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122화 (122/137)

〈 122화 〉 chapter 120. 짝사랑

* * *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한 번 인정해버리니까

감정은 걷잡을 수 없게 번져나갔다. 그 이후로는 쭉 좋아할 수밖에 없으니까.

중간에 한 번 완전히 연락이 끊겼을 때는 이대로 정말 끝인가 생각했었는데.

‘어림도 없지.’

어느 순간 연락이 오고 난 뒤로부터 작게 사그라들었던 불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포기하나 싶었었는데, 다시 연락이 되고 나서는 그동안 참았던 걸 해방 시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연의 사진만 봐도 웃음이 새어 나왔고, 갤러리에는 우연의 사진들이 가득했다.

괜히 시답지 않은 일로 먼저 연락하거나 아웃스타그램, 팬카페 등등을 눈팅하면서 정보를 얻었으며

‘그럴 때마다 종종 자괴감이 들기는 했지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만큼은 확실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그저 그런 우연과 나를 비교했을 때 내가 너무 초라할 뿐.

우리는, 친구지.

내가 좋아한다는 걸 처음 깨달았을 때 정의 내렸었던 우리의 관계.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게 시간이 조금씩, 흐르고 흘러서 지금은 어느덧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보낸 시간도 많고, 한 대화들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자연스럽게 연락을 주고받고 자주 단둘이 만나는 이 관계가.

‘우리가, 친군가?’

우리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친구라는 포장지가 쌓여있지만 나한테는 우연이 친구가 아니고, 짝사랑하는 상대였으니까.

원래 짝사랑이라는 게 전부 그렇듯이,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친구로서 연락하고 친구로서 만난다는 게 힘들었다.

아무리 자기 객관화를 해보려고 해도 힘든 걸 어떡해.

이런 걸 물어볼 사람이 없어,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인터넷에 물어본 결과 전부 입을 모아 하나같이 평범한 친구 사이는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 고백해볼까.”

혼자서만 끙끙 앓은 지도 벌써 1년이다.

이제 저번처럼 우연이 또 해외를 돌면서 일을 시작하고 나면 그때처럼 연락이 끊어질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힘들어지는 건 나겠지.’

간신히 연락이 닿는다고 해도, 혼자 애타하면서 이 생각 저 생각 할 미래가 훤히 보여서.

차라리 고백하는 게 낫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버렸다.

“진짜 미친 건가.”

원래 고백을 하기 전에 제일 먼저 생각하는 건 그 고백의 성공 유무.

상대방이 안 받아줄 거 같으면, 차라리 안 꺼내느니만 못하니까.

‘그런데, 만약 한다면, 받아, 줄까?’

우연이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연락은 굉장히 자주했고, 최근 들어서는 단둘이 만나는 횟수가 현저하게 많아졌다.

나 혼자 또 착각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연락이야 자신이 하면 항상 받아줬고 우연이 먼저 연락할 때도 있었다.

아으. 정말이지.

일말의 희망을 찾아낸 순간부터 그 뒤로는 오로지 머릿속에 고백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차이면...... 진짜 끝인데.”

너무 극단적인 걸 수도 있지만, 원래 이런 건 최악의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을 고백에 대해 고민했다.

“지금 이러나, 다음에 이러나 똑같아.”

나 혼자만의 착각이더라도, 아니더라도.

당사자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모르니 제자리걸음이었다.

지금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앞으로 우연과 연락을 안 할 게 아니니 또 똑같은 고뇌에 휩싸이겠지. 짝사랑이란 전부 그런 법이었다.

하는 쪽만 한없이 힘든.

‘차라리 확실하게 하자.’

차인다면 미련이라도 없으니까 더 빨리 포기할 수 있겠지.

결국, 결론을 내렸다.

****

오늘은 출국 전 마지막으로 우연을 볼 수 있는 날.

그리고 내가 고백할 날이었다.

메뉴 선정부터 시작해서 어떤 옷을 입고 갈 건지, 어떤 머리를 할지, 고백은 또 어디서 할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고민 끝에 정해진 것들이었다.

전날부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 잠을 설친 탓에 꼴이 말이 아니었는데, 오죽하면 학교에서도 거의 반 폐인 상태로 있자 선생님께서 어디 아프냐고 먼저 물어볼 정도였다.

