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chapter 95. 셀린느의 관심
* * *
생각지도 못한 거물이 낚여버렸다.
‘파스타...... 급후회 되네.’
쇼가 끝나고 딱 한 번 먹었었던 파스타가 괜히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래서 몸이 좀 안 좋아지더라도, 셀린느에 갈 때까지는 정말 물만 먹었고.
사람이 먹은 게 없다 보니 예민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
“누나 이거 물 어디서 샀어요?”
“편의점에서 샀는데... 이상해?”
“별로예요. 다음에는 이거 사지 마요.”
“알겠어.”
물만 마시다 보니 이제는 물맛도 구별할 수 있었다.
파리에 도착한 이후로 나는 어딘가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었고.
아마도 그런 내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건 예진이겠지만, 그녀도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챈 거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지.’
셀린느가 있는 파리, 파리가 내게 어떤 곳인가.
무려 전생에 내가 설 뻔했었던 무대이자 그런 나를 절망하게 만든 무대이며 그만큼 꿈에 그렸었던 곳.
옛날 생각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탈리아와는 다르게 괜히, 파리에 있으니 마음이 울렁거렸고.
“에이전시에서 연락 왔는데 내일 오후 2시쯤에 오래. 그때까지는 푹 쉬고 있어.”
“알겠어요. 누나도 쉬어요.”
보지 않아도 에이전시에서는 아마 쾌재를 지르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다름 아닌 셀린느에서 나를 보자고 하다니 이게 웬 떡인가 싶겠지.
한국으로 돌아가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다음 행선지가 난데없이 파리로 정해진 탓에 예진도 피곤해 보였다.
우리는 서둘러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고.
‘셀린느라......’
나는 씻고 나온 뒤 대충 머리를 털어내고 침대에 누워 셀린느에 대해 알아봤다.
셀린느는 프랑스의 귀족주의 감성이 묻어나는, 세련되고 우아한 디자인과 실용성을 겸비한 남성 패션을 선보이는 브랜드.
파리 컬렉션은 전 세계 패션 유행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4대 패션위크 중에서도 파리는 가장 전통 있고 영향력 있으니까.
셀린느도 그중 하나겠지.
“할 수 있어.”
나는 자기 암시를 걸었다.
과거가 아예 생각나지 않을 순 없었지만 그때와 지금은 너무나도 다르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애초에 나도 이우연이라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또, 이 세계는...... 남성 패션이 발달했다.
대우도 다르고, 환경도 자체도 달랐다.
그러니까 나는 천천히 시작하면 된다. 다시 한번 성공을 위해서 발돋움할 것이며.
“컨디션은 어때, 좀 괜찮아?”
“괜찮아요.”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결과로 만들어 낼 생각이었다.
****
이탈리아의 유필리아에 이어서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인 셀린느.
‘..... 뭐가 문제인 거지.’
인생이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몸소 경험하고 있는 중이었다.
말이 안 통하니 이보다 더 답답할 수는 없었고.
그들이 불어로 대화를 나누는 탓에 지금 나에게는 통역사가 격하게 필요했다. 급하게 추진한 만남이어서 그런 부분은 딱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한 번만 더.”
“좋아요”
이걸로 벌써 3번째 워킹.
보자마자 시작한 워킹이었지만 다시 한 번만 보여달라는 말에 나는 다시금 워킹을 했다.
하지만 뭐가 문제인 건지 그들의 제스처나 표정을 봤을 때 미묘한 얼굴이었고, 옆에 있는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걸로 봐서 좀처럼 좋은 분위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내가 앞에 있고 계속 워킹을 하라는 걸 보면 나와 관련한 이야기일 텐데.
‘답답하네.’
3번째 워킹이 끝날 때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워킹이 끝나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 방금 들어온 여자가 그들과 대화하더니 이내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워킹이 너무 여성스럽다네요. 다른 워킹은 없나요?”
“.... 다시 한번 워킹 해볼게요.”
한국어도 아니고 영어가 이렇게 반가울 때가 없었다.
‘뭐가 문제인지 이제는 확실히 알았어.’
답답했던 게 싹 가시고, 쉽게 정답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유필리아 패션쇼가 영향을 주기도 해서 나는 지금 어느 정도 임팩트 있는 파워 워킹을 선보였으니까.
‘아무래도 여성스럽게 느껴졌나 보지.’
그렇다면 바꾸면 됐다. 그들이 더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 쳐서 워킹을 하겠다고 말했고.
그러자 한 번 해보라는 듯 손을 내미는 제스처를 보이는 패션 디렉터에, 나는 다시 네 번째 워킹을 시작했다.
내 워킹의 틀은 그대로였지만 그 안에서 파워를 대신한 부드러움이 가미되고 충분한 여유를 가진, 깔끔한 워킹.
‘이번에는 좀 다르겠지.’
적어도 앞서 보여줬던 워킹과는 확실하게 다른 워킹이었다.
