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120화 (120/137)

〈 120화 〉 chapter 118. 일도, 연애도

* * *

약 네 시간 동안 미네스 렌즈 광고 촬영이 이어졌다.

“정면으로 바꿔서 한 번 찍어볼게요!”

“네.”

구도가 바뀌면서 틀었던 고개와 몸을 정면을 바라보게 하고, 손에 들고 있던 렌즈 팩을 턱 밑에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응시하자 연이어서 들리는 셔터음.

영상 촬영을 제일 먼저 했기에 이제 남은 건 사진 촬영뿐이었다. 렌즈 몇 개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꽤 되네.

‘얼굴 클로즈업만 연달아 찍는 건 또 오랜만이라서.’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금씩 성장하는 것 같았다.

렌즈 광고기 때문에 전신샷은 필요 없고, 상반신이나 얼굴 클로즈업 위주로 촬영이 진행되다 보니 표정 연기나 손에 신경 쓸 수밖에 없달까.

카메라에 찍힐 모습을 상상하면서 고개 각도를 조정했다.

“컷! 촬영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어요.”

역시 패션계가 문제라니까.

광고 촬영이어서 그런가 영상 감독부터 시작해 포토그래퍼까지 굉장히 친절한 웃음을 끊이지 않고 부드럽게 말하는 게, 어디의 누구들과 꽤 비교됐다.

‘아 내 눈.’

촬영이 끝났다는 걸 인지하자 그제야 눈이 시큰거렸다.

평소에 안 끼던 렌즈를 장기간 착용한 것도 있지만, 카메라를 보느라 눈을 잘 깜빡이지 않아서 그런 거 같은데.

눈을 잠깐 감고 있다 보니 나아졌다.

마지막으로 촬영한 렌즈 색상이 그레이여서, 내 눈에는 그레이 렌즈가 껴져있었다.

거울을 보니 낯선 눈동자 색에 조금 어색했고.

“렌즈 빼고 갈 거야?”

“음...... 집에 가서 뺄게요.”

“그래. 근데 너 그 렌즈도 되게 잘 어울린다.”

“좀 차가워 보이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신비로워 보여. 이런 게 눈동자의 중요성인가.”

신비로운 건 또 뭐야.

단호하게 말하는 예진을 보면서 나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러자 자기는 진심이라고 덧붙이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스태프들과 몇 명 사진을 찍어준 뒤, 우리는 차로 이동했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할 게 없는 나머지 핸드폰을 들어 카메라 앱을 실행시켰다.

‘사진이나 좀 찍어볼까.’

내가 보기에는 렌즈의 존재감이 확 눈에 띄어서인지, 조금 차갑게 보이는데.

‘이것도 뭐 색다르니까.’

셀카를 한 세 장 찍었을까, 차가 멈춰 서고 예진과 백미러로 눈이 마주쳐버렸다.

“운전에 집중하세요.”

“지금 빨간불이잖아.”

“아무튼, 쳐다보지 마요. 어 이제 신호 바뀐다.”

괜히 셀카를 찍던 게 민망해졌지만, 신호가 바뀌니 다시 운전을 하는 예진을 보고 이어서 사진 몇 장을 찍었다.

결과물은, 음,,.... 글쎄.

사진 보는 눈이 높아져서 그다지 성에 차지는 않았다만.

‘역시 남이 찍어주는 사진이 제일 자연스럽지.’

그래도 이렇게 셀카를 많이 찍어 버릇하면 언젠가 실력이 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별로인 사진들은 전부 삭제했고, 어차피 집에 가면 올릴 생각이었으니까.

내가 핸드폰을 내려놓기 무섭게 예진이 말을 걸어왔다.

“사진 잘 나왔어?”

“제 사진 실력 어디 안 가죠.”

“...... 내가 몇 장 찍어줄까?”

“괜찮아요.”

예진의 갤러리에는 과연 내 사진이 몇 장이나 있을지 궁금했다.

‘다 삭제했으려나?’

아무튼, 운전을 하고 있던 예진이었기에 제안을 거절하고 얼마 안 있어 집에 도착했고,

나는 옆에 두었던 가방을 손에 든 채 예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우연아.”

“네?”

차 문을 열자마자 뒤에서 예진이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보이는 건 예진의 얼굴이 아니라, 예진은 손에 핸드폰을 들고 내가 아닌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었으며

저 각도는 누가 봐도

“내가 사진 하나는 잘 찍잖아. 이번에는 연속 촬영 갈겼는데 몇 개는 무조건 건졌어.”

사진 찍는 각도였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예진을 보면서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웃음이 흘러나왔고, 몸을 틀어 이제 진짜 간다고 말한 뒤 차에서 내렸다.

“왔어?”

“응. 피곤해......”

오전에는 운동하고, 오후에는 광고 촬영이 있어서 집에 오니 어느덧 8시다. 아직 저녁을 안 먹어서 뭐라도 주워 먹기는 해야 하는데.

귀찮아.

빼꼼 고개를 내민 다윤과 인사한 뒤 거실에 있던 부모님들과도 인사하고, 곧장 방에 들렀다가 화장실로 직행했다.

착용했던 렌즈도 빼고 세수까지 마친 뒤에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고.

그 뒤에는 당연히 침대로 직행이었다.

‘한 번 누우면 빠져나갈 수 없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가방과 정리되지 않은 옷가지들이 있었지만 나는 누워서 착용하고 있었던 액세서리들을 하나씩 뺐다.

아직 잘 시간이 아니어서 정신은 또렷하지만 몸은 피곤한 상태.

