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93화 (93/137)

〈 93화 〉 chapter 92. 과정보다 결과가 중요하지

* * *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다행이네요.”

“그러니까요. 처음부터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내가 말하자 주위에 있던 이들이 모두 공감했다.

‘비가 왔을 때는 몰랐는데.’

해가 떠 있으니까, 처음 촬영했었던 곳과 같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다르게 느껴졌다.

가든이라더니, 확실히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고.

여느 때와 똑같이 먼저 와서 메이크업을 받고 옷을 갈아입어야 했기에, 나는 실제 촬영 시간보다는 조금 더 일찍 온 상태였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메이크업이 끝날 무렵, 포토그래퍼인 레나가 도착했고.

내가 먼저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자 레나 쪽에서도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그녀는 스탭과 무슨 대화를 하는 것 같더니 그대로 몸을 휙 돌려서 나가버렸고.

“첫 번째 촬영 장소는 저번에 찍으려다가 말았던 곳에서 다시 찍는데요.”

“알겠습니다.”

우리 쪽으로 와서 말을 전달한 스탭은 곧이어 다른 이들에게도 말을 전달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비도 안 오는데 설마 그때처럼 굴지는 않겠지?”

“그게 비 때문이라기에는...... 음.”

무리인 거 같은데.

물론 비로 인한 영향으로 기분이 안 좋았던 것도 한몫했겠지만 나를 쳐다보던 눈빛, 그리고 말투를 보았을 때 그건 레나 자체의 모습 같았다.

본성이 묻어 나온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간에, 그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예진도 딱 한 마디 내뱉고는 딱히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않았다. 우리는 헤어 메이크업을 끝내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다같이 촬영 장소로 이동했고.

“빨리 와.”

이번엔 밖에서 기다려서 짜증이 난 건가?

‘참 기분이 좋을 수가 없는 사람이네.’

그러게 그냥 실내에 있지.

인상을 찌푸린 레나가 우리 쪽을 보면서 말했지만, 막상 도착해서 촬영에 들어가려는데 그때까지도 레나는 나에게 별말 하지 않았다.

그때와는 달리.

“앞에 봐.”

그리고 이어지는 촬영은 예상 밖으로 순조로웠다.

“못하는 거 티 내지 말고 카메라 의식하지 마.”

아니, 겉으로만 순조로웠지. 나한테는 그다지 좋은 촬영은 아니었다.

일단 레나가 하는 말들은 전부 나를 향해 있고, 레나가 해서 그런지 아니면 그녀의 말투 때문인지는 몰라도 비꼬는 것처럼 들려왔으니까.

‘참자 참아.’

마음에 참을 인을 새기고 촬영에 임했다.

그래도 그때처럼 가만히 있으면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망언은 하지 않았으니.

주로 내가 포즈를 잡으면 레나가 코멘트 하는 형식이었다.

일단 사진에서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 게 포인트였기에 가만히 있는 것분만 아니라 몸을 움직이기도 했고.

어떻게 찍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럴 때마다 카메라 셔터음이 유독 더 잘 들리곤 했다.

‘사진 못 찍기만 해봐.’

마음 한구석에 괜한 오기가 들었지만, 잠깐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서 헤어 메이크업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그동안 레나는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을 보는 것 같았고.

“잘 나왔어요?”

“어. 제법.”

내 물음에도 대충 대답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이제 그러려니 했다.

그 이후로도 촬영은 이루어졌지만, 사실상 레나와 나 사이의 대화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무방했고.

처음에는 그게 불편하다가도 시간이 지나니까 점차 분위기에 익숙해졌다.

이미 한 번 연장된 촬영이라서 그런지 식사 시간이나 그런 건 따로 주어지지 않아서

간간이 쉬는 시간은 있었지만 장소를 옮기고 옷을 갈아입는데 시간을 쓰면서 촬영, 또 촬영의 연속이었다.

총 세 벌의 옷을 착장해야 했고 그때마다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을 변경, 액세서리를 비롯한 신발까지도 바꿔 신어야 했으니까.

‘힘드네.’

야외 촬영이라는 것도 그렇지만 레나와 하는 촬영이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인상이 안 좋은 거랑은 별개로, 촬영에 들어가면 또 달라졌으니.

요구사항이나 지적 같은 말들도 세게 나와서 그걸 듣는 입장으로선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달까.

“여기 말고 저기서 촬영하는 게 낫겠어.”

그렇게 대망의 마지막 옷 촬영.

정한 장소에서 사진 두 어장을 찍다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장소를 옮겼다. 다른 스탭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움직였으나

‘아, 현기증.’

이동하던 도중 순간적으로 시야가 흔들리면서 몸도 같이 비틀거렸다.

“괜찮아요?”

“아, 네. 괜찮아요.”

바로 옆에 있던 스탭이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팔을 잡아주며 물어왔지만, 다행히도 금방 사라진 덕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었다.

아무래도 원인은,

‘오늘 아침에 영양제를 안 챙겨 먹어서.’

가뜩이나 먹은 것도 없던 터라 더 그랬던 것 같았다. 그래도 매일 영양제는 다로 챙겨 먹었었는데 오늘은 정신이 없어서.

예진이 허겁지겁 건넨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돌려줬다.