워킹이 끝나고 그들이 있는 쪽을 쳐다보니 내내 안 좋았던 표정은 어디 가고, 처음 보는 밝은 얼굴을 한 디자이너가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브라보!!”
오디션은 아닌 거 같고,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됐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것도 그럴게 지금 내 앞에 있던 그들은 한 명은 셀린느의 패션 디렉터, 다른 한 명은 셀린느의 디자이너였으니까.
‘어떻게 보면 합격한 거 같네.’
그렇게 나는 다시 예진과 함께 호텔로 돌아갔다. 마음 한구석에 있었던 불안과 걱정은 그나마 씻겨나갔지만.
“연락 따로 온 거 없어요?”
“응. 전부 연락 온 건 없다는데......”
좋은 방향으로 흘러갈 것 같다는 생각과는 달리 셀린느로부터 연락이 따로 없다고 한다.
‘젠장, 김칫국 들이마신 건가.’
하지만 이제는 진짜,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괜찮긴 했어.”
“그 정도 반응이면,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않아? 오히려 좋은 축에 속할 텐데.”
“후우..... 그래. 좋은 축이긴 하지.”
“인정할 건 깔끔하게 인정하자고 우리.”
셀린느의 패션 디렉터, 슬리먼이 이가 다 보일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그런 그의 반대편에 앉아있는 디자이너, 파비가 착잡한 심경으로 머리를 쓸어넘겼고.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가, 슬리먼이 입을 엶으로써 깨졌다,
“이번에 네가 구상한 이미지랑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지 않아?”
“그 몸이면 충분히 어울리고도 남겠지.”
슈퍼 슬림 모델.
우연은 많은 디자이너들이 선호하는 체형이었다.
그중에서도 셀린느는 마르면서도 다리가 긴 걸 체형을 선호했는데, 우연은 키에 비해 비율이 굉장히 좋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착잡하달까.
기본적으로 파리는 시크하고 도회적인 세련됨이 넘쳐나는 곳이었고.
대중화보단 창작을 중시하며 파리의 오트쿠튀르를 빼고는 세계 패션에 대해 논할 수 없었다.
기성복처럼 대량 생산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예술성을 중시하기도 했으며
그 때문에 오랜 전통을 가지고 나면, 물이 고이기 마련이었다.
“나중에 모델 캐스팅 할 때 한번 말 좀 해봐야겠어.”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네.”
“그런데 어쩌다가 그 동양인 모델한테 갑자기 꽂힌 거야? 원래는 그, 누구였냐 다른 녀석 아니었어?”
“맞아. 사실 로빈을 보러 유필리아 패션쇼를 간 것도 있었는데 오히려 다른 원석을 찾아버렸지.”
슬리먼이 능청스럽게 말했다.
현재 셀린느는, 뉴 셀린느와 올드 셀린느가 나눠져 있으며 그중에서 파비와 슬리먼은 뉴 셀린느에 속했고.
그런 판국에서 수석 디자이너가 아닌 이상 무언가를 결정하기도 어려웠고 모델 한 명, 한 명을 정하는 데에는 많은 입김들이 들어갔다.
물론 어렵다고 해서 아예 영향을 끼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패션 디렉터와 디자이너니까 뭐.
‘감이 왔었어.’
슬리먼은 쇼에서 우연이 자신을 지나쳐 갔을 때를 잊지 못했다.
분명 그 동양인 모델의 뒤에는 로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예상 밖의 우연이라는 인물과 마주쳐버려서.
쇼에 몇 없는 동양인 모델이기도 했지만 또 그만큼 컨셉과 확실했던 존재감 때문에.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우연의 뒷모습을 보면서, 문득 셀린느에도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자동으로 들었다.
“나이에 비해서 워킹은 확실히 노련해. 이미지도 개성 있는 편이고.”
“맞아. 그리고 그는 실전에서 더 빛나는 타입이야.”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 받는 스포트라이트라고 하기에는 과분한 면이 있었다.
뒤에 누가 있는 건가 싶었지만 그렇다면 굳이 유필리아가 아니었어도 됐을 거 같고.
파비에게 우연을 보여준 것도, 우연을 부른 것도 슬리먼이었지만 그도 조금은 호기심으로 추진한 일이기도 했다.
만남이 성사되고 나서는 슬리먼은 확신을 얻었고.
“당황하지 않고 대처했다는 것도 마음에 들고. 아 그냥 다 마음에 들었어.”
“이거, 다음 시즌 모델로 완전 낙점한 거 아니야?”
“그런가...... 근데 아직 모르지.”
다른 모델한테 꽂힐 수도 있잖아.
너무나도 슬리먼다운 말에 파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우연이 신인이라는 점에서 섣불리 행동할 필요는 없고, 셀린느는 거장이었으니까.
그렇게 결국 확정된 건 없었어도, 아마 우연은 모르겠지만 우연은 꽤나 얻어간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셀린느의 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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