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99화 (99/137)

〈 99화 〉 chapter 97. 집들이

* * *

“아.”

무의식중에 물어뜯고 있던 입술이 뜯어지면서 입안에 피 맛이 스며들었다.

그냥 둘 생각이었지만 자꾸 피가 나와서 휴지 한 장을 뜯어 입술을 꾹 눌렀고, 그러면서도 정신은 다른 데 팔려있었다.

‘...... 한국 돌아왔나 보네.’

결국, 잘하거나 힘내라는 안부 메시지 하나 보내지 못한 채로 우연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캐톡을 보내볼까.

전화를 해볼까.

아무렇지 않게 연락해 볼 생각이 들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은 좀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연이 알아 봐줄까, 올리는 게시물들마다 꾸준히 좋아요를 눌렀지만 연락은 아무것도 안 왔고.

‘하긴 그렇게 좋아요가 많이 달리는데.’

합리화를 하다가도, 학교라는 매개체가 사라지니 끊겨버린 연락과 관계를 생각하니 다시 우울해졌다.

연락을 하지도,만날 일도 없으니.

“차라리 다행인 걸 수도.”

다행인 건가.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 날, 그를 좋아한다는 마음을 확실하게 자각해버렸으니까.

고백할 용기도 없는 짝사랑 따위.

더 커져버리기 전에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란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친구로만이라도 남고 싶은걸.”

인터넷으로 괜히 첫사랑이나 짝사랑에 대한 글들을 찾아헤매 읽어봐도, 결국에는 용기가 필요하다거나 한 발자국 더 다가갔더라면 하는 내용들의 글밖에 없었다.

그것도 아니면 완전히 지나버린 추억이라 묻어두거나 그리워하거나.

아니면 슬퍼하거나.

‘나는 어떤 상태지?’

하나뿐인 친구를 짝사랑하게 되었어도, 우연의 여자친구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는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고, 내가 아니어도 다른 멋지고 좋은 여자들을 수도 없이 만날 테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기분은 나락으로 떨어져 갔다.

마음을 인정했다고 해서, 다른 것들도 쉬이 인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결국 어제 올라오고 올라오지 않은 우연의 SNS를 염탐한 뒤, 팬카페와 에이전시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다른 정보가 업데이트됐는지 확인해봤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았고, 우연의 캐톡 프로필을 보고 있었을 때 즈음.

“뭐야, 지금 시간에 왜 집에 있어?”

“그, 오늘은 쉬는 날인데......”

“쉬는 날이 어딨어.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연습해야지 실력이 늘지. 그렇게 게으르면 노력하는 다른 애들한테 금방 역전당할걸?”

원래 이 시간에 안 들어오셨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쉬지 못할 것 같았다. 나는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서 덤덤하게 옷을 갈아입었고.

집을 나서자 갈 수 있는 곳은 한곳밖에 없었다. 학원 연습실.

가는 동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키는데, 아까 마지막으로 보던 게 우연의 캐톡 프로필이라서 그게 떠버렸고.

잠시 멈칫다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면서 충동적으로 1:1 채팅을 눌렀다.

“......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메시지를 한 개 보낸 후였고.

우연에게 보낸 메시지가 전송되어, 읽히지 않았다는 표시인 1이 떠 있었다.

‘갑자기 뜬금없이 연락해서는 뭐하자는 거야.’

아마 우연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얘는 왜 갑자기 연락하는 거지, 하면서.

그렇게 1:1 채팅방을 나가 캐톡 채팅창 목록만 띄워놓고 우연에게 답장이 오는지 안 오는지만 계속해서 확인했는데.

“안 오네......”

연습실에 도착해서는 일부러 신경을 돌리려고 연습에 집중했으나.

여전히 안 오는 답장에 계속해서 핸드폰을 껐다 켰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고, 얼마 없던 배터리가 방전되버렸다.

‘바쁘겠지.’

그렇게 우연에게서 메시지 온 걸 확인할 수 없게 되자 오히려 마음은 더 편해졌지만.

늦은 밤, 집에 도착해 핸드폰을 충전시키고 나서야 우연에게서 온 캐톡을 볼 수 있었다.

****

“아 다 귀찮다.”

이래서 약속을 잡아놓으면 항상 나가기 전에 준비하기가 귀찮아서, 깨고 싶은 욕구가 든다.

따지고 보면 나가는 건 아니긴 했지만

아니 그래서 오히려 더 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았다.

‘별수 없지.’

애초에 내가 약속이 많은 것도 아니고,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깨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오랜만에 연락해서는 어떻게 한 번 겨우 얼굴 보기로 한 걸 파토낸다?

내 다음 스케줄을 생각하면 다음 만남은 기약하기 어려우니까.

“읏차.”

약속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약 1시간 30분.

대충 캐리어도 좀 정리해서 치우고쓰레기도 버리러 나갔다 와야 할 거 같았다.

연예인 병 같기는 했지만괜히 밖에서 만났다가는 사진 찍힐 수도 있으니까.

집이 워낙 보안이 철저한 곳이기도 하고, 사람도 많이 살아서 기자가 잠복해가면서까지 사진을 찍어낼 정도는 또 아니었다.

그렇게 만남 장소는 내 자취방으로 결정됐고.

