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chapter 121. 불편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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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서아의 절절한 고백을 듣고 난 후,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자그마치 고등학교에서 만나 자퇴한 지금까지도 인연을 이어가고 있는 친구였다, 최근 들어서는 더 자주 만나서 더 친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내 기준으로는 서아를, 정말 친한 친구로 대우했다.
‘그런 애가 사실은 나를 좋아했었다니.’
이게 무슨 만화도 아니고.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서아랑도 서로 심한 말을 하거나 일정 이상의 장난은 치지 않았었는데, 그런 거야 당연히 성별이 달라서라고 생각했었고......
곰곰이 되짚어보니 서아가 나를 좋아한다는 가정을 넣었을 때 티가 나는 순간들이 몇 번 있었던 것 같았다.
근데 이걸 이제 와서 깨달으면 뭐해.
만약 서아가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 거리를 뒀을 거다. 왜냐하면
‘서아랑은...... 사귈 생각이 없으니까.’
흔히 친구 관계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지만, 정말 진지하게 생각했을 때 서아와는 연인들끼리 할 법할 스킨십을 한다고 생각하니까 좀 그랬다.
그렇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줄 생각은 더더욱 없었고.
좋지도 않았지만 나쁘지도 않았다. 이대로 고백을 받아준다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또 다른 고민이 생겨나겠지.
‘그러니까, 거절하는 게 맞다.’
처음에는 놀란 게 더 컸지만, 아직도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서아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미안해, 나는....... 너를 이성으로 보지 못할 거 같아.”
쓰다.
순식간에 긴장 어린 표정에서 실망한 얼굴로 변하는 서아를 보면서 내가 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안 좋아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된 것도, 이런 거절의 말을 내뱉는 것도.
만약 여기서 생각해 보겠다고 한 뒤 나중에 말한들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었기에 되려 희망 고문이었다.
그렇게 침묵이 일관되자 내가 말을 덧붙이려고 입을 떼는데
“괜찮아, 차이더라도 한 번쯤은 고백해보고 싶어서 한 거니까...... 이제 차였으니 깔끔하게 마음 접어야지.”
애써 아무렇지 않게 서아가 말했다.
하지만 그런 말과는 다르게 표정은 좋지 못했고, 그런 서아에게 나는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건네줄 수 없었다.
‘마음 정리라......’
순전히 서아의 몫이었다.
이런 애한테 고백까지 받아놓고 거절한 판국에,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괜히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한동안 연락 끊어야겠네.’
마침 해외를 돌아 연락이 끊기는데 자연스러운 명분이 생겼다.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그래도 연락 자주하려고 했었는데.
미안해.
나를 좋아해주는 마음에 보답해줄 수 없어서, 이게 내 최선의 결정이다.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 지내자, 우리.”
“...... 응.”
“공원도 이만하면 오래 있었던 거 같은데 이제 헤어질까?”
“그래. 너도 내일 학교 가야 하고 나도 내일 일 가야 하니까......”
여기서 헤어지는 게 낫겠다.
이 이상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무엇을 한들 괜찮아질 리 없었다. 그렇게 나는 핸드폰을 들어 공원 앞으로 택시를 불렀고.
‘어색하네.’
서로 아무 말도 오가지 않는 상태에서, 잡은 택시가 근처에 있었는지 3분도 되지 않아 도착했다.
나는 뒷좌석 안쪽으로 들어가 서아를 쳐다보는데
“난 따로 걸어갈게.”
“...... 알겠어. 조심히 들어가.”
“너야말로 조심히 들어가.”
따로 걸어가겠다고 말하는 서아를 말리지 못했다.
그대로 택시 문에 닫혔고, 택시가 출발했으며
창문 밖으로 다시 공원을 바라봤을 때는
“진짜 미치겠네.”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서아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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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왔어?”
“....... 응.”
“뭐야 놀고 온 거 아니었어? 상태 왜 이래.”
“그냥 그럴 일이 있었어.”
집에 도착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오는 내내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으니까.
나는 대충 다윤에게 손을 허공에 휘휘 저어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한 뒤 방으로 들어갔고, 문밖에서 다윤이 더 무어라 하는 게 들렸으나 무시했다.
옷을 들고 화장실로 직행해서 씻고 나왔건만 여전히 마음 한켠이 착잡했고.
송이는 좋아한다는 게 티가 났었다지만, 서아는 그렇지 않았어서 더 그랬다.
하는 연락들도 전부 가벼웠고 재밌었으니까. 비록 되돌아보니 친구라고 확정 짓기에는 애매한 부분들이 몇몇 있었던 거 같긴 하지만.
‘내가 둔했던 건가.’
아니, 애초에 가능성 자체를 배제해두고 있었기에 생각지도 못했다.
