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107화 (107/137)

〈 107화 〉 chapter 105.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 * *

모든 F/W 패션위크가 막을 내렸다.

뉴욕부터 시작해서 파리까지 모든 패션쇼가 끝났고, 불과 반년 전에는 단 하나의 패션쇼에 섰었던 내가 이번 시즌에는 무려 총 24개의 런웨이에 올랐고.

그러다 보니 시간은 어느새 3월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시즌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동안 엄청난 스케줄과 식단을 소화했으며 때로는 힘들기도 했지만.

‘지나간 일은 미화되기 마련이지.’

그간 겪었었던 모든 일들이 결과로 보상받게 되며 좋게좋게 받아들여졌다. 특히나 루이비통 쇼.

당시에는 엄청난 패닉으로 다가왔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다르게 받아들여졌으니까.

루이비통 쇼에 서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나는 그 다음날에도, 그 다다음날에도 패션쇼 런웨이에 서야 했다.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앞으로의 기회가 완전히 없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루이비통 쇼로 인해서 무언가가 깨지고 난 뒤 더 단단해진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나는

‘조급해했으니까.’

한 번 제대로 넘어지고 나서야 나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됐다. 사실 조급한 것만큼 일을 그르치는 거만한 게 없었고.

나도 몰랐지만 내 안에 자리 잡은 조급함이 조바심이 나를 그동안 채찍질했다.

나는 새로 태어났으니까.

여기가 내가 아는 세계가 아니니까.

남성 모델이 더 대우받을 수 있으니까.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큰 만큼 성공에 대한 갈망도 컸다.

더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더 특별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갈망이 나를 목마르게 했다. 그래서 조금도 쉬지 않고 뛰어왔던 거고.

한 번 넘어지고 나서야 브레이크가 걸린 거지.

하지만 나는 모든 패션쇼가 끝난 지금 모델로서의 나에게 만족했다.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이제 더 이상 조급해 하지 않고 천천히 모델로서의 활동을 이어나가고 그만큼 내 인생을 즐길 테니까.

어려서부터 모델 하나만 바라보고 자랐기에, 이번 시즌에서 얻은 내 넓어진 시야가 최고의 수혜였다.

물론 내 내면의 변화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확실히 패션위크가 끝나니까 여유로워졌네.”

“그래요?”

“응. 좋은 거지 뭐.”

패션위크 때문인 줄 아는 예진에게도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아델은 급하게 리디아 에이전시로 가야 해서 자리를 비웠고, 남은 건 나와 예진뿐.

원래 같았으면 당장 한국으로 돌아갔었겠지만

“IMG랑 FORD 둘 다 계약 조건이 좋아서 고민이네요. 브랜딩으로 따졌을 때는 IMG가 더 좋은 거 같기는 한데.”

해외 에이전시 계약으로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나는 턱을 괴며 고민했고, 예진은 두 에이전시에 대해 미리 공부했는지 내게 이런저런 말들을 해주었다.

패션위크를 진행하면서도 끝나고 나서도 여러 곳에서 제의가 들어왔기에.

이왕 이렇게 된 거 해외 에이전시를 둘러보면서 계약할 곳을 물색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그럴게 나는 아직 에이전시가 리디아와 데마시아밖에 없는 상태였고 데마시아는 이제 계약이 끝나니까.

무엇보다 각 나라별로 에이전시를 둘 필요성이 있기도 했고.

리디아 에이전시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위치해 있으니 파리와 뉴욕 에이전시도 하나씩 계약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나에 대해 아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여러 곳에서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까.

때마침 3대 모델 에이전시로 꼽히는 두 곳 IMG와 FORD에서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IMG 에이전시랑 계약해야겠어요.”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고요.”

“제발 그러자.”

앞에 말했을 때와는 달리 격하게 반응하는 예진을 보고 피식 웃었다.

처음에야 좋았지, 가면 갈수록 한국 음식이 생각 나는 건 어쩔 수 없었으니까. 나야 뭐 식단 관리 때문에 어쩔 수 없다지만.

예진은 그동안 참고 있었던 게 많았는지 한국에 가면 먹고 싶은 음식이나 먹을 예정인 음식들을 줄줄이 나열했다.

‘벌써부터 입에 침 고이는데?’

물론 나도 한국에 가면 먹을 게 태산이었다.

시즌이 끝난 자유를 만끽할 생각이니까.

그래, 사실 여유를 되찾네 마네 하지만 이미 결과가 최상이란 걸 알고 있고, 아직 할 수 있는 것들이 무궁무진하니 전에 비해서 자연스럽게 여유가 생길 수밖에 없지.

물론 통장 잔고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해외 에이전시 일을 끝마치고 곧바로 한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 소문이라도 난 건지 공항에서의 플래시 세례는 전보다 거세졌지만.