‘이러다 늦는 거 아니야?’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서둘러 준비를 했지만, 평소에 안 하던 것들을 해서 그런지 어색한 바람에 준비하는 게 조금 늦어졌다.

심지어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연은 먼저 도착했다고 하고.

늦지 않기 위해서 파스타 가게까지 짧게 뜀박질한 뒤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다행히도 약속 시간 정각이었다.

“이우연!”

숨을 고르면서 우연이 앉은 반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름을 부르니 핸드폰에 머물러 있던 시선이 내게로 향했고, 눈이 마주쳤다.

방금 이름 부를 때 목소리가 좀 떨렸던 거 같은데, 못 알아챘겠지?

“왔어?”

“어, 늦을까 봐 뛰어왔는데 다행히 안 늦었네.”

“늦어도 상관없긴 했는데...... 준비하느라 늦었어?”

조곤조곤한 말투로 나를 쳐다보면서 우연이 말했다. 실제로 준비하느라 늦었기에 찔리긴 했지만, 직접 말하기에는 부끄럽고.

“이상해?”

“하나도, 너 화장한 거 되게 오랜만에 보는 거 같은데.”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괜히 큰소리를 내면서 장난스럽게 받아쳤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했으니까.

‘그냥 오늘 고백하지 말까.’

생각하는 거랑 그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건 차이가 꽤 컸다.

그리고 실제로 우연을 마주하는 것도 데미지가 상당했고. 역시 실제로 만나니 뭐가 다르긴 다르네.

나는 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가면서, 파스타가 나오자 미리 공부했던 대로 우연과 먹는 속도를 맞춰서 파스타를 먹었다.

“웬일로 꼭꼭 씹어 먹어?”

“천천히 먹으면 몸에 좋잖아. 앞으로 천천히 먹으려고.”

순간적으로 너무 당황해서 랩처럼 말을 내뱉은 거 같은데.

분명 천천히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스타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구분이 안 됐다.

식사를 완전히 끝내자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자리를 떴고.

“할 수 있어. 차여도 어떻게 할지 다 정해놨고, 받아주면......”

거기까지.

더하면 망상이었다.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차가운 물로 손을 씻은 뒤 거울로 상태를 점검한 후 밖으로 나갔고.

이미 공원을 가기로 정해놨었기에, 테이블에 앉아있는 우연을 향해 이만 가자고 말했다.

그리고 미리 꺼내놨었던 카드를 꺼내 계산하기.

지금까지는 전부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 공원은 어디로 가야 하는데?”

“따라와.”

“멀어?”

“안 멀어.”

걷기 시작하면서 대화가 끊겼지만, 옆에서 걷는 우연의 발소리가 너무나도 잘 들렸다.

그냥 이렇게 같이 걷기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공원에 도착하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기 시작했고, 머릿속에는 오로지 고백뿐이었다.

‘뭐라고 먼저 말을 꺼내야 하지.’

머릿속이 생각으로 가득 차서 우연이 말을 걸어왔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고.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초조해졌다.

안 되겠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왜?”

“...... 좋아해.”

왜 멈춰 섰냐고 묻는 우연에게, 좋아한다고 말해버렸다.

‘당황했을까?’

어두워서인지, 아니면 너무 떨려서인지 우연의 표정이 분간이 안 갔다.

“너를 좋아해 우연아.”

한 번 더.

한 마디에 꾹꾹 담아낸 고백이 내가 해놓고서도 떨리고 불안해서.

“오랜 시간 동안 너를 좋아했어. 티가 났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내가 많이 부족한 걸 알아. 근데 그런 건 내가 앞으로도 계속, 계속 맞춰나갈게.”

토해내듯이 진심을 전했다.

구구절절한 사연도 필요 없이, 그냥 오로지 순수한 마음뿐이었다.

초조하게 우연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1초가 마치 1분과도 같게 느껴졌지만. 갑작스럽게 한 고백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그 침묵이 달갑게 느껴졌다.

고민하고 있다는 거니까.

그렇게 1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을 때쯤.

“미안해, 나는....... 너를 이성으로 보지 못할 거 같아.”

꽉 쥐고 있었던 주먹의 힘이 풀렸다.

내게는, 틀린 대답이 돌아왔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