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98화 (98/137)

〈 98화 〉 chapter 96. 잘 지냈어?

* * *

언 두 달 만에 한국으로 귀국했다.

출국했었을 때와는 달리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상태로 돌아왔고, 그동안 먹지 못해 한이 됐었던 기내식도 먹어봤다.

‘아직 스케줄 잡힌 건 없으니까.’

과식은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먹고 싶었던 걸 조금씩 먹었다.

그렇게 파리에서 한국으로 장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짐을 찾은 뒤, 출구로 나가려는데

찰칵, 찰칵ㅡ

나오자마자 연달아 터지는 플래시 세례들.

“아.”

“우연 씨! 밀라노 패션위크의 최연소 모델로 서신 소감 한마디만......”

사람이 예상했던 것보다 꽤 많았다.

마이크를 들고 내밀면서 질문을 외치는 기자까지.

공항에 기자가 있을 거라는 예진의 언질이 있기는 했었지만, 잠시 당황해서 가만히 있다가 이내 다시 차분함을 되찾았다.

“운이 좋게도 기회를 얻어 오디션을 보고 난 후 밀라노 패션쇼에 서게 될 수 있었습니다.”

쏟아지는 질문들 사이에서 그나마 답변해도 될만한 것들을 골라 몇 개 답변했다.

나머지는 추후에 있을 인터뷰를 통해서 알리겠다고 말했고, 예진을 따라 걸음을 옮기니 기자들을 비롯해 카메라를 든 이들까지 전부 동시에 이동해버렸지만.

공항을 빠져나오니 비로소 상황이 완전히 종료될 수 있었다.

그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택시가 아니라 꽤나 익숙한 차였는데.

“오랜만에 타보네요.”

“내가 운전 안 하니까 뭔가 좀 이상하다.”

“가는 동안 좀 쉬세요.”

“감사합니다.”

데마시아에서 나온 다른 직원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여자는 예진에게 쉬라는 말을 건넸고, 예진은 알겠다며 의자를 뒤로 조금 젖혔다.

‘항상 예진이 운전했었는데.’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으니 좀 생소하긴 했다.

여태껏 택시를 많이 타서 그런지 택시와는 전혀 다른 차의 승차감이 좋았고, 익숙한 안락함에 나도 몸에 힘을 풀고 의자에 기댔다.

‘자네.’

비행기에서는 안 자더니 예진은 차에 타니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는데, 휙휙 뒤바뀌는 풍경이 확실히 이탈리아, 프랑스와는 달리 한국이었다.

배는 딱히 안 고팠는데 한국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 나니까 떠오르는 음식 메뉴 몇 개가 있었고.

그렇게 고요한 차 안에서, 잔잔하게 틀어져 나오는 음악 소리를 뒤로 한 채 나도 잠들어버렸다.

“도착했어요.”

“아...... 네”

도착했나.

몸을 흔드는 손길에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한 채로 눈을 비비니 차는 멈춰져 있고, 옆을 바라보니 예진은 아직 자고 있는 상태.

‘잘 자네.’

나는 예진이 깨지 않게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운전석에서 따라 내린 여자가 캐리어를 하나둘씩 꺼내주었고.

문 앞에 캐리어를 하나둘씩 옮겨두고 마지막 캐리어 하나를 손에 든 채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 그, 혹시 사인 하나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네 당연히 해드릴 수 있죠. 그런데 어디에...?”

횡설수설 말을 하던 여자는 빠르게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캐리어를 잡고 있던 손을 풀고, 수첩에 사인을 한 뒤 다시 여자에게 돌려주었고.

그러자 고맙다며 인사한 여자가 허둥지둥 차로 돌아갔다.

‘이제 나도 들어가야지.’

잠에서 깬지 얼마 되지 않아 몽롱한 상태긴 했지만 정신은 어느 정도 돌아와 있었다.

가족들도 볼 겸 해서 자취방이 아니라 바로 본가로 돌아왔고, 가족들에게는 내일 도착한다고 거짓말 해놓은 상태였으니.

띵동ㅡ 띵동ㅡ 띵동ㅡ...

비밀번호를 알고 있어도 나는 초인종을 연타했다.

“누구세.....”

“나야.”

이렇게 하는 게 더 서프라이즈니까.

눈이 휘둥그레진 다윤을 보고 나는 캐리어를 끌며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

본가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호들갑을 떨면서 냉장고를 탈탈 털어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밥상을 차렸다.

‘집밥이 확실히 맛있긴 맛있어.’

많이 먹지는 못했지만, 오랜만에 먹는 집밥이어서 그런지 맛 하나만큼은 끝내줬다.

그렇게 가족들과 하루를 보내면서 푹 쉬었고.

내가 밀라노에서의 패션쇼를 마치고 귀국했다는 사실은 기사를 통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SNS에도 게시물을 올리면서 한국으로 돌아왔음을 알렸으며.