“오랜만이네 한국.”

정말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았으니

: 지금 뭐해?

한 명, 한 명 차근차근 만날 생각이었다.

****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며 가져야 하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해야 한다.

성격과는 상관없이 이런 불도저 같은 면을 가진 이들은 패션업계에 꽤나 많았다. 있는 사람이 더 한다는 말이 그러하니까.

시작은 작은 관심.

‘저 모델 누구야?’

그러한 이들의 작은 관심은 곧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특히 이번 셀린느 패션쇼에서 메인 모델을 했다는 것이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그가 패션쇼에서 입었던 옷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

많은 패션쇼에 얼굴을 비췄지만 우연은 모든 인터뷰들을 거절했다. 한 거라고는 예전에 나왔던 보그 코리아의 인터뷰가 전부.

우연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아 애가 타기도 했지만 야금야금 그에 대한 정보들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고

그의 인터뷰는 없을지라도 그의 사진은 있었기에.

F/W 시즌 기사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우연의 팔로워 숫자도 똑같이 쌓이기 시작했으며

셀린느의 디자이너인 파비가 그에 대해 극찬했다는 소리가 들리면서 그 위세는 더 강해졌다.

데뷔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유례없는 관심과 실력을 보여준 모델에게 자연히 관심은 쏠릴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완전히 신인이라는 딱지를 떼고 어느 정도 반열에 오른 모델 수준이었다.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종종 다른 이들을 통해서 하나씩 나오기는 했지만 오히려 평판은 좋아져만 가서.

에이전시를 비롯한 브랜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연의 에이전시가 빈약하다는 걸 눈치챈 세계 3대 에이전시가 첫 번째고.

많은 브랜드들 중에서도 우연에게 지대한 관심을 쏟기 시작한 명품 브랜드가 두 번째였다.

프라다(PRADA).

미우미우는 10대부터 20대까지의 남성들을 겨냥한 프라다의 세컨드 브랜드.

우연이 미우미우 패션쇼에 모델로 서면서, 미우미우 패션쇼에 참석한 관계자인 프라다의 디렉터이자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로부터 관심을 얻어냈고.

뿐만 아니라 동양인 남성 모델의 진출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었던 추세였기에 더욱더 우연에게로 가는 관심은 막을 수 없었다.

모델임과 동시에 SNS 팔로워 수도 만만치 않았고, 무엇보다 우연의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 “미우치아 프라다가 우연을 초청하고 싶대.”

아주 조용히 우연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격동하기 시작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일지도 몰랐다.

****

“음...... 우연이가 저희랑 하려고 할까요?”

실장이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누구 한 명 그 말에 화낼만 한데도 시위는 조용했고, 그런 실장의 옆에 앉아있는 캐스팅 팀장 또한 같은 생각이었으니까.

‘벌써 2년이 지났네.’

엄청난 신인 모델을 배출해낸 데마시아 에이전시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분위기가 축 처졌다.

당장 우연이 한국으로 귀국하는 내로 그들이 논해야 할 문제는 다름 아닌 재계약이었으니까.

“저희랑은 재계약 안 하겠죠?”

“뭐 일단 최선을 다해서 설득은...... 해봐야겠지만 사실 큰 기대는 없지.”

우연이 행보를 주목한 많은 에이전시들이 속속들이 얼굴을 내비치고 있는 상태였다.

대놓고 데마시아 에이전시에 연락하는 곳도 있는가 하면, 우연에게도 이미 연락이 숱하게 갔을 테니까.

‘서울 패션위크가 엊그저께 같은데.’

애초부터 모델 개인의 역량이 뛰어났다.

뭐 우연이 잘 될 때마다 기쁘기는 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현재 우연을 데마시아가 붙잡을 수 있을지에 대한 건 의구심이 들었으니.

지금은 너무나도 커져버린 우연이었다.

“만약 다른 에이전시였어도 성공했었겠죠.”

“우리라서 더 성공한 걸로 생각하자고.”

원래라면 추진했었을 이벤트나 팬미팅 같은 것들은 이미 기획이 되다가 멈춰진 상태였다.

그야 계약 기간이 종료되면 데마시아에서 주관할 수 없는 일이니까.

주성훈 대표는 우연을 어떻게든 잡을 생각을 하고 있긴 하지만, 이미 반쯤은 안 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장이나 캐스팅 팀장은 반쯤 체념한 상태로 우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들어온 연락과 제안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그렇게 우연이 정식으로 한국으로 귀국한지 삼일이 지나지 않아

“오랜만이에요.”

“...... 오랜만이야.”

거의 반년 만에 우연이 데마시아 본사를 찾아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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