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chapter 119. 말할 수 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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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슬슬 짐도 싸야 하고, 중간에 한국을 들릴 틈이 없을 거 같은데 그래서인지 짐을 얼마나 싸야 할지 도통 감이 안 잡혔다.
‘캐리어는 몇 개 가져가지.’
집에 있는 캐리어들의 사이즈를 보다가, 그냥 큰 사이즈로 몇 개 새로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최근 들어 예진과 차에서 이동하면서 주로 했던 얘기가 출국하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었는데, 사야 할 것들은 따로 메모했다.
진즉에 내게 말을 전해 들었었던 가족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아쉬움을 표출해냈고.
‘그게 어찌나 눈에 잘 보이던지.’
그래서 가족들과도 시간을 많이 보내긴 했지만, 한국에 있을 때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할 수 있는 걸 해보자는 생각으로 많이 외출했다.
송이는 스케줄 때문에 자주 못 만나서 진짜 가끔 시간이 맞을 때만 만났고.
“아직 시간 널널하네.”
서아와는 자주 만났다.
서아가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만나, 가고 싶은 곳이나 하고 싶은 것들을 하고 늦지 않게 헤어지는 일련의 만남들.
오늘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아직 40분의 여유가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을 마지막으로 또 한동안 얼굴 못 보겠지.’
서아에게도 미리 말했지만, 앞으로 출국하기 전까지 바빠져서 더 이상은 만날 수 없을 거라고 미리 전해뒀다.
알겠다고 한 서아는 파스타가 먹고 싶다고 했고, 해서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는 파스타 가게.
15분 정도가 지나자 불러둔 택시가 도착해 택시에 올라탔다.
마지막으로 만나서 먹는 저녁인 만큼, 파스타는 먹겠지만
‘이따 헤어지고 나서 운동하러 가야겠네.’
그만큼, 아니 그 이상의 칼로리 소모를 해야 했다.
대충 헤어질 시간을 가늠해 본 다음 운동할 시간까지 계획해두고.
“도착했습니다 8900원이요~”
“이걸로 결제해주세요.”
생각보다 더 빠르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택시 아줌마가 좀 밟았나 보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까지는 15분가량 정도 남아 있었으나
‘오늘은 내가 기다리고 있어야지.’
여태껏 서아가 항상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기에, 오늘은 내가 먼저 와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파스타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다행히도 서아는 보이지 않았고, 직원에게 두 명이라고 말한 뒤에 안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게를 선정할 때는 공간 분리가 되어 있는지가 필수지.
“일행 오면 주문할게요.”
“알겠습니다.”
물을 가져다주는 직원에게 말하자 직원이 환한 미소로 대응했다.
‘서비스 괜찮네.’
혹시 몰라 서아에게는 미리 도착했다는 캐톡을 남겨놨고, 물로 목을 축이면서 쇼핑 앱에 들어가 메모해뒀던 물품들을 하나씩 결제했다.
아마 며칠 뒤면 택배가 내 방에 쌓여 있겠지.
자동으로 그려지는 미래에 또 살 건 없나 둘러보고 있었을 찰나
“이우연!”
“왔어?”
“어, 늦을까 봐 뛰어왔는데 다행히 안 늦었네.”
“늦어도 상관없긴 했는데...... 준비하느라 늦었어?”
정말 뛰어왔는지 서아가 작게 숨을 골랐다.
그대로 자리에 앉아 가방을 벗어 옆자리에 두고, 물을 마시는 서아를 한 번 스캔하는데.
어쩐지 평소와는 많이 달라 보이는 차림새가 눈에 띄었다.
‘화장도 했고, 머리도 풀었네?’
그리고 저런 모던한 느낌의 옷을 입은 것도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서아는 무용과다 보니 화장을 잘 안 했으니까.
뭔가 다른 때에 비해서 꾸민 게 확 티가 났다.
“이상해?”
“하나도, 너 화장한 거 되게 오랜만에 보는 거 같은데.”
“원래 기초는 다 했거든!”
“지금은 그 기초보다 더 제대로 화장한 거 같으니까.”
심드렁하게 말하자 서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서아도 왔겠다, 온 지도 꽤 됐는데 빨리 주문이나 해야지.
“일단 주문하자. 넌 뭐 먹을래?”
“잠깐만 메뉴 좀 보고.”
나는 이미 메뉴판을 보고 골라둔 파스타가 있었다. 서아가 메뉴를 고르는 동안 그녀의 물잔에 물을 채워주었고.
‘물이 없네.’
물병의 물이 바닥을 드러낸 걸 확인한 뒤 이따 주문할 때 직원에게 새 걸로 바꿔 달라고 할 참이었다.
“정했어. 나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먹을게.”
“벨 누른다?”
“응.”
벨을 누르자 얼마 안 가 직원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파스타와 함께 서아가 마실 음료, 물까지 새 걸로 바꿔 달라고 하자 주문을 한 번 확인한 직원이 떠났고.
그제야 한결 여유가 생긴 나는 서아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래서, 오늘 무슨 날이야?”
“응? 아니...... 아무 날도 아닌데?”
“그럼 됐고.”
“아 왜.”
“그냥. 아 머리 푸른 거 괜찮네.”
학교를 다녔을 때도 그렇고 서아를 만날 때마다 서아는 항상 머리를 묶고 있었기에,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새삼 머리를 푸른 게 생소했다.
‘몰랐는데 나 긴 생머리 취향인가.’
둘 다 잘 어울리긴 했지만, 이렇게 보니 압도적으로 머리를 푼 게 더 나은 것 같았다.
