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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살아가는 법-105화 (105/137)

〈 105화 〉 chapter 103. 꿈이 아니야

* * *

2월, 드디어 패션위크가 시작됐다.

시작하자마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오히려 스케줄을 소화했었을 때보다 더 안 바빴고.

잡혀 있는 쇼에 따라서 시간을 투자해야 했었기 때문에 마지막 피팅, 리허설, 메이크업을 하는데 시간을 길게 쏟았다.

다만 심적인 부담감 만큼은 여타 다른 스케줄보다 당연히 컸고.

그럴 때마다 마인드 컨트롤을 했지만, 처음 유필리아의 밀라노 패션쇼를 섰었을 때와는 확연하게 차이 나는 무대 스케일들이었다.

쇼장 자체가 다르다 보니 동선들도 다 달랐고.

모든 걸 편안하게 받아들일 순 없으니, 나는 결국 어느 정도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면서 쇼에 임하기로 다짐했다.

세계 4대 패션위크는 패션쇼가 열리는 장소가 제각기 달라서 쇼가 끝나자마자 다음 쇼를 위해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이럴 때는 참 다행이네.’

차 안에서 잠들고, 밥을 먹었던 것들이 도움 됐다. 물론 다음 패션쇼에 관련해서 생각하느라 잠은 아예 자지 못했고.

S/S 패션위크가 시작된 날부터 멈출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뉴욕, 런던, 밀라노의 패션위크가 끝나자

“파리...... 올게 왔구나.”

“그래도 이번 패션위크만 끝나면 정말 끝이네요.”

“끝까지 힘내자. 지금까지 다 잘해왔어.”

예진과 아델이 한 마디씩 거들었다.

아마 여기서 더 해외에 머물게 된다면 한국에 안 돌아간 지도 약 반 년 정도는 됐을 게 분명했다.

첫 시작인 뉴욕을 제외하고 다른 두 패션위크도 만만치 않았지만 마지막인 파리의 패션위크 주간이 닥치자 긴장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가장 많은 패션쇼를 서야 하고, 명품 브랜드들도 대거 포진하고 있으니까.

프라다의 세컨 브랜드인 미우미우와 루이비통이 같은 날 패션쇼를 한다는 점에서 아주 바쁜 하루가 어느 날이 될지는 알고 있었다.

“이제 비행기 타러 가죠.”

“알겠어요.”

의자에 앉아있다가 몸을 일으키니 순식간에 머리가 자동으로 핑하고 도는 느낌을 받았다.

‘아 현기증.’

어쩔 수 없다. 그나마 한 번도 안 쓰러진 게 용하지.

현기증은 요즘 들어서 많이 느끼는 바람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서서 가만히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나를 본 두 사람이 잠깐 기다려줬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괜찮아지자 걸음을 옮겨 파리행 비행기에 탑승.

‘나중에 이코노미 어떻게 타냐.’

이제는 비즈니스 클래스가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나는 승무원의 친절한 서비스를 받으면서 몸을 눕혔고, 일단 자기 전에 한 번 더 동선 숙지를 할 생각이었는데

“아 졸리네......”

몇 개의 패션쇼 동선을 다시 숙지했을까,

막상 몸을 눕히니 밀려오는 졸음에 손에는 종이를 든 상태 그대로 눈을 스르르 감았다.

이제, 정말 클라이맥스에 치달았다.

****

“아, 잠시만요 눈에 속눈썹 들어간 거 같은데......”

메이크업을 받던 도중 눈이 따끔거린다 싶어서 봤더니 속눈썹이 들어가 버렸다.

이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 버린 바람에 손으로는 뺄 수 없어 인공 눈물의 힘을 빌렸고, 그러자 따끔거리던 게 말끔히 사라졌다.

‘느낌이 안 좋네.’

고작 속눈썹 하나 들어간 거 가지고 무슨 유난일 수도 있겠지만.

여태껏 눈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어서 괜히 찝찝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크게 신경 쓸 건 아니어서 잠깐 그런 기분이 들다 말았고, 역시나 딱히 상관 없었는지 쇼는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파리에 오고 나서부터 하루에 적어도 2, 3개씩은 이어지는 패션쇼.

계속해서 이동을 해야 했고, 혹여나 배가 나오면 안 되니 이동하면서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없었다.

그나마 물 대신 토마토 주스를 몇 입 마시긴 했는데.

‘그것마저도 마시긴 마셨었나?’

기억이 잘 안 났다.

사람이 계속해서 안 먹다 보면 이제 딱히 배가 고프지 않은 경지까지 도달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달까.

“오늘은 진짜 물만 마실 거예요.”

그렇게 대망의 수요일이 됐을 때는, 선언한 거처럼 물만 조금씩 마셨고.

오후 12시 30분에 잡혀 있는 미우미우 쇼를 위해 쇼장에 도착하자 쇼타임 50분 전이었다.

마지막 피팅을 하려고 다른 모델들과 함께 대기 중이었는데 그러던 와중에

“취소해.”

