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chapter 89. 당돌한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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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 오디션.
패션쇼에 서기 위한 모델들을 뽑는 과정이었다. 하지만 말이 오디션이지 사실상 이미 몇 명은 내정되어 있는 이들도 있었고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뽑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패션쇼가 한 달이 채 안 남은 지금.
웬만한 톱모델들은 전부 계약을 마친 후라고 봐도 무방했으니 꽤 다양한 모델들이 유필리아 오디션에 지원했다.
프리랜서 모델들을 포함해 독점 계약을 하지 않은 모델부터 에이전시 측에서 밀고 있는 신인,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진 기성.
모델의 수가 적은 건 절대 아니었다.
무려 ‘밀라노 패션위크에 선정된 브랜드’의 패션쇼 아닌가.
“89번!”
이제 곧 내 차례네.
나는 91번이라고 적혀 있는 번호표를 한 번 힐끔 보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89번으로 보이는 남자가 일어나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갔고.
나름 그래도 유필리아와 줄이 있어서 최대한 대기하지 않는 쪽으로 일부러 끝 번호를 배정받았다. 어떻게든 자기 순서에만 들어가면 됐었기에.
기다린 지 한 15분 만에 들어가는 거였다.
‘어제 그렇게 피곤했는데 푹 자고 나니까 괜찮아졌네.’
녹초가 돼서 뻗었던 어제를 잠시 떠올리다 말았다.
확실히 오디션이라고 대기하는 곳은 알게 모르게 긴장감이 흐르고 있어서.
‘이런 오디션도 좀 오랜만이긴 하지만, 아마 앞으로는 이런 오디션을 볼 기회도 많이 없겠지.’
긴장감? 조금 생긴 거 같긴 했다. 있는 모델들이 전부 국적을 불문하고 개성이나 외모가 뛰어났기에 한국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의 긴장감만을 유지한 채로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90번! 90번! 90번 자리에 없나요?”
관계자로 보이는 여자가 외쳤건만 90번으로 보이는 모델이 나오지 않았다.
어라. 근데 그렇게 되면
“91번!”
다음이 바로 나잖아?
나는 한 번 더 호명되기 전에 그녀에게로 다가가니 그런 나를 오디션장 바로 앞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10초 정도를 기다렸을까.
여자가 문을 열었고, 문이 열리자마자 깔리기 시작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관계자는 들어가라는 소리를 구태여 하지 않았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오디션장 안으로 들어가면서 워킹을 시작했고
아니나 다를까 마치 쇼장처럼 되어 있는 오디션장 내부를 걸으면서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나는 앞만 보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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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잘 본 거 같아?”
“그럭저럭 잘 본 거 같아. 살 더 뺄 수 없겠냐고 물어보던데?”
“쯧. 마크 바이에른 때문에 그래. 베르사체에서부터 슈퍼슬림으로 유명했잖아.”
슈퍼 슬림(super slim)
디자이너 취향 한 번 한결같네.
라고 하기에는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마르면 마를수록 좋아하긴 했다. 예외인 곳도 몇 군데 있었지만 그건 정말 예외적인 곳이고.
방금 유필리아의 패션쇼 오디션을 보고 나온 모델, 로빈은 그의 매니저와 함께 차를 타고 회사로 다시 이동하고 있었다.
‘가면 또 체중 재겠네.’
미래가 훤히 그려지는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로빈은 패션쇼에 선 경험이 다수 있는 모델이었지만, 이번 밀라노 패션위크 중에 서는 패션쇼는 한곳밖에 없었으니까.
그건 밀라노 패션위크에 선정된 브랜드가 로빈의 이미지가 대부분 안 맞아서 그랬다.
밀라노는 강렬한 이미지, 여성스러운 패션에서 독보적이었으니.
이번에 유필리아에서 새롭게 추구한다는 스타일이 의외였을 뿐이었다. 덕분에 소년미를 가지고 있는 로빈에게는 딱 맞아서 지원할 수밖에 없었고.
살을 뺄 수 있냐는 말에 그 자리에서 예스를 외쳐버렸으니 아마도 결과는 합격일 거 같았고.
매니저도 그것을 아는지 앞으로의 체중 조절에 관한 이야기를 떠들어댔다.
“그나저나 오디션 자체는 어땠는데? 괜찮아 보이는 애는 있었어?”
“...... 으음.”
딱히 유명한 이들은 없었다. 오디션이라는 게 다 그런 거니까.
오디션 자체의 수준도 그럭저럭, 애초에 일정이 급하다 보니 원래 같았으면 디스할 만한 것도 크게 따지지도 않았었고.
괜찮은 애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어. 있었어.”
“그래? 누군데?”
“누군지 몰라. 완전 처음 보는 동양인이었는데 마스크가 괜찮던데? 왜 밀라노 패션쇼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차라리 파리 쪽이 훨씬 맞았을 거 같은 느낌.”
앳된 티가 팍팍 묻어져 나오는, 말 그대로 소년 그 자체인 모델이었다.
