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chapter 117. 생각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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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일어나야 하는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난 탓에, 아침부터 핸드폰을 붙잡고 있었다.
“나도 염색 한 번 해보고 싶네.”
그러던 도중 아웃스타그램에 올라온 송이의 사진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이미지 변신이 제대로 될 거 같긴 한데.’
그런 내 이미지를 나 혼자만 쓰는 게 아니다 보니 섣불리 할 수 없었다. 염색 한 번 했다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아쉽지만 나중으로 미뤄야지.
간간이 화보 촬영을 하다 보니 벌써 시간은 5월이었고.
다음 F/W 시즌이 9월인 걸 감안하면 준비 과정까지 생각해 약 한두 달 뒤면 또 해외로 나가 한국에는 안 들어올 예정이었다.
‘송이도 활동 열심히 하네.’
저번에 말했었던 배역으로, 그때 봤었던 송이의 모습이 이제는 화면에서 보인다는 게 조금 신기했다.
사람은 뭐든지 상대적이기 마련이고, 광고나 화보 촬영 같은 스케줄이 있었지만 시즌이었을 때와는 비교되어서 그다지 바쁘다는 느낌은 안 들었다.
반복되는 하루의 루틴.
“으음, 오늘은 뭐 입지.”
몸을 일으켜야 할 때가 되자 슬금슬금 이불 밖으로 나왔다.
고민이라고 한다면야, 오늘 뭐 입을지 정도.
옷도 그렇지만 액세서리들도 많아서 날마다 뭘 착용할지 고민이었다. 그것도 그럴게 나갈 때마다 그날 입은 착장이 사진으로 올라가니까.
‘오늘은 미팅도 있으니’
깔끔한 걸로 입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네.
결정을 내리자 거침없이 옷을 골라서 입었고, 거울을 보자 확실히 사람은 꾸며야 된다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준비를 다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제 나가야지.”
모델로서의 하루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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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출연이요? 갑자기?”
“우리도 네 연기력을 몰라서 그 부분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정말 네 외모가 그 인물에 딱 맞는다고 단호하게 그러시더라고.”
“으음......”
캐릭터의 외양이 굉장히 중요한 요소긴 하지만, 발연기면 다 소용없을 텐데.
어쩌면 무모하게 온 거 같은 영화 캐스팅 제안을 보면서 나는 턱을 괴었다. 감독의 전작이 꽤나 유명한 탓에 데마시아에서도 킵한 거 같은데.
‘연기까지는 무리지.’
잠시 송이 생각이 났지만 고개를 저었다.
나 스스로는 모델이라는 이미지가 가장 주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너튜브에 춤 영상이 올라가기도 했고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한 걸 보면.
‘확실히 유명해지고 나니까 따라오는 것들이 꽤 많았다.’
“아쉽지만 거절해야 될 거 같네요. 영화 찍는 게 쉬운 것도 아니고...... 시즌 몇 개 통으로 날릴 거 같은데 지금은 하나에만 집중하고 싶어요.”
언젠가 생각이 바뀐다면 모를까 지금은 전혀 연기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내 생각을 들은 주성훈 대표가 알겠다고 대답했고, 원만하게 일처리를 하겠다고 말하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러면 다음 거.”
“다음이요?”
“응. 이거 봐봐.”
주성훈 대표가 옆에 있던 파일을 하나를 가져오더니 내 앞으로 밀었다.
‘이게 뭐지?’
겉에는 무지였기 때문에, 한 장을 열어젖히자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 보이는 것들은 전부 익숙한 사진들이었고.
화보, 그것도 비슷한 느낌과 스타일을 가진 걸 모아둔 걸 보니 컨셉북 같았다.
“프라다에서 머리를 길러달라고 요청이 왔어. 그 파일은 대략 컨셉 참고하라고 미리 준 거고.”
머리카락?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잠시 놀랐지만 얼마 안 가 평정을 되찾았다.
‘이미지 변신을 생각했었던 게 오늘 아침인데.’
염색은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이것도 나름 이미지 변신이긴 했다. 근데
‘머리를 기르라고......’
장발인 남자들을 많이 보긴 해서 상관은 없다만 과연 어느 수준까지의 길이를 원하는지는 모르겠다. 시즌까지 얼마 안 남아서 그동안 머리가 많이 안 길어질 거 같은데.
그나마 지금 상태가 그렇게까지 짧게 자르지는 않은 상태여서, 기른다면야 기른 티가 날 거 같긴 했다.
“지금부터 기른다고 해도 그렇게 안 길 거 같은데요?”
“괜찮아. 짧은 머리만 아니면 된다고 하니까 거기서 알아서 하겠지.”
“그럼 뭐...... 머리만 안 자르면 되겠네요.”
“응. 다른 곳에서도 오히려 좋아할 거야.”
그렇긴 하겠네.
염색은 색상으로 인해 갈린다지만 머리가 길면 되려 소화해낼 수 있는 헤어스타일이 다양해지기 때문에 더 메리트가 되기도 했다.
