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chapter 93. 헛수고
* * *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 한국에서 왔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살 준비가 되어 있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나는 가만히 있다가 이내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재빠르게 다른 운동 기구로 자리를 옮겼다.
‘방심했어.’
어제 일찍 자서, 오늘 유독 일찍 일어난 탓에 뒹굴거리다가 운동이나 할 겸 호텔 내부에 위치한 헬스장에 왔는데.
여기도 헬스장에 여자가 남자보다 많은 건 당연한 거였다.
아침이라서 사람이 애초에 많이 없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서 그런가.’
사람들이 하나둘씩 들어차서, 운동을 시작한 지 30분 만에 이런 일이 발생했다. 상대방이야말로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양인인 거 같고.
미인이긴 했지만 내 스타일은 또 아니었다.
이제는 여자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오는 것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고.
“운동하는 거 제가 도와줄까요? 기구 사용하는 방법도 알려주고 싶은데.”
“아, 괜찮습니다.”
“목소리도 좋네요. 당신도 알고 있겠죠?”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기구를 사용하면서 플러팅 하는 또 다른 여자를 가볍게 넘겼다.
‘솔직히 기분은 괜찮지만.’
곤란한 건 매한가지다. 무엇보다 지금은 그런 곳에 신경 쓸 여력이 없기도 하고.
운동은 다음에 해야겠네.
아무래도 나중에는 사람이 없는 시간대를 노리거나, 예진과 같이 오던가 해야겠다. 같은 공간에 있는 한 이런 일은 끊이지 않을 거 같으니까.
체감상 이미 몇 명의 시선은 내게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다 돼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을 듣지 않고 그대로 일어나 빠르게 자리를 떴다.
샤워실이 따로 작게 마련되어 있지만 땀이 날 정도는 아니라서 그냥 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고.
‘지금쯤이면 일어났으려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예진에게 보냈었던 캐톡을 확인해 봤지만 아직 자고 있는 것인지 1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그대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아침부터 부지런하네요.”
“......?”
한국어?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에, 한국어였다.
핸드폰 화면을 끄고 몸을 휙 돌리니 여자 한 명이 서 있었고, 한국어가 들린 것과는 반대로 생긴 건 완전히 서양 사람이었는데......
이런 내 의문은 여자가 입을 열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됐다.
“어머니가 한국인이셨어요. 혼혈이고요.”
“아, 그렇군요.”
“아까 헬스장에서 봤었는데 많이 곤란하신 거 같아서, 안심하세요. 저는 그런 의도는 없으니까요.”
으음, 그래서 또 어쩌라는 거지.
개인적으로 이렇게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초면에는 외모가 큰 역할을 한다. 만약 상대방이 거부한다면 외모가 좀 부족한 거고.
개인적으로 그런 의미에선 오늘 다가온 여자들은 전부 별로였다.
다행히도 여자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해서.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던 탓에 일단 둘이 올라타게 되었다.
그나저나 아까 그 대화에서 어떻게 답변해야 하고, 이어나가야 할지가 마땅치 않은데.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원래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정답이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아, 그쪽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정말 다행인 건, 엘리베이터가 느리지 않아서 누른 층에 빨리 도착했다는 점. 여자는 더 높은 층으로 가는지 내가 먼저 내리게 됐고.
‘숨 막히는 줄 알았네.’
애초에 안면도 없고, 대화의 맥락도 없었지만 불편한 분위기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한시름 놓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복도를 걸어 방문 앞에 도착해 문을 열려던 순간.
달칵ㅡ
“어?”
“뭐야. 어디 갔다 와?”
바로 옆방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나오려던 예진과 눈이 마주쳤다.
예진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겉옷을 대충 걸쳐 입은 상태였지만 그런 거에는 개의치 않았고.
둘 다 문을 사이에 두고 엉거주춤한 상태라서, 내가 먼저 몸을 밖으로 빼며 물음에 답했다,
“저 밑에 있는 헬스장에서 운동 좀 하다 왔어요.”
“그래?”
“누나는 어디 가시는데요?”
“나 잠깐 편의점 좀 갔다 오려고 했지.”
“아......”
“같이 갈래?”
편의점?
어차피 방에 들어가서 할 게 없긴 했다. 그냥저냥 예진을 따라 편의점 갔다 오는 것도 괜찮을 거 같고.
‘껌이나 사야지,’
다른 건 그림의 떡이겠지만.
“그래요, 같이 가요.”
“오케이.”
그렇게 우리 둘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편의점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도착하자마자 예진은 과자 코너로 갔고, 나는 젤리 속에서 껌 하나를 집으며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안 돼. 그림의 떡이야.’
