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화 〉 chapter 98. 우리 친구잖아 맞지?
* * *
“아 진짜 개 맛있어.”
틀어 놓은 영화는 완전히 뒷전이고, 먹는 거에 집중한 우연을 보자니 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잘 먹네.’
사실 현관에서 우연을 봤을 때부터 전보다 훨씬 마르고 키가 큰 것처럼 느껴졌는데,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살이 빠졌다는 게 느껴졌다.
특유의 분위기는 어디 가지 않았어도 어딘가 모르게 보호 본능을 더 자극한달까.
그런 우연에게 먼저 연락하기를 수백 번 고민했었을 때가 바로 엊그저께인데.
지금 이렇게 우연의 자취방을 처음으로 와서, 같이 밥을 먹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이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았더라면.’
정말 용기를 조금이라도 더 냈었다면, 뭔가 달라지진 않았을까.
하지만 이미 시간은 지나갔고, 지금 현재가 중요했다.
입에 들어있는 고기를 씹으면서 젓가락을 들어 상을 한 번, 우연을 한 번 곁눈질했고.
영화는 이제 그냥 사운드 채우는 용도로 전락해버렸다.
“슬슬 배가 찬 거 같기도 한데.”
“벌써? 조금만 더 먹어. 너무 적게 먹는다.”
“으음...... 조금만 더 먹지 뭐.”
쌈을 싸서 몇 개를 먹었다고, 배가 찬 거 같다며 말하는 우연에 화들짝 놀라 젓가락으로 고기를 들어 그의 앞접시에 옮겼다.
그러자 우연은 잠시 젓가락을 입에 물고 고민하더니 이내 보쌈을 입안에 넣었고.
‘귀엽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면서 다시금 먹기 시작하자 어느새 족발과 보쌈이 바닥을 드러냈다.
“아까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괜찮아. 내일 운동 열심히 한다며”
“진짜 두 끼는 쫄쫄 굶어야 할 거 같은데”
“굶는 건 몸에 안 좋아.”
어쩐지 허망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우연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작게 웃음이 흘러나왔고.
정말이지, 걱정했던 모든 것들이 무색하리만치 어색하지 않았으며 일상적인 대화들이 오갔다.
‘다행이야.’
그래도 우연이 아직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다른 남자들과 우연은 매우 달랐고, 어떻게 보면 여자 같다고 할 수 있는 면을 가지고 있어서 더 편했다.
전에 인터넷으로 찾아보던 도중 본 남자들의 언어라는 걸 만약에 우연이 사용했다면 하나도 못 알아차렸을 테니까.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럼 이틀 뒤에는 다시 일하는 거야?”
“응. 화보 촬영 있어.”
“나중에 한 번 사봐야겠다.”
“내가 공짜로 하나 줄 테니까 안 사도 돼. 아무래도 여러 곳에서 따로 나올 거 같아서.”
아무것도 모르는 우연은 사지 말라고 했으나, 이미 집에는 여태 우연이 촬영했었던 패션지나 광고 사진까지 고이 모셔둔 상태였다.
따로 돈을 모아두기도 해서 얼마가 되든 나오면 일단 살 생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연이 준다는 걸 마다할 생각은 없었다. 이건 평생 비밀이니까.
“이제 슬슬 치우자.”
“그래.”
앉아서 좀 쉬기도 했겠다, 둘이 동시에 움직이니 치우는 건 빨랐다.
둘 다 보지 않은 영화는 어느덧 중반을 향하고 있었는데, 애초에 보질 않았으니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처음부터 다시 볼까?”
“그래.”
과일을 들고 온 우연이 앉으면서 리모컨을 조작해 다시 영화를 처음부터 틀었다.
창밖을 보니 아직 해가 지지 않아 밝은 게 느껴졌고, 습관적으로 영화가 아닌 우연을 보려다가 혹시나 우연이 이상함을 느낄까 일부러 영화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온 신경은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지만,
그러다 우연이 가져왔었던 과일을 먹으려고 포크를 든 손을 움직였는데
“응?”
“어.”
들고 있던 포크로 둘이 동시에 같은 멜론을 찍었다.
줄곧 영화에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돌아가, 우연과 그대로 얼굴을 마주했고.
“너 먹어.”
멜론에 꽂힌 포크를 빼고 다른 멜론을 찍어 입에 넣는 우연의 눈과 마주치면서
‘어떡하지.’
순간적으로 얼굴에 열이 오르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애써 다시 고개를 영화 쪽으로 돌리고.
‘다른생각다른생각......’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입에 넣은 멜론이 무척이나 달았던 게 기억에 남았다.
****
“내가 괜히 의심하는 건가.”
멍하니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이 이내 침대 위로 떨어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쉴 생각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건지.
‘남이 들으면 도끼병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증거도 없고, 오로지 심증일 뿐인.
‘서아가 나를 좋아하나?’
한 번 의심하게 되면 나머지 의심은 자연스럽게 딸려 오게 됐다. 서아가 나를 향해 보이는 얼굴과 말투, 태도까지.
따지고 보면 여태까지 크게 느낄 만한 일이 없었고, 이상하지도 않았으나.
