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106화 (106/137)

〈 106화 〉 chapter 104. 성공과 실패는 하루 차이

* * *

“...... 괜찮아. 신발이 안 맞는 건 어쩔 수 없잖아.”

“그래요 우연, 그런 경우는 빈번하게 있어요.”

매니저들은 한달음에 달려왔다.

내 스케줄 중에서 루이비통 쇼가 제일 마지막 패션쇼였기에, 루이비통 쇼에 서지 못한 나는 그대로 시간이 텅 비어버렸다.

내일의 스케줄을 도모하자는 결론으로 우리는 호텔로 가고 있었지만

가는 내내 차 안은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심란한 건 매한가지여서 원래 먼저 말을 꺼냈을 나는 입을 다물다 못해 눈을 지그시 감았고.

안타깝게도 신발 때문일 거라는 그들의 말은 내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저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는 장면은 딱 하나였으니까.

모두가 정신없이 쇼를 준비하고 있는 와중에 캔슬을 당한나와, 디자이너 팀을 비롯한 무리가 나를 쳐다보고 몸을 돌렸었던 그때.

나는 그동안 내 안에 쌓여져 있던 게 오만이라는 걸 깨달았다.

'과연 그때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눴을지는 정말 궁금하지만.'

다른 브랜드들보다도 나를 그렇게 좋아해주었던 킴이 내린 선택이 충격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렇게 내가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자, 그런 나를 봤는지 더 이상 아무 말도 오가지 않은 채 완전한 적만 속에서 우리는 이동했다.

“오늘 많이 힘들었지? 정말 수고했어. 내일이 더 중요하니까 오늘은 푹 쉬고.”

호텔에 도착해 차에서 내린 뒤, 적막함이 깨지자 방에 들어가기까지 둘은 내게 많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하지만 방 안으로 들어오니 전과 대비되어 더 고요하게 느껴졌지만.

'리디아랑 데마시아에도 연락 들어갔겠지.'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웠다.

시계를 보니 시각은 오후 8시 30분.

쇼를 하지 않았기에 시간이 참 많이 남아버렸다.

디자이너 킴에 대한 오만, 루이비통 쇼에 대한 오만, 그리고 무엇보다

"모델로서의 나의 오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나의 오만함이 그동안 나를 채찍질했다.

기대한 만큼 다가온 좌절감.

기대한 만큼 돌아온 배신감.

숨이 턱하니 막혀왔다. 그런 숨을 토해내듯이 뱉어냈고.

"진짜 좆같다."

이루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 휘몰아치면서 나는 애써 한쪽 팔을 들어 그대로 눈을 가렸다.

****

“지금몇 시지.”

처음 누웠던 상태 그대로, 많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벌서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옷이나 갈아입어야지.'

외출복 상태 그대로였기에 나는 갈아입을 옷을 챙겨서 그대로 화장실로 들어갔고.

샤워기를 트니 물이 머리카락을 적셔왔다. 물을 맞으니 또다시 생각하게 되네.

손을 들어 따뜻한 물에서 차가운 물 쪽으로 레버를 옮기니 차가운 물이 나와 머리카락을 적시기 시작했으며

그 물을 계속 맞다가 정신을 차린 뒤 씻고 나왔다.

“하루가 참 기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면서 시간을보니 아직 11시조차 되지 않은 걸 보고 잠깐 실소했다.

일부러 무음으로 설정해놨었던 핸드폰 화면을 키자 잠금 화면을 풀기 전부터,여러 알림들이 미리보기로 보였고.

'아델과 예진은 그렇다 치고,주성훈 대표한테도 연락이 와 있었네.'

나는 말리지 않아 축축한 머리를 뒤로하고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들의 답장을 하기 시작했다.부재중 전화도 있었지만 전화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대부분이 위로의 말과 응원의 말 좋은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몇 시간 동안 생각만 하면서찬물 샤워까지 강행한 결과 정신적으로 조금 나아지긴 한 거 같았는데.

“아......”

답장을 전부 다 마치니 다시 한번 현타가 찾아왔다.

모델을 하면서 겪게 된 첫 좌절.

사실 이번S/S패션위크 패션쇼를 준비하면서 아예 캔슬이 안 났던 것도 아닌데.

애초에 모든 미팅이 성공적이지도 않았었고.

하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한편,지금은 오히려 자책이 들기도 하고 쉽사리 넘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그마치 루이비통 쇼니까. 킴 디자이너니까.

부어 보인다는 말 한마디가 가슴에 꽂혀버린 것만 같았다.

다른 쇼에 섰었어도,루이비통 쇼에 서지 못했다는 것 자체 하나만으로도 심장을 쿵 내려앉게 만들었고.