일이 일이다 보니 귀국 바로 다음날, 에이전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은 집에서 먹지?”

“네. 그럴 거 같아요.”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된장찌개 해둘 테니까.....”

된장찌개? 이건 못 참지.

오늘 저녁은 기필코 집에 와서 먹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집을 나서자,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였는데 가까이 가서 뒷문을 여니 곧장 운전석에서 뒤를 돌아본 예진과 눈이 마주쳤다.

“왔어?”

“네. 누나 오늘은 운전대 잡으셨으니까 자면 안 돼요.”

“잠은 어제 실컷 잤다.”

“저도요.”

확실히 집은 호텔에서 잤었을 때와는 또 다른 편안함이 있었다.

본가에 있는 내 방은 그대로였고, 짐은 어차피 다시 자취방으로 가져가야 하니 풀지 않은 상태라 정말 뒹굴거리기만 했으니까.

“기사 뜬 건 좀 봤어? 꽤 많이 났던데.”

“봤어요. 데마시아에서 일 열심히 하나 봐요.”

“그렇겠지. 앞으로 네 일도 더 많아질 거고”

“누나도 바빠지겠죠.”

“에휴.”

장난스럽게 짧은 한숨을 뱉은 예진을 보면서 웃었다.

데마시아에서 제대로 홍보를 하는지 기사도 많이 났고, 포털 사이트를 비롯해 SNS에도 소식이 심심치 않게 전해지고 있었으니까.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본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일 테니 그런 의미에서 배는 절대로 침몰하면 안 됐다.

나는 어떤 구설수와도 엮이지 않으리라 다짐했고.

예진과 함께 장난을 치면서 수다를 떠니 금세 회사에 도착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회사 안으로 들어가니 익숙한 얼굴과 마주하게 됐는데.

“왔구나.”

“안녕하세요.”

오자마자 대표를 마주쳤다.

건치를 드러내면서 환하게 웃는 주성훈 대표를 보면서 나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고.

우리는 그대로 대표실로 소환당했다.

이번에는 예진도 내 뒤를 따라 대표실로 향했고, 안으로 들어가니 오랜만에 보는 캐스팅 팀장도 자리에 있었다.

“편하게 앉아 편하게. 아 주스 줄까?”

“괜찮습니다.”

“자 한 잔 받아.”

이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하지만 나는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면서 목을 축였고, 모두 자리에 앉자 캐스팅 팀장이 흰색 보드판을 끌고 오면서 입을 열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죠.”

탁상 위에 올려져 있던 종이들이 펄럭이면서 하나둘씩 넘겨졌다, 화이트보드에는 마카가 움직이면서 글자가 채워졌고.

내게 들어온 일들을 조율하면서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활동을 먼저 선정, 거기에 대한 컨셉이나 기획도 같이 살펴보고.

그러면서 꽤 놀랄만한 것들도 발견하게 되었다.

‘엘르 화보뿐만이 아니라...... 보그 코리아라니.’

리디아 에이전시를 통해서 알게 된 제안들과는 달리 데마시아 에이전시가 추진할 수 있는 스케줄들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아쉽게도 표지 모델은 아니었지만.

분량도 많고, 인터뷰와 화보를 동시에 싣고 싶다는 제안이었기에 충분했다.

“밀라노 패션위크 때문에 비시즌이어도 일이 많이 들어왔어.”

“열심히 해야겠네요.”

“데마시아에서도 최선을 다해 서포트 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비시즌이 이정도인데, 다음 시즌이 되면 어떻게 될까.

잠시 셀린느를 떠올린 나는 더 이상 김칫국을 마시지 않기 위해 셀린느를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완전 빽빽한 시즌과는 다르게 그래도 쉬는 날이나 시간적 여유가 조금씩은 있었고, 간간이 해외 촬영을 나간다는 가정하에는 조금 많긴 했다.

‘오늘 저녁인 된장찌개를 포기해야 할 수도.’

하지만 다행히 앞으로 약 4일간은 스케줄이 잡혀있지 않았다. 충분히 관리한다면야 먹을 수 있을 거 같네.

“리디아 에이전시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들도 매니저를 통해서 전달하거나 미팅이 필요하면 다시 회사로 부를게요. 아직 해외 활동은 정해진 게 없어서”

캐스팅 팀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뭐.

그렇게 회의를 끝마치자 우리는 제일 먼저 대표실을 나섰다. 밑으로 내려가 실장과 인사를 나누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탔을 때는

“어라.”

“응? 왜 무슨 문제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회의하는 동안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놔서 미리보기 알림들이 와 있었다.

그중에서도 캐톡 알림이 떠 있어 확인하기 위해 잠금을 풀고 캐톡으로 들어갔는데......

“흐음.”

예상치 못한 사람에게서 연락이 와 있어서.

그대로 캐톡을 읽고 답장을 작성한 나는 메시지를 전송했다.

: 오랜만이다. 너도 잘 지냈어?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