나는 편해서 짧은 머리를 고수한 것도 있지만.
어떻게 보면 머리스타일도 하나의 개성이었기 때문에.
‘이왕 이렇게 된 거 장발 한 번쯤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번 생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장발이어서, 어떻게 될지 궁금하긴 했다. 머리 감는 건 좀 느려지겠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그러면 머리는 기르는 걸로 알고 있을게요.”
“그래. 오늘 미팅도 잘하고.”
“네.”
미팅 전에 잠깐 할 말이 있다고 부른 주성훈 대표였는데, 대화가 조금 길어져서 끝나자마자 나는 빠르게 사무실을 나와서 다른 층으로 이동했다.
층에 도착하니 미팅까지 남은 시간은 10분.
‘10분? 화장실 갔다 와도 되겠네.’
아까부터 속이 안 좋았는데 마침 잘 됐다.
캐스팅 팀장에게 대표와 대화를 끝냈고 시간에 맞춰서 가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확인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렇게 미팅실이 있는 층의 화장실 칸으로 들어가, 속을 시원하게 비우고 있는데
“...... 그렇게 예쁘다며?”
“실물을 한 번도 안 봐서 모르겠네. 모델도 보정 같은 건 다 하잖아.”
“하는 건 오히려 걔네가 더하지 않을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물 트는 소리와 함께 남자 둘의 대화가 들렸다.
“인스타 사진 보니까 전부 장난 아니던데, 그냥 어떻게든 계약 성사만 됐으면 좋겠다.”
“안 된다고 하면 벌써부터 눈 앞이 캄캄해.....”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설득해야지.”
누가 봐도 내 얘기인 거 같네.
별말은 없었지만, 이렇게 화장실 칸에 들어와서 볼일 보다가 내 얘기를 듣는 거라 기분이 묘했다.
썩 유쾌한 얘기는 아니어도 그렇게 불쾌하지는 않았고. 속은 시원한데 어딘가 모르게 찝찝했다.
그렇게 남자 둘이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리자 나도 주섬주섬 칸을 나와 손을 씻었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어느덧 남은 시간은 3분.
방금 나간 남자 두 명이 오늘 있을 미팅 상대라는 건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늦으면 안 되니까.”
화장실을 벗어나니 미팅실로 향하는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는 처음 보는 두 명의 남자와 함께 캐스팅 팀장이 앉아 있었고,
나를 보자마자 일어나는 셋에 나는 늦어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자리로 가 앉았다.
“미네스 렌즈 광고 팀장 이정훈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모델 우연입니다.”
처음 들어온 순간부터, 눈이 마주쳤다.
인사를 나누고 통성명을 나누자 목소리가 익숙한 게 아까 화장실에서 대화를 나누던 둘이 맞네.
‘내 실물 어떠냐고 묻고 싶은데’
아무것도 모르고 설명에 열중한 이정훈 광고 팀장을 보면서 나는 미팅 내용에 집중했다.
미네스 렌즈 광고.
렌즈 쪽에서도 1티어라서 유명했으며 페이도 높고 촬영도 어렵지 않았다.
이정훈 광고 팀장의 설명을 듣던 캐스팅 팀장이 몇 개 질문을 던지니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하는 게, 역시 준비해온 티가 났다.
“우연 군 생각은 어때요?”
“좋은 거 같은데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내게 캐스팅 팀장이 물었다.
‘광고, 좋지.’
렌즈 광고면 크게 연기를 필요로 하거나 이미지를 망칠 일은 적고.
그런 나의 반응을 살핀 이정훈 광고 팀장이 서둘러 촬영과 착용하게 될 신제품 렌즈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렌즈야 많이 껴봤으니까.’
이어지는 이정훈 광고 팀장의 설명에 더는 물어볼 것이 없다는 듯 캐스팅 팀장이 계약 관련한 얘기를 꺼냈다.
그러자 눈에 띄게 밝아진 목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에서는 당연히 광고가 성사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미네스 렌즈 광고에 있어서 큰 불만은 없었기에 나는 일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네 그러면 저희 쪽에서 따로 또 연락드리도록 할게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인사를 주고받고 나자 캐스팅 팀장과 나는 가만히 있었지만, 둘은 가지고 왔던 자료들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전부 정리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미팅실을 나선 순간
“저 실물이 더 괜찮죠?”
“네?”
이정훈 광고 팀장이 아닌, 같이 왔었던 다른 남자에게 미팅실을 나가면서 작게 속삭였다.
그러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그저 방긋 웃을 뿐이었고.
‘이 정도면 비꼰 건 아니겠지?’
반쯤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어버버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남자를 뒤로하고 캐스팅 팀장의 뒤를 다랐다.
...... 뒤끝 있는 편은 아니니까 뭐.
‘그래도 색보정 빼고는 다른 보정 별로 안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야 저들이 자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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