결국 그동안 내 곁에 있는 친구들이 전부 나를 친구가 아니라 남자로 봤고, 나를 좋아하는 애들뿐이라니.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나 이제 친구도 없네.”
아무렇지 않게 불러서 밥 한끼 먹고 노는 사이는 이제 없었다.
‘이런 걸 보고 아싸라고 하지 않나.’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터치하니 잠금화면이 떴다. 아무런 알림이 떠 있지 않는 게 어째 지금 내 인간관계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고.
‘분명 내가 찬 입장인데.’
서아에게서 오지 않은 연락이 괜히 신경 쓰였다. 그래, 연락 안 하는 게 맞지.
잘 들어갔냐고 먼저 캐톡을 보내볼까 하다가 관뒀다.
왜 이렇게 많은 생각이 들고, 잡념이 드는 건지 모르겠네,
아무래도 창밖으로 봤었던 서아의 모습이 잘 잊혀지지 않아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다른 걸 하면서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아웃스타그램에 들어가 온 메시지들이나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고.
막상 자야 할 시간임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자 그때는
“이거 틀어놓으면 잠 잘 온다는데......”
피곤한 눈으로 너튜브에 들어가 잠이 잘 온다는 영상들을 찾다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잠에 빠져든 것 같았다.
그리고 꿈을 꿨는데.
“아 썅 개꿈......”
꿈속에서 내가 노총각 모델로 한평생을 살다가 죽는 꿈을 꿔버렸다. 아침부터 짜증 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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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컨디션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아 네.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가 봐요.”
꿈자리도 뒤숭숭했다.
아니 애초에 나 좋다는 여자가 지금 둘이나 주위에 있는데 노총각으로 죽는 게 말이 돼?
하지만 예진은 내가 평소와는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지 운전을 하면서도 내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몇 번 더 상태에 대해 묻길래 성심성의껏 답변하자
“그래서 무슨 일인데.”
“무슨 일이라뇨?”
“잠 설쳐서 몸 컨디션 안 좋은 건 둘째치고, 너 기분도 되게 다운됐잖아.”
“그래요?”
이건 몰랐는데.
예진은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며, 일 때문에 힘든 건 아닐 테니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진지하게 물어왔다.
‘하긴, 내가 전적이 조금 있어야지.’
겪은 일들이 하나가 아니다 보니 예진이 이렇게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냥 개인적인 문제에요.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
“확신이 없네.”
“지금은 확신이 잘 안 서는데, 그래도 그렇게 흘러갈 거예요.”
“그럼 됐어. 혹시 회사 쪽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지 바로 말하고.”
“당연하죠.”
내가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자 그 뒤로 예진은 무슨 일인지에 대해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이제 정말 출국이 얼마 남지 않아서 남은 날들은 전부 스케줄들로 꽉 차 있었는데.
‘차라리 일이 많은 게 낫겠네.’
일이 많은 게 오히려 잡념을 덜 생기게 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테니까.
“오늘 무슨 화보 찍는다고 그랬죠?”
“에스콰이어. 영상 촬영도 같이 있어서 정신 똑바로 잡아야 해.”
“아...... 너튜브에도 올라가겠네요.”
진짜로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말 하나하나를 조심해야 하기도 하고, 화보 촬영이라면 모를까 영상은 모든 게 그대로 박제되는 것이다 보니.
근래 들어서 매일 같이 회사를 들렸었는데, 오늘은 회사에 들리지 않고 바로 촬영 장소로 오니 뭔가 시간이 빠르게 흐른 느낌이었다.
‘머리하는데 좀 오래 걸리겠네.’
도착해서 여기저기 인사를 하고 헤어 메이크업을 받으러 가니 아니나 다를까 준비되어 있는 헤어피스를 달고 머리를 땋아야 했다.
머리가 길어서 그런가.
‘역시 짧은 게 편해.’
스타일링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는 걸 알아도, 편한 건 짧은 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헤어 디자인은 처음해 보시는 거죠?”
“네 처음이에요.”
“어머 되게 영광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리고 촬영 스탠바이 전에 핸드폰 화면을 켰는데
잠금화면에 캐톡 알림이 두 개 떠있는 게 포착됐고.
‘혹시 서아?’
어제 이후로 온 연락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잠금화면을 풀어보니
[송이: 그때 네가 말했던 거 나도 지금 먹고 있어]
서아가 아닌, 낯익은 송이의 이름이 보였다. 답장을 해야 하는데
“우연 씨 촬영 들어간대요!”
“네.”
나는 그대로 핸드폰 화면을 꺼서 예진에게 건넸다.
‘촬영 들어가야 한다니까...... 이따 답장해도 되겠지.’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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