막상 오니까 유혹에 흔들려서 옆에 있던 초콜릿이 눈에 아른거렸지만 꾹 참고 걸음을 돌렸다.
‘얼른 계산하고 나가 있어야지.’
예진이 고르는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심산으로 지갑을 꺼내며 계산대로 향했다.
그런데 급한 마음이어서 반대편에서 오고 있던 사람을 보지 못했고.
“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어, 아까 그”
코너에서 가려져 있던 사람과 부딪혔다.
근데 분명 영어로 사과했는데 돌아오는 게 한국말?
아니나 다를까 부딪힌 사람을 보니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사람이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네.’
고개를 한 번 숙이고 가만히 서 있는 여자를 지나쳐서 내가 먼저 계산대로 가 계산을 끝냈다.
그리고 편의점 밖에서 예진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예진이 아니라 아까 그 여자가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게 보였고.
나는 잠깐 본 뒤 곧장 핸드폰으로 시선을 옮겼지만, 여자는 그대로 나한테 직진하더니
“이거 제 번호예요. 관심 있으면 연락 줘요.”
전화번호가 적힌 찢어진 종이를 내게 내밀었다.
...... 당신 그런 쪽으로 관심 없다며.
엘리베이터 앞에서 했던 말과는 다르게, 종이를 내게 주고 빠르게 자리를 뜨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헛웃음 지었다.
기가 차네.
‘사람이 다 똑같지 뭐.’
생각해 보면 굳이 거기서 나한테 말 걸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시답잖은 걸로 말을 건 것부터가 좀 그렇긴 했다.
이거는 이따 가서 버려야지.
“뭐해? 가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가요”
“...... 누가 번호 주고 갔어?”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은 싫다니까.
안 그래도 예진이 나오는 걸 못 봤는데, 주머니가 없어서 대충 손에 들고 있었던 종이를 본 듯싶었다.
결국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오늘 아침부터 있었던 일을 자초지종부터 해서 썰 풀 듯이 예진에게 말해주었고.
“같은 호텔이라서 마주치나 보네.”
“그러니까요.”
의외로 얘기를 들은 예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예진에게 나는 작은 푸념을 하면서 우리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오늘은 유필리아에서 한번 보자고 해서.
본사로 갈 준비를 해야 했기에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껌을 입에 넣은 뒤 준비를 시작했다.
‘옷은 뭐 입지?’
고민 끝에 정한 옷이었지만 확실히 살이 그동안 조금 빠져서 그런가. 핏이 더 괜찮아 보였다.
그래도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지. 왜냐하면
“이제 곧”
쇼에 설 시간이니까.
****
너무 편하게 있었어.
우연의 말을 들으면서 예진은 자책했다. 확실히 좌시할 만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엄연히 이곳은 타국의 땅, 거기다 호텔이니 난다 긴다 하는 이들 중에 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예전에 이탈리아에 왔었을 때 우연이 이태리 여자는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했지만,
예진이 봤을 때는 그 작업 멘트들이 하나같이 주옥같아서,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을 실천으로 옮겼고.
“졸려......”
어제 우연이 캐톡을 보냈었던 시간인 7시 45분에 기상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먼저 캐톡을 보내고 서로가 일어났는지를 체크하기 때문에 예진은 핸드폰을 켰지만, 온 캐톡은 하나도 없었고.
‘오늘도 운동 가겠지.’
일단 우연에게 캐톡을 남겨놓은 뒤, 운동을 가겠다고 하면 바로 따라 나갈 수 있게끔 씻고 나왔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가 우연도 운동을 더 열심히 하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핸드폰을 들어 캐톡을 다시 확인하자
“...... 설마 자나?”
아직 1이 사라지지 않은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안 일어났나 보네.’
그렇게 예진은 침대에 다시 누워 너튜브 영상을 시청하기 시작했고, 간간이 캐톡에 들어가 확인해 봤지만 여전히 1은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어제 예진이 일어난 시간보다 더 늦은 아침이 되고 나서야, 우연에게서 일어났다는 캐톡이 도착했고.
괜히 기다렸다는 생각에 망연자실한 예진은
“이럴 거면 그냥 더 잘걸.”
한숨을 푹 쉰 예진은 그냥 우연에게 앞으로 운동을 할 때는 자신한테 전화하라고 말했다.
사유는 대충, 너 운동할 때 나도 운동하겠다는 걸로다가.
****
“웬일로 먼저 일어났지?”
예진에게서 온 캐톡의 시간대를 확인한 우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일찍 일어난 예진의 기행을 보고 의문을 감출 수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