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92화 (92/137)

〈 92화 〉 chapter 91. 포토그래퍼 레나 (2)

* * *

어떻게 보면 건방질 수 있다는 말인 걸 알았다.

하지만 여기서 순순히 나간다고 해도, 그런 촬영의 결과물이 좋을 거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안 하면 어떻게 할 건데?”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저는 저 나름대로 열심히 해야죠.”

“그래, 해 봐.”

해보라며 턱짓하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레나.

사진을 찍는 사람이 포토그래퍼이고

그런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 모델인데.

한 손에 카메라를 들고 멀뚱히 나를 쳐다보는 레나의 모습에, 지적하고 싶은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참았다.

‘이미 분위기 곱창 났으니까.’

지금부터는 차라리 실력으로 승부하는 게 나을 거다.

등 뒤에 있는 커다란 나무가 자연 배경이 되었고, 감정을 추스른 뒤 나른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자연스러운 포즈를 원했기에 그만큼 카메라와의 각도와 거리가 중요했는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레나가 그제서야 카메라를 들고, 찍으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찰나.

잠시 자리를 바꿔가면서 각도를 찾더니

찰칵, 찰칵ㅡ

짧은 셔터음과 함께 그대로 카메라가 내려갔다.

“아 씨!”

레나가 카메라를 잡고 있던 손에는 빗방울이 떨어졌고, 얼마 안 지나 사람들의 머리에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내게 다가온 예진이 우산을 펴 건네주는 걸 받아들면서.

‘이번 촬영 제대로 망했네.’

이대로 촬영이 다른 날로 연장될 거라는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모두가 건물로 돌아올 즈음에는 비가 꽤 많이 내리기 시작해서, 비를 조금 맞은 사람들이 빗방울을 털어냈고.

‘이제 비 안 내릴 수도 있다고 한 사람 누구야.’

다시 건물 안에 있었던 곳으로 향하면서 우리는 일기예보를 탓했다.

나는 레나가 있는 쪽을 눈으로 흘겼는데, 그녀는 그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이렇다 할 움직임이나 말은 하지 않았다.

고작 사진 두 장이 오늘 하루의 결과물이라는 걸 생각하니 어질어질하네.

“비가 억수로 오는데? 날씨 왜 이래.”

“그러게요. 아무래도 오늘은 그른 거 같은데.”

분명 아침부터 시작했던 촬영이 오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애초에 해가 뜬 걸 보지도 못했지만 아마 해가 지면 완전히 끝나겠지.

‘무조건 연장이다.’

내 예감은 안타깝게도 틀리지 않았고, 하루 종일 오는 비 때문에 결국 우리는 철수하기로 했다.

‘다시 또 오겠지 뭐.’

오늘은 이대로 허탕 친 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또 얼마나 촬영 분위기가 어색해질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예진과 나는 스탭들과 웃으면서 인사를 나눈 뒤 호텔로 돌아갔다. 정말이지 한 건 없는데 피곤하다는 게 이런 건가.

‘포토그래퍼 레나......’

씻고 나와서 침대에 누우며 핸드폰을 들어 검색창에 포토그래퍼 레나를 검색했다.

작업물만 잠깐 봤었을 뿐이지 그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단순한 궁금증으로 인터넷과 SNS에 이름을 검색해가며 보이는 정보들을 하나씩 읽어보기 시작했다.

‘예전에 발렌티노랑 계약을 맺어서 활동했었고..... 그 이후에는 프리랜서로 전향. 음, 이거는 루머 같네.’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나가 준 첫인상이 바뀌지는 않았다.

특이한 거는,

“모델이랑 스캔들이......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터졌었네.”

끝이 항상 안 좋았던 것인지 루머로 추정되는 글들과 찌라시들, 과도하게 자극적인 내용들이 몇 개 보였다.

‘외국은 개방적이니까.’

더욱이 이미지가 중요하지 않아서 레나의 일에는 타격이 없어 보였다. 실제로 SNS만 봐도 인기가 많고.

그렇게 생각한 나는 레나에 대한 신경을 끈 채 검색창을 닫았다.

유튜브를 보다 보니 언제 잠든지는 모르겠고......

다음날 아침, 전날 하지 못했었던 촬영이 이틀 뒤에 다시 잡혔다는 말을 듣고는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 그 포토그래퍼 진짜 싸가지 없던데.”

“푸흡...... 그렇긴 했죠. 이름은 레나예요.”

“당연히 알고 있지. 진짜 이번 촬영은 어떻게든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저도요.”

야외에서 촬영을 하다 보니 대기해야 하는 예진의 입장에서도 힘들만했다.

하지만 장난스럽게 예진이 늘어놓는 불평에 나도 큭큭 거리면서 웃었고,

‘일인데 어쩌겠어.’

미래가 예상되었지만 그래도 원래 비즈니스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

“레나, 오늘 기분 좀 안 좋아 보이는데?”

“됐고 술이나 줘.”

“따라준 건 다 마셔야 하는 거 알지?”

잔은 넘치기 직전이었지만, 레나는 개의치 않고 술을 들이켰다.

도수가 높은 위스키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란.