만약 그 동양인 모델이 ‘이번’ 유필리아가 아닌 다른 밀라노 패션위크에 서는 브랜드 오디션을 봤다면 1차에서 바로 탈락했겠지.
몸도 말랐고, 그런 가냘픈 소년 이미지는 밀라노보다 파리 쪽에서 잘 먹힐 텐데.
로빈만 해도 밀라노에서 서는 패션쇼는 한 곳이었지만 파리에 서는 패션쇼는 두 곳이었다.
“파리가 오디션 같은 걸 보겠어? 거긴 진짜 엄청난 운이 따라주지 않는 한 신인은 불가능이야.”
“하긴.”
매니저의 말에 로빈이 수긍했다.
파리는 가장 전통 있으면서도 영향력이 센 곳이라. 흔히 말하는 명품들이 대부분 파리에 있었기에 그만큼 톱모델들이 상주했다.
하지만 혹시 모르지.
“이번 시즌 끝나고 다음 시즌에는 파리에 서 있을 수도.”
“그 정도야?”
“느낌이 좋아. 모델은 이미지가 중요한데 그것도 확실해 보이고 눈에 띄는 게 잘 먹힐 만한 모델이랄까.”
물론 겉모습만 봤을 때 그렇다는 거였다.
모델은 그게 다가 아니니까.
하지만 같은 모델인 자신이 느낀 걸 디자이너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떤 모델인지 궁금하기는 하네.”
“합격하면 만날 수 있겠지 뭐.”
“하하. 로빈 네가 합격하는 건 정해진 거야?”
장난스럽게 말하는 매니저의 말에 로빈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인 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퉁명스럽게 핸드폰으로 SNS를 하기 시작했다.
‘인연이 된다면, 언젠가는 만나겠지.’
그렇게 생각한 로빈은 머릿속에서 동양인 모델에 대한 생각을 지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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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빠른 템포의 음악 소리에 맞춰 워킹을 하고, 몸이 그대로 드러나는 기본적인 의상이었지만 마치 옷을 입고 있다는 듯이 생각한 포즈를 취했다.
3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하지만 그것만으로 오디션의 합격 여부를 가르기에는 충분했다.
“깔끔한 워킹이네요.”
“옷을 입혀 놓으면 옷이 확 살 거 같네.”
“너무 어려 보이는 거 같은데? 소년에도 정도가 있지.”
“오히려 참신하고 괜찮을 거 같은데요.”
우연의 워킹과 포즈가 끝나고, 그런 그에 대해서 심사위원들이 각자 내뱉은 코멘트가 갈렸다.
하지만 두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이들이 꺼낸 말들은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었고.
다른 이들과 같이 우연을 심사하는 입장이 된 마크 바이에른, 수석 디자이너인 그 또한 우연에게 우호적인 편에 속했다.
“그냥 쌩신인이네요. 선다고 하면 우리 패션쇼가 데뷔나 다름없고.”
“카메라는 잘 받는 거 같은데 옷들이 다 쓰레기였네.”
빠르게 우연에 대한 프로필을 훑은 심사위원이 혀를 찼다.
그 외에도 우연의 이력 사항을 봤지만 전부 별 볼 일 없었고.
“리디아 에이전시라는 거 하나 괜찮네. 거기다 룩북 촬영까지 했으니 사실상 의상도 알고, 컨셉도 알고 있다는 건데.”
“오늘 일부분 촬영한 걸 봤는데 괜찮더군요.”
“그래요? 그러면 문제 될 건 하나밖에 없죠.”
빠르게 우연이 찍은 촬영본이 괜찮다고 말한 마크 덕에, 심사위원들의 의견은 어느새 하나로 모이는 듯했다.
사실상 모델 오디션은 직원을 뽑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질문이라고 해봤자 인성이나 가치관에 대한 것들이 아니었다.
외모나 쇼에 관련한, 혹은 패션에 관련한 질문.
문제 될 건 하나밖에 없다는 심사위원이 입을 열어 우연에게 질문했다.
“쇼장의 압박감을 견딜 수 있나요? 실수하는 순간 끝장인데.”
나이도 어리고, 사실상 데뷔나 다름없다.
실수하면 안 되는 곳에서 실수하는 모델들을 간혹 봤고, 그로 인해 쇼가 망쳐지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앞에 선 동양인 모델이 검증되지 않은 게 하나 있다면 실전 경험이라는 것.
심사위원들의 날카로운 시선에도 우연은 침착한 얼굴을 한 채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더 큰물에서도 놀고 싶은걸요.”
그렇게 말하면서 무표정이었던 소년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는 걸 보고, 그 말뜻을 이해한 심사위원은 더 질문하지 않았다.
원래부터 신인은 도박이다.
대박 아니면 쪽박.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결국 유필리아는 도박수를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사위원석에 앉아있던 수석 디자이너, 마크는 입꼬리가 자동으로 올라갈 뻔한 걸 애써 막았다.
여태껏 두 번의 만남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우연의 당돌함,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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