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chapter 94. S/S 유필리아 밀라노 패션쇼
* * *
몇 번의 피팅.
그리고 반복되는 워킹 연습과 체중 관리.
바쁜 스케줄로 꽉 차 있는 건 아니었지만, 바쁘게 느껴졌다.
더욱이 한 번 방문할 때마다 패션쇼에 가까워지면서 본사의 분위기가 변해가는 걸 느낄 수 있었고.
이번에 딱 한 번 만났었던 수석 디자이너는 당연하게도 만나지 못했다.
캐스팅 디렉터도 한 번 잠깐 마주친 게 다고, 이후에는 다른 디자이너가 피팅을 도와주고 맡아서 봐주는 정도.
시간은 그렇게 흐르고 흘러 밀라노 패션위크 둘째 날,
유필리아의 패션쇼 날이 다가왔다.
‘전날까지도 실감이 안 났는데’
확실히 막상 닥쳐오니까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항상 예진과 이동했었던 때와는 달리 오늘은 리디아 에이전시에서부터 매니저를 보내왔고, 실장으로 보이는 사람도 한 명 붙어서 총 네 명이서 하는 이동.
“잘하고 와.”
“응.”
“잘하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가는 동안 들었던 얘기는 대강 이번 유필리아 패션쇼에 대해서와 주의할 점에 대해서였고.
도움이 된다기보다는 주로 조심해야 할 걸 주입한 기분이었다.
‘뭐, 신인이니까.’
그들 입장에서야 걱정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겠지. 무려 첫 활동이 유필리아의 밀라노 패션쇼인데.
아무튼 간에 그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고, 쇼장에 도착하자 그런 그들과 인사한 뒤 나는 안으로 이동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리고 사전에 안내받았던 장소로 가니 이름이 적힌 목걸이를 매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헬퍼인가 보네.’
유일하게 한국어로 적혀 있는 목걸이를 매고 있는 헬퍼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그러자 여자는 나를 보더니 빠르게 어디론가로 향했고.
“여기 앉으세요.”
내 담당 헬퍼가 두 명 더 온 뒤, 나는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다들 크네.’
주변을 보니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모델부터 이미 메이크업을 받고 기다리는 모델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나는 메이크업을 받던 도중, 1차 리허설을 하겠다는 말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백스테이지로 향했고.
1차는 동선만 확인하는 리허설이었기에, 다른 것보다 부담이 비교적 덜했다.
하지만 다른 모델들과는 처음 합을 맞춰보는 거라서 보폭과 간격을 재는 게 중요했고.
‘동양인은...... 한 명?’
나를 제외한 동양인은 한 명인 듯싶었다. 나머지는 전부 서양인인 것 같고.
하긴 자국이 이탈리아이니 동양인 모델을 구하는 것보다 서양인 모델을 구하는 게 더 쉬웠겠지.
다른 동양인 한 명은 나와 순서가 꽤 떨어져 있어서 내 앞뒤로는 전부 서양인이었다.
그렇게 대기 라인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을까.
“저기요.”
등 뒤에서 어깨를 손가락으로 치는 듯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꽃으로 머리를 장식한 미형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미소년?’
하이틴 영화에 나와도 꿇리지 않을 법한 외모. 하지만 키는 나보다 아주 조금 작은 것 같았다.
“오디션에서 당신 봤어요, 합격했나 보네요. 축하해요.”
“...... 당신도 합격한 거 축하해요.”
뭐라고 반응을 해줘야 할지 몰라서 일단 오디션에서 봤다고 하니 축하한다는 말을 다시 되돌려주었다.
‘이 사람도 오디션 보고 합격했나 보지.’
아니라면 다른 대답이 나왔겠지만, 그도 오디션을 본 입장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자 곧장 앞에서 리허설을 시작하겠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둥, 둥, 둥.
시작된 음악 소리와 함께 메인 모델을 필두로 하나둘씩 스테이지로 나가기 시작했다. 라인은 한 개, 동선은 비교적 길었고.
어김없이 내 차례가 다가와 무대에 가까워졌을 때.
“GO!”
재고 있던 타이밍에 맞춰서, 신호와 함께 한 발을 내디뎠다.
관중석에는 사람이 없었지만 서울패션위크랑은 완전히 다른 구조의 쇼장이었고, 정해진 동선을 걸어 다시 백스테이지로 돌아오자 대기 라인에 가 섰다.
총 3번의 페이즈가 있었기에 1차 리허설 동안 3번의 워킹을 하면서 낯선 장소에 대한 감을 익혔다.
리허설이 끝나자 모델들은 산개했고, 나도 아까 받던 메이크업을 마저 받은 뒤 헤어 스타일링까지 마치자
‘...... 이게 누구야’
거울 속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서 있었다.
조명 때문에 메이크업이 다 날아갈 걸 감안해서 진한 것도 있지만.
분위기를 아예 한쪽으로 치우치게 해서 그런가 이런 얼굴은 또 생소하네.
“준비됐나요?”