“이제 다른 걸로 갈아탈 때도 되지 않았어? 매일 똑같은 술이네.”

“오우, 기다리고 있어. 내가 죽여 주는 걸로 하나 갖고 올 테니까.”

레나는 고작 이 정도 마시고 취하는 여자가 아니었다.

일을 하고 온 날이었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파티가 열리는 곳에 참석했고, 익숙한 얼굴들과 처음 보는 이들 사이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

정말 별 볼 일 없는 일상 중에 하나였다.

‘키스 잘하네.’

남녀 둘이 한쪽에서 진한 키스를 이어가는 걸 보면서, 잔에 아주 조금 남아있던 술마저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아 씨.”

남자 하니까, 그 모델이 생각났다.

건방졌던 남자애.

이제 막 데뷔하는 신인이면서 자신과 작업하고, 유필리아의 모델이자 패션쇼에도 선다고 했었던.

어디에 줄을 댄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훌륭한 낙하산이 아닐 수가 없었다.

‘뻔하지 뭐.’

우연의 얼굴이나 피지컬에는 관심 없었다. 그저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 그렇게 높은 자리를 꿰찰 수 있다는 건 나름대로 그만큼의 무언가가 뒤받쳐 주기 때문이니까.

“짠! 이거 아직 뜯지도 않은 건데, 너 오늘 기분 안 좋아보니까 특별히 널 위해서 가져왔어.”

술을 가지러 갔었던 그녀의 친구, 메이가 돌아왔다.

술잔에는 다시 술이 차오르기 시작했고 척 보아하니 가격이 꽤나 나갈 거 같은 술이었다.

레나는 어떻게든 일을 해서 벌어먹고 쓰는 실정이었지만 메이는 아니었고, 그런 흔한 재벌 3세인 메이와 어떻게 하다가 친해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쓰레기들 사이에서 믿고 말을 할 수 있는 상대였다.

“그래서 오늘 무슨 일 있었는데?”

“별거 아냐. 그냥 낙하산 모델이 설쳤다고 해야 하나?”

“낙하산? 그거 네가 제일 싫어하는 타입 아니야?”

메이의 흥미를 끌었는지 술을 한 모금 마시면서 메이는 더 얘기해보라는 눈치를 주었다.

레나는 대수롭지 않게 술을 마시면서 입을 열었고.

“맞아. 신인인데 유필리아 이번 시즌 룩북부터 패션쇼까지 다 참여한다고 그러더라. 얼굴 보니까 왜 그렇게 됐는지는 대충 알 거 같고. 완전 어려.”

덧붙여서 완전히 망해버린 촬영에 대해서도 말하자, 메이는 기대하던 일이 벌어지지 않아서 흥미가 떨어졌는지 대충 맞장구를 쳐줬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네가 다 알아서 해줄 텐데. 걔도 참 어지간히 자존심 세나 보네.”

레나는 그 말에 수긍했다.

낙하산이면 낙하산답게 있으면 되니까.

포토그래퍼와 모델의 합?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인맥으로 밀어주는 이쪽 바닥에서 얼굴 좀 생겼다 싶으면 뉴페이스고, 덥석 일부터 시작해서 일을 그르치는 것들도 봐왔으니.

별별 사람들을 만나면서 얻은 교훈이었다.

당장 레나가 사귄 전 애인들도, 뭐만 하면 유명해지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무슨 일정이 잡히면 그쪽에 한 번 어떻게든 눈에 띄어보려고 지랄을 했고.

자기를 밀어달라는 남자부터, 레나를 팔아먹고 다니는 남자까지.

불순한 목적으로 다가오는 이들은 딱히 그들이 아니어도 셀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자존심 있는 낙하산의 표정이 뭔가 다르긴 달랐었는데......

“아냐. 다르긴 뭐가 달라.”

“응? 무슨 말이야?”

“아무것도 아냐.”

“그래? 그럼 뭐..... 아, 저기 저 애 네 스타일 같은데?”

대화의 주제가 끝나자 곧장 다른 걸로 화제가 돌려졌다.

메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확실히,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순하게 생긴 얼굴이 처음 보는 남자였다.

레나의 이상형은 예쁘고, 순하게 생겼으며 웃으면 더 예쁜 남자. 하나같이 예쁜 남자였지만 착해야 했고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있어야......

그런 남자가 어딨,

“별로야. 나 한동안 남자 만날 생각 없어.”

“뭐?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옆에서 메이가 호들갑을 떨어댔지만 레나는 그런 메이를 무시한 채 술만 들이켰다.

기억에 남는 짓을 해서 그런지 짜증 나게 자꾸 생각나네.

그리고 더 짜증 나는 건,

‘아 진짜 그만해요.’

어느 나라 말인지도 모르는 말을 하면서, 그 모델의 웃는 얼굴이 안 잊혀진다는 거였다.

“술이나 마시자.”

“좋아. 술 들어가면 또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어차피 하루가 지나면 전부 잊혀질 거다.

그렇게 생각하며 레나는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진탕 마셔댔다.

그리고 메이가 말했던 남자애랑은 결국 대화를 나누긴 나눠봤는데 말하는 게 별로였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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