지금도 그 백스테이지에 서 있었던 감각이 생생한데.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야.”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라는 것이.

그 모든 걸 잘 해내겠다 다짐한 나의 가장 큰 좌절이 되었듯이.

앞으로 잘하면 돼.근데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근데 잘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데......"

지나간 일이하나도 잊을 수 없어서미련을 불러일으켰다. 여러모로 다른 생각을 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고.

차라리 다른 걸 함으로서 신경을 돌리자는 생각으로패션지들을 다시 보고지금까지 찍었었던 이번 시즌 룩북과 화보를 봤다.

보그 코리아에 실렸던 내 화보와 인터뷰도 다시 정독했으며

화보 속에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이번 생에 단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실패.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결과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 실패는 그 실패일 뿐.

모델로서의 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결국 마음 정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 쇼를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조금이라도 자둬야 컨디션에 지장이 없을 텐데.

‘수면제라도 달라고 해야 하나’

애초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일단 수면제를 먹는 건 최후의 보루다.

그렇게 잠이라도 청해볼 심산으로 불도 다 끈 채 베개에 머리를 대고 있는데, 한동안 잠이 오지 않아 몸을 뒤척이면서 일쑤였다.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해 침대에서 일어나 예진에게 연락했을 때는.

: 혹시 수면제 있어요?

보낸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수면제 한 알을 가져다주겠다는 말에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고.

많이 복용하면 안 좋다며 딱 한 알만 주길래 반신반의 했는데 수면제를 삼키고 침대에 다시 눕자

"으음......"

뒤척인지 얼마 안 지나서 자연스럽게 생각이 멈춰져가고, 자동으로 눈이 감겼다.

진작에 먹을 걸 그랬네.

약의 도움을 받아 눈을 감았지만 다음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감정 정리가 확실히 돼있었다.

****

하루 만에 일어난 심경 변화.

잠을 푹 자지는 못했지만 어제 하루 동안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던 생각들이 한층 정리되어서 괜찮았다. 그리고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이, 지나가버린 일이니까.

'오늘 일에 집중해야지.'

어제 느꼈었던 많은 것들이 재로 남아 사그라들고 오히려 더 진정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루이비통 쇼의 기회는 잃은 게 되었어도, 아직 다른 기회들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여지껏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어서 온 패닉이었다. 막상 겪어보니 그다지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아니지만.

'어쩌면 당장 다른 패션쇼에 서야하니 그런 현실이 나를 끄집어낸 걸 수도.'

개인의 의지보다 환경이 더 큰 작용을 일으킬 때가 있다.

루이비통 쇼에서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 무겁게만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한결 나아져 가벼워졌으니까.

그렇게 나는 다시 바쁘게 패션쇼에 임하기 시작하면서, 하루 중 마지막 패션쇼인 셀린느 패션쇼를 준비하러 도착했다.

"우연, 오늘 컨디션 어때요?"

"최고예요."

사실 최고는 아니지만,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나는 뒷말은 생략한 채 셀린느 디자이너의 말에 대답하며 옷을 입었다. 내 몸에 딱 맞아떨어지는 자켓.

쇼타임 1시간 전,여전히 쇼를 위한 준비는 바빴지만 그 속에서 나는 오히려 편안함을 찾았다.

"저거 저기에 두면 위험할 거 같은데 좀 치워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위치한 행거를 보고 부딪히면 누군가 하나 다칠 수도 있으니 치워달라고 말했다.

리허설이 끝나자 한층 더 도는 긴장감이었지만 다른 모델들도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그중에서도 메인 모델을 맡은 나는 차분함을 유지했다.

무려 셀린느의 메인 모델 아닌가.

오프닝을 제일 먼저 밝힐 나는, 난생 처음으로 파리 패션위크 패션쇼에서 제일 맨 앞에 섰다.

앞에 있는 건 다른 모델이 아니라 메인 PD 그리고 나갈 무대 틈 사이로 비치는 환한 조명이 다였고.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든지 말든지 앞에 서있는 메인 PD가 인이어에 집중하는 걸 보면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이번 생의 첫 실패를 불과 어제 경험하고 이번 생의 첫 성공을 오늘 경험하게 되다니

'운명의 장난인가.'

그런 생각을 끝으로 본격적으로 쇼가 시작됐음을 스태프가 모두에게 알렸다. 그리고 나는 나가기 직전

"지금!"

내가 지금 입은 옷의 디자이너인 파비와 눈이 마주쳤고.

나는 그 시선을 먼저 외면한 채 백스테이지 밖으로 나갔다.

앞에는 아무도 없고, 오로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관중들이 시야에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걷기 시작한지 얼마 안 지나 의식 속에서 사라졌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무대를 포기할 수 있을까?'

답은 당연하게도

아니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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