“오늘 밥 먹고 뭐해?”
“음...... 글쎄? 딱히 생각해둔 건 없었는데.”
“그러면 공원이나 한 바퀴 돌래?”
“공원?”
“어. 오늘 날씨도 선선한 게 좋아서 공원 돌면 딱인데.”
“그러면 공원 가자.”
주저리주저리 말하는 서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칼로리 소모도 해야 하는데, 카페 가서 앉아있는 거 대신에 걷는 것도 나쁘지 않지.
공원을 가자는 말에 어딘가 모르게 서아의 안색이 밝아진 것만 같았다.
“중간고사는 어떻게 됐어?”
“당연히 수석이지.”
“당연히? 이야 자신감 많이 붙었네 유서아.”
수석이면서 동시에 엄청난 연습벌레.
시험이 가까워질수록 캐톡으로는 그렇게 불안해하더니, 뭐 결과가 좋다면 그만이다.
나는 큰 캐리어를 사야겠다고 말하자 서아는 물을 마시다가 그러냐면서 가볍게 대꾸했고 다음 말이 나오기도 전에
“주문하신 음식 나오셨습니다.”
직원이 파스타를 들고 왔다.
‘빨리 나왔네. 주문이 없었나.’
접시에 되어 있는 플레이팅이 예사롭지 않았다. 기왕 먹는 거 무조건 맛집에서 먹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후기를 엄청 뒤졌었는데.
이런 비주얼로 맛없으면 큰일 나지.
“사진 찍을 거야?”
“아니. 갤러리에 음식 사진 있으면 먹고 싶어져.”
“그럼 내가 찍을게.”
파스타 두 접시를 맞닿게 하더니 그대로 서아가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원래 사진 잘 안 찍었었던 거 같은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 같았다.
‘뭐 사진도 찍었으니 이제 먹어야지.’
수저를 들고 파스타를 한입 크기로 덜어 입안에 넣었다.
“맛 괜찮네.”
“엄청 맛있는데?”
먹을 때는 온전히 먹을 거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오가는 말은 딱히 없었다.
한 네 번째 포크질을 했을까, 앞에 있는 서아의 파스타 접시가 눈에 들어왔고.
‘많이 남았네?’
평소에 음식을 빨리 먹는 서아를 알기에, 서아를 쳐다보자 아까부터 씹는 게 느리다는 걸 깨달았다.
“웬일로 꼭꼭 씹어 먹어?”
“천천히 먹으면 몸에 좋잖아. 앞으로 천천히 먹으려고.”
서아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확실히 천천히 먹는다고 해서인지 먹는 속도가 비슷해진 게 다 먹는 속도까지도 비슷해졌다.
‘이런 건 또 처음인데.’
항상 서아도 그렇고 송이도 나보다 빨리 먹어서 기다려줬었는데, 동시에 식사가 끝나니 조금 색다랐다.
나쁘지 않네.
물로 입가심하자 서아가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휴지로 입 주변을 정리한 뒤 핸드폰을 들어 온 알림들을 확인했다.
[송이: 뭐해?]
미리보기로 보이는 송이한테서 온 캐톡에 답장을 하려는데.
“이제 갈까?”
“그래.”
화장실을 다녀온 서아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핸드폰은 주머니에 넣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러 계산대로 향하는데.
“야 왜 네가 계산해.”
“지금까지 얻어먹은 게 있는데 마지막은 내가 사야지.”
그렇게 말하니까 또 할 말 없어지네.
서아는 학생이고, 나는 수입이 있는 모델이니까 항상 만날 때마다 밥값은 내가 부담했다. 대신 카페 같은 걸 서아가 냈고.
처음 만나서 밥을 먹고 말한 뒤로 생긴 암묵적인 룰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간에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해가 져서 깜깜한 밤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래서 그 공원은 어디로 가야 하는데?”
“따라와.”
“멀어?”
“안 멀어.”
서아의 말대로 걸음을 옮기다 보니 공원으로 보이는 곳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평일 저녁이어서 그런지 사람이 없어 텅 비어 있는 게, 가로수 등만이 공원을 환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었다.
‘분위기 있네.’
이렇게 공원을 와본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카페 말고 여기 오길 잘했네.
내가 그런 감상을 하는 동안, 서아는 묵묵히 걷기만 했다. 파스타 가게를 나온 뒤로 묘하게 말수가 적어진 것 같았는데.
공원을 걷기 시작하면서 내가 아무렇지 않게 먼저 말을 꺼냈다.
“나 공원 되게 오랜만에 와보는데 좋네. 카페 안 가고 여기 오길 잘했다.”
“그래?...... 다행이네.”
서아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확실히 텐션이 아까와는 현저히 다른 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러려니 했고.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유지되었지만, 갑자기 텐션이 다운된 서아에게도 무슨 이유가 있을 테니 나 또한 이 침묵이 불편하지 않아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어느 한곳에서 멈춰 서지 않고, 그렇게 공원을 돌 심산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우뚝.
불현듯 멈춰 선 서아에 나도 같이 멈춰 섰다.
“왜?”
서아를 내려다보면서 묻자, 서아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해가 져서 깜깜한 하늘에 공원의 가로등 불빛이 비추어져 고개를 든 서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
무언가 말하려는 듯 보이는 서아의 표정을 보면서 생각했다.
서아가 갑자기 다운된 이유도, 우리의 침묵이 유지된 이유도.
“좋아해.”
“.......”
나 때문이었구나.
서아의 눈이 가로등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너를 좋아해 우연아.”
그리고 담담한 어조로 내게 사랑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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