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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로 살아가는 법-115화 (115/137)

〈 115화 〉 chapter 113. 팬미팅 (2)

* * *

나이를 함부로 가늠할 수 없어 모두에게 존댓말을 사용했고, 팬들은 존댓말을 쓰는 사람부터 반말을 쓰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기분 나쁘거나 그러지는 않았고.’

반말을 사용한다는 건 그만큼 친밀감 있게 생각하는 거였고, 존댓말이어도 문제는 없었다.

“돈이 어딨다고 이런 걸 사 왔어요.”

“진짜 주고 싶어서 그래.”

“저 주신다고 사오신 거니까 그래도 잘 쓸게요, 대신 다음부터는 이렇게 큰돈 쓰지 않기로 약속.”

“......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얼마 안 가 서로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그리고 새끼손가락에 힘을 줘서 풀지 못하게 하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그런 모습을 싱글벙글 웃으면서 바라보다가

“놔줄까요?”

“응? 응, 아 아니.”

로봇처럼 버벅대는 모습을 보고 난 뒤 작게 웃으면서 손가락의 힘을 풀었다.

막상 닿았던 손가락이 풀리니 아쉽다는 게 얼굴에서 다 드러났지만.

‘어쩔 수 없지.’

한 명당 쓸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 보니 컨트롤을 해가면서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끝까지 아쉽다는 얼굴의 팬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녀가 줬던 선물은 뒤에 있던 예진이 빠르게 챙겨갔다.

미련이 남은 팬이 가고 기대로 가득 찬 팬이 다시 오고.

나는 이제 사인이라면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다.

이 정도로 손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누가 사인해달라고 하면 순식간에 완성할 듯.

“이거 써주세요!”

“오, 이런 건 또 처음 보는데”

모자에 토끼 귀가 달려 있고, 꽃으로 장식되어 있는게 꽤 고퀄리티처럼 보였다.

머리에 쓰고 있었던 왕관을 벗고 모자를 머리에 쓰자 확실히 묵직한 착용감이 느껴졌고, 조금 큰 거 같기는 해도

“어때요 잘 써졌어요? 괜찮나?”

“어...... 어... 네.”

어째 마주치는 팬들마다 전부 어버버 거리는 것 같은데.

보통은 내가 화보집에 사인하고 있는 동안 질문이라거나, 말을 건네오는데 모자를 준 팬은 말이 없었다.

내가 사인을 마치고 고개를 들어 팬을 바라보며 화보집을 내밀자

“지금 세계정복 가능할 거 같아요.”

“네?”

갑자기 급발진해서 하는 말에 약간 얼 탔다. 그 와중에 표정은 뭔데 진지해 보이냐고.

조금 난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싫지는 않아서 나도 웃으며 팬의 손을 잡았다. 손잡는 거 정도야 충분히 해줄 수 있으니까.

사실 처음 손을 잡아달라고 한 팬의 손을 잡아준 이후로 뒤에 있는 사람들 모두 잡아달라고 해서 이제는 그냥 자연스럽게 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00명 중에 20명 정도가 남자, 나머지는 전부 여자였고.

‘내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손을 잡아볼 줄은 몰랐는데.’

준비해 온 선물이 정말이지 다들 가지각색이어서 선물 받는 재미도 같이 있었다.

‘편지는 나중에 다 읽어봐야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뒤에 경호원이 서 있었지만, 적어도 내게 적의를 가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뭔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는 긴장한 것처럼 보이거나, 들뜬 것처럼 보이거나 둘 중 하나였으니까.

“이제 20명 정도 남았어.”

예진이 선물을 가져가면서 작게 귀띔했다.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람들을 마주하는 것도 또다른 재미로 다가왔다. 그것도 그럴게 전부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들이다 보니.

“헉.”

“우와, 얼굴 엄청 빨개졌어요 지금!”

다들 하나같이 놀리는 맛이 있으니까.

억지로 나오는 웃음이 아닌 정말 자동으로 피식거리거나 활짝 웃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 나도 맨 첫 번째 팬을 상대할 때는 그래도 조금 떨렸는데.’

지나면 지날수록 노련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팬미팅이지만 동시에 팬사인회도 포함해버렸기 때문에 여러모로 색다른 경험을 한 번에 할 수 있었다.

자, 이제 다음 사람.

또다시 아쉬운 표정의 팬이 떠난 빈자리는 순식간에 다른 이가 와서 채웠는데, 여느 때와 똑같이 고개를 돌려 팬과 아이컨택 하려는 순간

“어?”

문자를 쓰고 있었음에도 눈이 마주치자마자 단번에 송이라는 걸 알아챘다.

‘뭐야 얘가 왜 여깄어. 어떻게 온 거야?’

말문이 턱 막혀 말하지 못하고 있었을 찰나 송이가 내게 먼저 인사했다.

“안녕.”

“뭐야 네가 여기 왜 있어? 팬미팅 당첨돼서 온 거야?”

“응. 운 좋게도 한 번에 뽑혔네, 네가 하나 줬었잖아 그때.”

그때?

‘그러고 보니...... 하나 줬었지 응모권.’

마지막으로 만났었을 때 개인 화보집을 건네주면서 송이가 응모권도 함께 달라고 해 줬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근데 그거 하나로 당첨돼서 온 거라고?’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사실 경쟁률이 별로 안 됐던 건지......