리허설을 앞두고 다른 모델들이 줄줄이 착장을 취소 당하는 걸 목격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마지막 차례였는데, 피팅은 별다른 문제가 없어서 다행히 통과했고.

아무리 계약한 모델이라 할지라도 쇼에 서기 직전, 바로 캔슬 당할 수 있는 운명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피팅이 끝나자 숨 돌릴 틈도 없이 메이크업과 헤어를 받고 쇼 타임을 20분 남겨둔 채 리허설을 진행했으며

워낙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모두가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였다.

“템포!!”

앞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내 신경은 다른 쪽에 가 있었다.

‘신발이 작네.’

어떻게든 신기는 신었지만 신발이 막상 걷기 시작하니 굉장히 불편했다. 굽도 그렇고 발뒤꿈치가 아파왔으니까.

다른 곳은 안 그랬는데 유독 파리에서 신는 신발들은 전부 다 작았다.

‘참아야지.’

캔슬 당한 것도 아니고, 걸을 때마다 발뒤꿈치가 아픈 긴했지만 그런 건 뒤로 한 채 워킹했다.

피팅과 워킹 모두 문제없음을 확인하고, 리허설이 끝나 잠깐 신발을 벗으니 발뒤꿈치 쪽의 통증이 찌릿찌릿하게 올라왔다.

“빨리!”

“여기 발 넣으세요.”

“스카프 어딨어.”

물론, 백스테이지는 그런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정신없는 쇼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제 몇 분 뒤면 정식 쇼가 시작할 시간이니까.

‘후우......’

이럴 거면 듣지 말 걸.

아델로부터 이미 미우미우 쇼에 무조건적으로 참석할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들었더니 쿵쿵거리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떨려.

떨려?

손을 쫙 펴서 보니 손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이런 떨림을 느껴본 게 얼마만인가.

특히나 신발 때문인지 발이 신경 쓰이는 탓에 조금 마음이 걸렸지만, 어차피 무대 위에 올라간다면 내색 하나 내지 않아야 했다.

다른 것에 집중을 하고 있었을 무렵.

“쇼 시작합니다!”

쇼를 시작한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백스테이지의 풍경과 다름 아닌 이곳에 내가 서 있다는 것에서

“GO!”

나는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이 모든 건 꿈이 아니야.

****

단 하루뿐이고 단 몇 십분이었지만 그 패션쇼가 모델 한 사람의 운명을 뒤바꾸기에는 충분했다.

반대로 저 나락으로도 갈 수 있겠지만.

다행히도 미우미우 쇼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나름 극적인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신발이 발목을 잡긴 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쇼가 끝나자 우리는 빠르게 다음 루이비통 쇼를 위해서 움직였다.

루이비통 쇼라는 명성답게 굉장히 많은 관객들과 화려한 라인업이어서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 없었으니까.

‘그런 패션쇼에 내가 선다니 꿈만 같지만.’

앞서 미우미우 패션쇼를 하고 와서인지 더 차분해진 상태였다.

루이비통의 디자이너인 킴과 함께 좋은 분위기 속에서 미팅했었던 걸 생각하면, 그래도 미우미우보다는 마음이 편해졌으니까.

그렇게 제시간보다 조금 일찍 루이비통 쇼장에 도착했다.

리허설을 하기에 앞서 마지막 피팅을 먼저 해보는데......

“신발이 안 들어가는데요?”

척 봐도 작아 보이는 신발이 또다시 복병이 됐다.

‘발 크기도 작게 했어야 하는 건가.’

허탈했다. 신발을 신겨주려던 헬퍼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지만 들리지 않았고.

‘신발을 아예 못 신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다른 신발을 구할 수도 없고, 하필이면 마지막 피팅에서 새로 신게 된 신발이 안 맞는다니 낭패 중에 낭패였다.

“아.....”

차라리 미우미우 때처럼 어떻게든 들어가기만 하면 참고했었을 텐데.

이건 뭐 아예 들어가지조차 않으니

헬퍼가 이도 저도 못하는 사이 모델 한 명씩 마지막 피팅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킴을 비롯한 무리가 내 쪽으로 다가왔고.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그들 무리는 다른 곳으로 향했다.

나는 그 자리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지만, 마음 한편에서 이미 스물스물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증폭되었고.

“우연.”

“네.”

“당신이 조금 부어 보인대요. 신발도 안 맞는 거 같고 발 상태도 안 좋아 보이니까.”

“...... 네.”

“옷 갈아입고 나가면 될 거 같아요. 다음 기회가 있겠죠.”

아까 킴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내게 와서 말했다.

명백한 축객령. 캔슬.

‘대체 왜 루이비통 쇼를......’

눈앞이 아찔해지는 감각이었다. 마치 벼랑 끝으로 떨어진 거처럼. 심장이 내려앉았고 얼음처럼 몸이 굳었다.

나는 모델이었지만 더 이상 그 패션쇼에 필요하지 않은 모델로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정말, 꿈이 아니네.”

나는 쇼장을 벗어나고 나서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릿속에는 이미 오만가지의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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