“촬영 바로 들어갈 수 있지?”

“네.”

촬영 장소에 도착하자 레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극히 평범한 어조였다.

‘마지막 촬영.’

차라리 빨리하고 끝내겠다는 마음이다. 그건 여기 있는 스탭들 모두 같은 생각일 게 분명하지만.

그런 나를 쳐다보는 레나의 눈빛에서는 무언가를 읽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말없이 카메라를 드는 것을 보아하니 바로 촬영에 들어갈 모양이네.

머리를 만져주던 스타일리스트가 빠지자 곧장 촬영에 들어갔다.

“다리 옆으로 빼고 시선 유지해. 지금이 제일 좋으니까.”

그리고 하는 촬영은, 왠지 모르게......

“오른쪽으로만 턱 괴고 고개는 살짝 왼쪽으로, 어 됐어.”

친절해졌다?

사실 말투는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데, 앞서 촬영 대보다는 뭔가 더 친절해진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그게 뭐가 친절한 거냐고 하겠지만.’

여태까지는 요구를 가장한 지적이나 했지, 그 뒤에는 아무 말도 붙이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좋다는 말과 이제 됐다는 등의 말들을 뒤에 붙였다.

‘자기도 편해졌나.’

뭐 어찌 됐건 간에 나쁘지 않은 변화라고 볼 수 있었다.

마지막 촬영이라고 해서 일찍 끝나는 건 아니었고, 한 번 쉬었다가 상반신 클로즈업부터 전신까지 찍은 다음에야 마무리됐고.

“사진은 유필리아로 보낼 테니까 알아서 골라.”

촬영이 진행되는 내내, 모니터도 없었고 그녀의 사진기에 담겨 있는 내 모습을 살펴볼 겨를이 없었는데, 나는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앞으로 잡힌 일도 없겠다.’

레나를 빨리 보내주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제일 먼저 자리를 떠난 건 레나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나는 예진과 함께 촬영장을 벗어났고.

연장으로 인한 룩북 촬영의 마지막까지 끝나자 이제 남은 건 패션쇼밖에 없었지만.

“머, 먹어도 되겠죠?”

샌드위치 한 조각을 반으로 자른 걸 손에 들고서 나는 망설였다.

“딱 그거만 먹으면 괜찮아. 어차피 내일부터는 운동도 같이 해야 하니까.”

“맞죠.”

점심 겸 저녁.

급하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조금이나마 건강하게 살을 빼보고자 하고 있었기에

나는 네 입만에 샌드위치 조각을 없애버렸다.

남은 샌드위치는 당연히 예진이 전부 다 해치워버렸고.

촬영도 끝났겠다, 이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쉬기로 했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하면서 나는 그동안 온 캐톡들과 알림들을 살펴봤고, 어김없이 자기 전에는 아웃스타그램에 들어가 예진이 찍어준 사진들을 올렸는데

“됐다.”

사진을 올리고, 아웃스타그램을 둘러보다 나갈 때까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레나’가 나를 아웃스타그램 팔로우 했다는 사실을, 나는 이틀 후에 알게 되었다.

****

“뭐지 이건?”

“뭔데.”

“룩북 샘플 사진 받았는데, 사진이 뭔가 묘해서요.”

“사진? 봐봐.”

그러자 직원이 마우스를 움직여 처음 사진부터 하나씩 넘겨 가며 보여주기 시작했다. 누군가 했더니 그 동양인 모델이었네.

이름도 짧고 특이해서 기억에 남았다. 더욱이 신인이라는 걸로 한바탕 난리가 났었으니까.

‘낙하산은 아니었나 보네.’

볼 기회도 좀처럼 없고, 담당도 아니어서 사진으로도 지금 처음 보는 거였지만 확실히 오디션에 뽑힌 이유가 있었다.

다만 이 사진이 묘한 이유는 모델 때문이 아니라......

“마지막 거가 너무 잘 찍혔는데?”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앞에 찍은 것들이 못 나온 것처럼 보이는 거였다.

또 순전히 감일뿐이지만 사진이 점점 찍으면 찍을수록 나아지는 것 같았다. 모델도 같고, 포토그래퍼도 같은데.

그렇다고 사진을 하나씩 따지고 보자면 전부 잘 나온 축에 속했고.

물론 1차로 검수해서 온 사진들이겠지만, 대놓고 따지기에는 뭐해서 그저 묘한 느낌이 든다고 한 것 같았다.

“레나 사진이라고 했지?”

“네.”

“괜찮겠네.”

레나는 실력은 괜찮지만 떠도는 소문이 안 좋아서 저평가되는 포토그래퍼였다.

이번 시즌 자체가 중요한 유필리아에서는 오로지 명성이 아니라 실력만으로 포토그래퍼들을 선정했고, 어떻게 보면 레나와 작업을 한 것도 처음이었는데.

아무래도 반응이 나쁘진 않을 거 같네.

“위에 올라갔어?”

“아직이요. 이제 받아서 올리기만 하면 돼요.”

그렇게 말한 직원은 다시 일에 착수하기 시작했고, 사진을 봤던 또 다른 직원도 다시 자기 담당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게도, 올라간 룩북 사진들 중 가장 호평을 받은 건 우연의 마지막 촬영 사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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