“됐어요.”
스탭의 질문에 준비가 됐다고 대답한 헬퍼.
곧이어 리허설을 시작한다는 말에 백스테이로 향했고, 이어진 2차와 3차 리허설에는 전부 옷까지 갖춰 입은 채로 진행해야 했다.
조명, 음향, 총감독과 디자이너들까지 긴장한 채로 이루어진 리허설.
모두가 집중하는 가운데 끝난 리허설이었지만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이제 다음은 진짜 쇼인가.’
그리고 그때, 내 눈에 백스테이지로 들어오는 사람 두 명이 포착됐다.
‘평범한 사람 같지는 않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입고 있는 옷을 보아하니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관객석에는 고위 관계자들이 있기도 했으니 그들 중 한 명일지도 모르고.
모델들은 3차 리허설이 끝나 대기하고 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까 들어온 두 명의 근처로 수석 디자이너를 비롯한 디자이너들이 모였다.
왠지 모르게 신경 쓰여서 그쪽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주위를 둘러보던 여자와 잠깐 눈이 마주쳤고.
여자는 이내 다시 대화를 나누는 거 같더니 그대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어.
내 쪽으로?
“이름이 뭐죠?”
“이우연...... 우연이라고 불러주세요.”
“좋아요 우연, 당신의 순서를 조정할 필요가 있어요.”
순서를 바꾼다고?
예기치 못한 말에 다시금 집중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 순서를 뒤로 미룰 것이며, 첫 턴은 그대로 가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때는 순서를 바꾸겠다고 말했다.
‘시간은...... 얼추 되겠네.’
바뀐 순서를 보고 시간을 가늠했지만 촉박하긴 해도 실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헬퍼들을 비롯해서 다른 이들에게도 변경된 순서가 전해지고, 일단락되는 걸로 보였고.
“잘해요.”
“그쪽도요.”
쇼가 시작되길 기다리면서 첫 번째 의상으로 갈아입은 뒤 대기라인에 섰다. 그러자 내 뒤에 있던 남자가 다시 한번 내게 말을 걸었고.
‘잘해야지.’
나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았다.
용서받을 수 있는 실수가 있고 용서받지 못하는 실수가 있듯이.
실패할 생각도, 실수할 생각도 없었다.
‘반드시 성공시킨다.’
그 열망이 너무나도 커져서, 머릿속을 지배하지 않도록 식혀야 했다. 첫 데뷔를 성황리에 끝마치겠다는 내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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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듯한 소리를 들었지만 CEO는 가만히 앉아서 차분함을 유지했다.
유필리아의 첫 4대 패션위크.
판도를 뒤바꿀 패션위크였다. 많은 이들에게 마크의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초청장을 돌렸고 그 결과 명성 있는 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불안한 건 기존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스타일을 도입한, 허울만 좋고 한편으로는 불안한 패션쇼라는 게 문제지.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냥 이번 시즌까지만 이전의 스타일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그 고집을 이길 수 있어야지.’
수석 디자이너인 마크 바이에른을 포함한 디자이너들이 반대를 외쳤다. 오히려 그런 큰 무대에서 독보적이고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면서.
물론 다른 디자인을 만들어내기엔 시간이 촉박해서 엉겁결에 밀어붙인 것도 없잖아 있었다.
“시작하네요.”
“제발, 제발.”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고, 드디어 시작한 쇼의 오프닝 멘트를 들으며 무대에 집중했고.
그는 부디 이 쇼가 성공하길 빌었다.
제발,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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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레이! 스프레이 갖고 와!”
“타이, 타이!! 신발 빨리 신어요”
쇼는 15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큰 쇼든, 작은 쇼든.
패션쇼의 백스테이지는 변함없었고, 나는 하마터면 변경 전 대기 라인으로 설 뻔한 걸 아무렇지 않게 변경된 대기라인으로 가 섰다.
대충 입은 옷의 매무새를 정리하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동시에 받으면서 신발에 발 하나를 집어넣었다.
내게 붙은 헬퍼만 해도 족히 서너 명.
‘변경됐을 때는 몰랐는데.’
변경된 내 차례 바로 다음이 메인 모델이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얼굴은 어디서 본 것처럼 익숙했고, 조각가가 마치 세공한 것처럼 이목구비가 뚜렷했으며 눈은 벽안이었다.
“쓰리! 투! 원! Go!”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해.
그런 메인 모델이 바로 내 뒤를 따라오겠지만.
나는 그 메인 모델 앞에서 마치 내가 메인 모델이라도 된 것마냥 마음을 먹고 워킹을 시작했다.
리허설 때와는 다르게 가득 차 있는 관중들.
그런 관중들에게 흔들리지 않고 음악소리에 집중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그들을 의식했다간 실수하기에.
booom! boom......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한 워킹이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한 번.
쇼가 시작될 때부터 느낀 거지만,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벅차서 숨을 쉬는 걸 까먹을 것만 같았다.
마지막 페이즈 그리고 피날레.
대미의 장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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