지잉ㅡ 지잉, 지잉 지잉......

“뭐야.”

연달아 울리는 진동음에 침대 어딘가에 던져뒀었던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잠금을 해제하니 보이는 건 캐톡 알림.

[예진 누나: (사진)]

.

.

[예진 누나: 개인적으로 제일 잘 나온 건 2번, 3번.]

아까 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찍었었던 사진들을 보내줬다. 그중에서도 제일 잘 나왔다는 두 번째, 세 번째 사진도 봤으나

“...... 왠지 모르게 멍청하게 나온 거 같은데”

애초에 사진을 찍을 줄 몰랐고, 연속 촬영을 해서인지 보이는 사진 속의 내 모습이 조금 멍청해 보였다.

이걸 잘 나왔다고 해야 해, 말아야 해.

잠시 멈칫했지만 그래도 일단 다 저장했다.

예진이 잘 나왔다고 해서 그런가, 묘하게 계속 보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니었던 내 셀카보다는 조금 끌리는 거 같기도 하단 말이지.

나는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내가 아까 찍었었던 셀카들을 다시 살펴보면서 그중에 제일 잘 나온 사진 두 개를 골랐다.

계약상에도 SNS 홍보가 포함되어 있어서 올리기는 해야 했으니까.

고민 끝에 나는 결국 내가 찍은 셀카 두 장, 그리고 세 번째 사진으로는 예진이 찍어준 사진 한 장을 넣었다.

‘이렇게 두고 보니까 내가 찍은 게 훨씬 더 잘 나온 거 같기도 하고.....’

항상 예진이 찍어준 사진에 만족했었는데 이번 사진은 조금 달랐다.

“어떤 게 낫냐고 물어봐야지.”

셀카여서 그레이 렌즈를 낀 게 확 티가 났기 때문에, 홍보 측면으로는 걱정이 없었다. 무슨 렌즈를 착용했냐고들 많이 불어볼 테니까.

그렇게 글 내용으로는, 내가 찍은 셀카 VS 매니저가 갑자기 찍은 사진. 어느 게 낫냐는 코멘트를 달았다.

게시글을 올리고 새로고침해 가면서 약 5분에서 10분 정도를 SNS에 상주했는데, 달리는 댓글들을 보다가 나는 이내 너튜브 영상으로 갈아탔다.

영상 제목은 다름 아닌

[셀카 잘 찍는 법 5가지, 셀기꾼으로 만들어 드림]

“...... 이런 것도 공부해야 하나.”

그래, 아는 것이 힘이다.

****

시간은 야금야금 아주 조금씩 빠르게 흘러만 갔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6월이네.’

9월부터 본격적인 F/W 패션위크가 시작되었지만, 그전부터 나는 약 두 달 동안 모든 룩북 촬영, 미팅, 피팅, 패션지 화보 촬영 등 각 나라를 바쁘게 오갈 예정이었다.

대신 6월에는 차차 일본과 중국에서도 조금씩 활동을 시작하기 위해 발판을 만들 겸, 패션지 화보 촬영을 하기로 했고.

결론적으로는 6월 중순부터 해외를 도는 일은 불가피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양하게 공부를 해서 전반적인 패션 지식을 쌓기도 했고, 혹시 몰라 틈틈이 패션쇼 영상을 보면서 워킹을 참고했다.

“배달 음식도 이제 안녕이네.”

인간의 3대 욕구 중 식욕, 그 욕구를 제어해야 할 때가 비로소 온 것이다.

오로지 닭가슴살과 과일, 샐러드로만 이루어져 있는 짜여 있는 식단이 있었다. 비시즌이 되면서 아주 조금 살이 오르나 싶었는데,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겠지.

만약 사라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사라지게 만들어야겠지만.

여러모로 완벽해야 하고, 준비해야 할 것이 많았기에 더 신경 써야 했다. 저번에 듣기로는 20개가 넘는 브랜드들을 F/W 때 소화해낸다고 하니까.

식단 관리를 해야 하는 것과는 별개로 정말 설레는 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브랜드들과 함께 하다니.

“서울패션위크, 이은석 디자이너 무대에 처음으로 섰을 때가 아직도 생생한데.”

지금은 이미 유필리아를 시작으로 셀린느, 미우미우, 서 보지는 못했지만 루이비통 쇼까지 많은 브랜드들을 전전했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란 걸 자각하고 있기에.

“열심히 살아야겠네.”

하지만 바빠지기에 앞서, 시간을 알차게 보내면서 그만큼 놀 생각이다.

만날 친구가 두 명밖에 없다는 건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지만 뭐 어때. 친구를 못 사귀는 게 아니라 안 사귀는 거니까.

‘...... 확실하게 정리해야 할 때가 오긴 온 거 같고.’

끊어졌던 연락이 지속되면서, 자꾸만 그걸 깨닫거나 알게 되었을 때부터 모른 척하기가 힘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달까.

‘연애라.’

안 할 생각은 딱히 없다. 그런데 좋아한다는 확신도 없으면서 이런 시기에, 그런 사람과 연애를 시도하는 게 맞나.

“너무 도박이잖아.”

과거로 돌아가 선을 그은 사람을 찾는다면 당연히 나겠지만.

현재 어느 한쪽도 선을 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관계의 이름은 친구로 지속되는 거고, 겉과 속이 다른 현 상태가 이어지는 거겠지.

무엇 하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내가 괜히 상처 주는 거 아니야?

‘상처 주고 싶지는 않아.’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췄다.

일도, 연애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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