‘서아랑은 오랜만에 보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 준비를 하는 건 그나마 수월했다.

그동안 연락할 일도 잘 없기도 했고, 아웃스타그램을 열심히 하다 보니 개인 연락까지는 미처 잘 신경 쓰지 못했으니까.

혹시나 해서 서아의 SNS나 캐톡을 찾아봤지만 역시나, 올라온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서아답네.’

캐톡 주고받은 것만 봐도 둘 다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청소는 대충 끝냈고.”

옷도 멀쩡한 걸로 갈아입으니, 시간이 얼추 한 40분 정도 남았다.

마지막으로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오자 한 30분 정도 남아 있어서 나는 핸드폰 들어 이따 시켜 먹을 배달 음식들을 살펴봤고.

‘...... 이거 먹으면 두 끼는 굶어야겠는데.’

칼로리 폭탄인 메뉴들의 향연 속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스크롤을 계속해서 내렸다.

그렇게 배달음식 목록을 훑는데.

캐톡ㅡ

“뭐야 벌써?”

캐톡 알림이 떠서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약속 시간 20분 전에, 도착했다며 캐톡이 왔고.

나는 곧바로 현관을 열어주는 버튼을 누르고, 페브리즈를 대충 뿌렸다. 너무 과하지만 않게.

띵동ㅡ

“어, 왔ㅇ....”

“안녕.”

“.... 일단 들어와, 그 과일 바구니랑 휴지는 이리 주고.”

문을 열자 나보다 낮은 시야에 있는 서아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예전보다 더 예뻐진 거 같긴 한데.’

누가 봐도 비싸 보이는 과일 바구니와, 자기 몸통만한 휴지를 한 손에 들고 있는 걸 보고 서둘러 집으로 들여보냈다.

서아는 처음 와서 그런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집안을 살펴보기에 바빴고.

“이런 거 안 사 와도 되는데......”

“응? 아 집들이 선물이야.”

“집들이?”

“어. 좀 많이 늦은 거 같긴 한데 그래도......”

“고마워. 이따가 밥 먹고 과일도 먹자.”

쭈뼛쭈뼛 말을 꺼내는 서아를 보고 바르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이왕 사 왔는데.

‘나는 아주 조금만 먹어야겠지만.’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칼로리가 계산된 탓에 빠르게 생각을 지워냈다.

과일 바구니를 식탁에 올려놓은 채 우리는 거실로 이동했고.

“편하게 앉아. 뭐 마실 거라도 줄까?”

“됐어.”

그러면서 서아는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기에 바빴다.

내 예상대로 어색함이라고는 없었고, 그저 오랜만에 친구랑 재회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애초에 그런 사이긴 하지만.’

“캐톡으로 다 얘기해서 물어볼 것도 별로 없네. 배는 안 고프냐? 뭐 좀 시킬까 해서.”

“나는 다 괜찮아. 그냥 너 먹고 싶은 거 시켜. 뭐라도 먹어야 할 거 같은데”

“난 어차피 시켜도 많이 못 먹어. 관리해야 되거든”

“아......”

“그래도 내일 쉬니까 내일 운동을 더 열심히 하면 되지 뭐.”

일단 시키고 오는데 시간이 있으니 미리 주문시켜놓자는 차원에서 우리는 배달앱으로 들어가 메뉴를 골랐다.

‘아마 지금 먹으면 점심 겸 저녁이 되겠네.’

족발보쌈 세트 소자를 하나를 시킨 뒤, 배달까지 1시간 걸린다는 메시지에 그러려니 했고.

“대충 이따 밥 오면 영화나 한편 보고, 도착할 때까지 그냥 얘기나 하자.”

“그래.”

서아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말을 먼저 꺼내지 않아서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학교 다니는 건 어때? 이번에 수학여행도 갔다 왔잖아.”

“완전 재미없었어. 그나마 레크레이션이 재밌긴 했었는데 나머지는 그다지.....”

“그래? 어디 갔는데?”

대충 알고 있었던 2학년 1학기에 간다는 수학여행을 기억 속에 끄집어내 물었다, 그러자 서아의 입에서는 이야기가 술술 나왔고.

‘수학여행 같은 건 좀 재밌겠는데.’

반마다 준비한 장기자랑 중 실용무용과가 한 영상을 보면서 나는 단번에 서아를 찾아냈다.

‘이때 나는 이탈리아에 갔었나?’

수학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내 근황으로 넘어가면서 이탈리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가장 최근으로 보자면 밀라노 패션쇼지만, 이탈리아 얘기가 나오자 나는 하나둘씩 있었던 썰을 풀기 시작했고.

“.... 그래서 거기서 만났던 여자를 다시 편의점에서 마주친 거야, 자기는 그쪽으로는 관심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번호를 주고 가는 거 있지? 그,”

띵동ㅡ

“아. 음식 왔나 보다.”

벌써 한 시간이나 됐나?

시계를 보니 45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15분 빨리 왔네.

일단 현관을 열어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 조금 기다렸다가 문을 열어 문 앞에 놓여져 있던 음식을 가져왔다.

“냄새 장난 아니야.”

힐끔 서아를 보니 서아의 시선도 봉지에 고정된 상태였다.

다행이네, 아까 안색이 조금 안 좋아 보였던 건 기우였나 보다. 배고팠나 보지 뭐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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