송이가 올려둔 쇼핑백을 한 번 바라본 뒤 나는 입을 열었다.

“네가 올 줄은 진짜 상상도 못했네. 차라리 미리 말했으면 먼저 하나 자리 빼줬을 텐데.”

“그렇게 왔으면 나 여기 있는 사람들한테 다 돌 맞았어.”

“그것도 맞는 말이지. 근데 뭐하러 선물까지 사 왔어.”

“다들 사오던데?”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놀랐지만, 사인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오히려 더 편해졌고.

뒤에서 예진이 눈치를 주고 나서야 이제 다음 차례로 넘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시간 계산을 못했네.

나는 다른 팬들처럼 가볍게 송이의 손을 잡아채 짧게 힘을 꽉 주었다가 놔줬다.

‘내 팬으로 온 거니까.’

다른 사람들은 오래 잡고 있었는데 송이는 손잡아 주는 걸 까먹어서.

팬미팅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니 어딘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송이를 보낸 뒤, 다음 팬을 맞이했고 아까 예진이 20명 정도 남았을 대를 기점으로 10명을 넘게 한 거 같은데

이제 슬슬 끝이 보인다고 생각할 때쯤

“헐.”

넌 또 왜 여깄어?

다시 한번 익숙한 얼굴이 등판했다.

‘얘는 또 어떻게 온 거야. 얘도 그때 준 한 개로 당첨돼서 온 건가?’

환하게 웃고 있는 서아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서아는 아무렇지 않게 가져온 상자를 옆에 내려두고 나에게 화관을 건네줬는데

“이런 거 너한테 한번 씌워보고 싶었음.”

“진짜 서프라이즈네. 어떻게 왔는지는 둘째치고 왜 말 안 한 건데?”

“네 말대로 서프라이즈니까.”

뻔뻔하게 해오는 말에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서프라이즈 제대로 성공했네.’

송이에 이어 서아까지 정말 왔을 거란 건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송이가 왔었을 때의 놀람과는 달리 고마운 마음이 더 크게 들었다.

‘둘 다 바쁠 텐데 용케 와준 거니까.’

사인을 해주고 서아에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했다. 덧붙여서 나중에 만나서 밥 먹자는 약속도.

그리고 이제 다음 차례로 넘어가야 할 때가 되자

“그......”

“응?”

“아니야 아무것도. 힘내.”

뭔가를 말하려는 듯 우물쭈물 해하더니 서아는 그대로 몸을 일으켜 자리를 벗어났다.

‘나중에 물어봐야지.’

여기서 말하기에는 좀 그런 걸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나는 서아가 가고 난 뒤 다가온 팬에게 다시 인사하면서 사인하기를 반복했고, 아니나 다를까 그 뒤로 세 명을 마지막으로 사인회가 완전히 끝났다.

더 이상 대기하는 팬도 없이, 1부 때처럼 그대로 객석에 앉아있는 팬들을 보면서 체감상 오랜만에 마이크를 들었고.

“그래도 한 명씩 얼굴을 봐서인지 우리 조금 친해진 거 같네요. 그렇죠?”

“네!!!!”

처음부터 이러는 건 여전하네.

아니 그때보다 더 커졌나? 우렁찬 대답 소리가 들려왔다.

사인회가 끝났으니 이제 2부도 거의 끝나가는 참이었고, 마지막 하나를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자 그러면 우리 이제 곧 있으면 헤어져야 하는데, 제가 방금 여러분들한테 선물을 엄청 많이 받았잖아요? 그래서ㅡ”

내가 뜸을 들이자 스탭들이 쇼핑백이 올려져 있는 긴 책상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쪽으로 쏠리고 나도 그들이 책상을 내려놓길 기다리다가 다시 입을 뗐을 때는

“저도 선물을 준비해 봤어요.”

팬미팅을 준비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인 선물, 역조공의 시작이었다.

****

“엄청 많네요.”

“먹을 거는 따로 냉장 보관해야 돼서 빼놨어.”

“보니까 과자도 그렇고 군것질할 것들 엄청 많던데 조심해야겠어요.”

“나 줘.”

“그럴 순 없고.”

과자부터 시작해서 쿠키, 케이크, 마카롱 등 다양한 디저트를 봤었던 것 같았다.

나는 팬미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올라탔고, 옷은 편한 걸로 갈아입었어도 메이크업을 아직 안 지워서인지 얼굴이 조금 답답했다.

‘아주 기운이 쭉쭉 빠지는 거 같네.’

뒤에 실린 선물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몸은 의자에 기대 담요까지 덮고 있는 신세였다.

팬미팅을 하는 내내, 아니 끝나기 직전까지에도 지쳤다는 생각이나 힘들다는 생각은 전혀 안 했었던 거 같은데 이렇게 혼자 남게 되니 또 힘이 빠지는 거 같네.

사람들이 왜 팬, 팬 거리는 건지 알 거 같았다.

전생에 이어 현생에서도 모델 일을 했지만 대게 톱스타가 아닌 이상 모델들에게 팬은 크게 없었기 때문에.

가수들이나 다른 연예인들이 자주 언급하는 팬들이 보고 싶다는 말이, 이번 생의 나에게도 적용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 앞으로 열심히 할 거예요.”

“거기서 더 열심히 하면 쓰러져.”

“그래도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겪고 나니 원동력이 생기는 것 같았다.

‘큰일 났네.’

너무 달콤한 걸 맛봐버려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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