하게 웃었다.
지금 나온 브랜드들 전부 한 번씩은 모델로 서보고 싶네.
간간이 성희롱이나 안 좋은 댓글로 분탕을 치러 온 이들이 보였지만 무시했다. 전부 빠르게 차단됐고,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보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걸 알았다.
“저는 이만 자러 가봐야 할 거 같아요. 다들 남은 하루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거 시간 연장하는 거 어딨냐.
후원창 없냐고 젠장.
형도 잘 자구 제 꿈 꾸세여ㅜ
라이브 제발 자주 켜주기
낮 시간대여서 사람들이 많이 안 들어올 거라는 내 예상은 어긋났다.
오히려 국적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들어온 덕분에 조금 정신없었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한국어로 된 채팅을 읽는 건 참을 수 없지.
“팬카페에도 한 번 들어가 보려고 했는데.”
라이브 방송이 끝나자 손가락 하나조차 까딱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팬카페는 예전에 단 한 번 들어가고 들어가질 않아서 한 번 들어가 볼 심산이었는데.
잠은 그렇게 오지 않았지만 몸에 축 처지는 게 이대로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있으면 잠에 빠질 것 같았다.
결국 한 5분 정도를 침대에서 밍기적거리다가 씻기 위해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고.
“알림 맞춰놔야지.”
씻고 나오자 몸이 더 노곤노곤해져서 지금 자는 걸 대신해 내일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렇게 원래 맞춰 놓을 시간보다 한 시간 정도 일찍 알람을 맞추고 수마에 빠져들었는데.
지이이잉ㅡ 지이잉ㅡ
“...... 뭐야.”
진동 소리에 잠에서 깨 핸드폰을 들었더니, 예진의 이름과 함께 오른쪽 상단에 적혀 있는 숫자, 그러니까 시간이 보였다.
‘근데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7시라고? 분명 5시로 알람을 맞춰놨는데.
나는 그대로 예진의 전화를 받으면서 화장실로 뛰쳐들어갔다. 나중에 보니까 오후와 오전을 깜빡하고 바꾸지 않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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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진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십년감수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에.”
“그러니까요.”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스튜디오 촬영장 안으로 들어갔다. 일찍 오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늦게 오지도 않았기에.
일단 헤어 메이크업도 받고 옷도 갈아입어야 해서, 스탭이 안내해준 곳으로 가자 어쩐지 익숙한 얼굴의 남자가 보였다.
‘...... 라이?’
라이는 탑모델들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로 유명한 남자였다.
기억 속에 있는 이미지와는 다르지만 얼굴을 보아하니 맞는 거 같은데.
“바로 메이크업 시작할게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시간 여유가 없어서 그런지 내게 다가온 남자는 능숙하게 메이크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옆에서 다른 메이크업 아티스트들도 같이 하고 있었지만.
‘먼저 물어볼까?’
내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다행히도 남자 쪽에서 먼저 내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제가 메이크업 해온 모델들과는 이미지가 달라서 굉장히 색다르네요. 혹시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한국인이에요. 그 혹시, 라이 맞나요?”
“오 맞아요! 어린 소년이 알아봐 준다니 감동이네요.”
그러면서 과장되게 표현하는 라이를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웃었다.
분위기가 풀린 덕인지 간간이 다른 메이크업 아티스트들과도 대화를 나누어 봤지만 라이 특유의 분위기를 휘어잡는 말솜씨에 그를 중심으로 대화가 이루어지곤 했다.
그리고 그 대화의 주제가 내 얘기이기는 했지만.
‘유필리아에서 이 갈았나 보네.’
라이의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포토그래퍼가 사전에 누군지 전달받은 나로서는 확실히 유필리아가 이번에 칼을 갈았다는 걸 알아챘다.
평소에 내가 받던 메이크업보다는 조금 더 진한 메이크업.
첫 번째 의상과 어울리는 메이크업이 완성됐고, 첫 번째 착장으로 전부 갈아입은 뒤 촬영장으로 향하자
“잠시만요, 여기 핏 좀 다시 한번 잡을게요.”
한걸음 내딛음과 동시에 유필리아에서 나온 디자이너가 내게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점검을 마친 뒤에야 본격적인 촬영에 착수했고.
조명들 때문에 포토그래퍼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오로지 카메라만을 응시한 채 무표정한 얼굴로 포즈만 바꿔갔다.
브랜드 룩북을 비롯해서 해외 패션지들에서 모델들은 절대 웃지 않았고,
그 이유는 일단 무표정한 얼굴이 옷에 더 집중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모델의 이미지를 쌓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허리 조금 더 앞으로.”
포토그래퍼 로버트는 간간이 지시를 내리면서 신중하게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내가 포즈를 완성시켜도, 그는 자리를 옮겨가거나 각도를 바꿔가는 등의 행동으로 사진을 찍어나갔다.
서로의 페이스가 철저히 유지되는 촬영.
그렇기에 촬영 시간은 줄어들지 않았고, 예정되어 있던 시간을 채워 한 의상당 여러 번의 촬영이 진행됐지만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최고의 결과물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하지만 촬영이 지속되는 동안의 피로는 어쩔 수 없는지, 오랜만에 한 촬영이라 기가 빨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촬영 다시 들어갈게요!”
나는 내 일을 좋아한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라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점검한 나는 촬영장으로 또다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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