“걔는 거기서 왜 그런 표정을 해서.”
잊혀지지가 않았다. 같은 멜론을 찍어서 그냥 양보해주었을 뿐이었는데.
그나마 영화를 보고 있어서 다행이었지. 아니었더라면 필시 어색해질 만한 상황이었다.
그것도 그럴게 서아의 볼이 발그레해지더니 그대로 급하게 영화로 시선을 돌리는 게 느껴졌으니까.
‘그러면 왜?’
왜 그랬을까.
동갑내기의 친구인 남녀 둘.
분명 오랜만에 만난 사이였건만 괜한 의심이 자꾸만 들었다.
그 이후에는 그냥 영화를 보고, 영화가 끝나자 간단하게 영화에 대한 대화를 나눈 뒤 서아가 먼저 이제 가봐야겠다면서 몸을 일으켰으니까.
영화가 끝났을 때는 이미 해도 진 상태였다.
배웅을 해주겠다고 했으나 극구 사양하는 모습에 결국 안 나가긴 했다만, 오히려 둘이 있던 집에 혼자 남아 있으니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잠깐 설렜을 수도 있지.’
만약 그동안 좋아했었다고 한다면 연락을 어떻게든 이어갔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핸드폰을 들어 잘 들어갔냐고 서아에게 캐톡을 보냈고, 서아는 가던 도중 이상한 사람들을 봤다며 아무렇지 않게 썰을 풀기 시작했다.
그래, 하나밖에 없는 친한 친군데.
캐톡ㅡ
물을 한 잔 마시고 누우려다, 캐톡 소리에 서아인가 싶어 잠금을 해제하니 미리 보기로 이름이 보였다.
[송이: 뭐해?]
나는 핸드폰 액정을 빤히 쳐다보다
“연애는 아직, 아직이니까......”
그대로 핸드폰 화면을 껐다.
적어도 앞으로는 일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으니까.
****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우연 씨도 촬영하느라 수고했어요!”
“저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줄 수 있을까요?”
“아 네. 당연히 되죠”
스탭은 예진에게 핸드폰을 건네주고, 내 옆에 서서 브이를 한 채로 사진 몇 장을 찍어갔다. 나는 브이 대신 표정만 계속해서 바꿨고.
오늘은 유독 역동적인 포즈들을 많이 해서 그런지 몸이 좀 쑤셨다. 소품이 아니라 세트 위주로 신경을 많이 써서.
‘뭐, 나름대로 신선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욕조를 이용해서 찍었던 사진들이 대부분 다 잘 나온 거 같아 기대가 됐다.
확실히 한국에서 하는 촬영이 외국에서 했었던 촬영들보다는 더 편했고, 말이 통하는 것도 그렇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춘 사람들이어서.
포토그래퍼 레나를 떠올리면 정말 선녀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전에 유필리아 룩북을 보니 실력은 또 좋아서, 제일 잘 나온 사진이 레나가 찍은 사진이었지만 결과물이 좋은 만큼 과정이 순탄치 못해서.
앞으로는 실력도 좋고 인성도 좋은 포토그래퍼들을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리디아 에이전시에서 연락 왔는데, 엘르 촬영 일자 잡힌 거 같더라. 스케줄 조정 들어간다는데?”
“그래요?”
“어. 비행기 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또 타겠네.”
“그러게요.”
나는 예진의 말에 맞장구치면서 핸드폰을 들어 온 캐톡 알림을 확인했다, 그리고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고.
개인적으로 오늘 찍은 사진들 중에서 제일 잘 나온 사진을 보내줬는데, 분홍기가 도는 진한 화장 때문인지 돌아온 건
분홍색 애니메이션 캐릭터였다.
‘아니, 뭔데 묘하게 비슷한 거 같냐?’
그게 또 웃겨서 웃으면서 자판을 연달아 두드리자
“누구랑 연락해?”
“아. 친구예요. 제가 오늘 찍은 사진 보여줬더니 이거 보내는 거 있죠?”
“...... 귀엽네.”
예진이 물어오는 말에 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띄워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예진도 피식하고 웃었고.
가는 동안 간간이 예진과 대화함과 동시에 울리는 캐톡에 답장하고 대화를 주고받았다.
어쩌다가 거의 매일같이 하는 연락이었는데, 항상 재미있어서 나도 모르게 웃으면서 캐톡을 보내고 있었다.
“도착했어. 오늘 푹 쉬고 내일 또 보자.”
“네. 누나도 조심히 들어가요.”
“어야.”
차에서 내려 오피스텔로 들어가면서도,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에서 징징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이제 대충 대화 마무리 지어야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층을 눌러놓고서, 핸드폰을 들어 캐톡 답장을 보냈다. 그러자 바로 1이 사라지고 답장이 돌아왔고.
[서아: 쉬고 나중에 연락해ㅋㅋ]
나는 더 이상 보내지 않은 채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해외 촬영 날짜가 정확히 언제라는 거지? 실장한테 연락해봐야 하나.”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SNS에 들어가 오늘 찍은 사진을 포함한 게시물을 올리고 실장한테 연락을 넣었다.
이제 쉬어야지.
오늘 일도 이제 이걸로 끝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