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126화 (126/137)

〈 126화 〉 chapter 124. 포토그래퍼 하기하라

* * *

결국 촬영은 최장시간이었던 10시간에 도달하고 나서야 끝났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촬영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쉬는 시간이 더 많이 주어졌고.

스튜디오 안에서 촬영하다 보니 창문이 없어 밖은 살피지 못했지만 아마 해가 저물어 있을 게 분명했다.

한평생을 같은 촬영 스타일로 고수해 온 포토그래퍼인 거 같다 보니 촬영을 일찍 끝마치기란 무리였고.

‘진짜 힘드네.’

어떻게든 웃으면서 자주, 말을 걸었었던 거 같은데 그에 따른 성과로 조금씩 촬영마다 코멘트의 길이가 길어지기는 했었다.

그러다 보니 몸도 몸이지만 여러모로 집중력을 소모해야 해서 정신적으로 더 힘들었던 거 같은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촬영 시간은 길었다.

오늘 촬영분만 해도 천 장은 족히 넘길 거 같고.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촬영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수고했다는 일본어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가네.’

일찌감치 촬영이 끝나고 곧장 카메라를 챙겨 자리를 떠난 포토그래퍼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힘없는 걸음으로 예진에게 향했다.

“진짜 수고했어.”

“저 힘들고 배고파요.”

“이거라도 먹을래?”

“네.”

예진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꺼낸 초콜릿을 그대로 받아들여 입안으로 넣었다.

‘당 충전.’

촬영하면서 간간이 식사 시간을 가지긴 했었는데, 샐러드 팩이나 과일볼 같은 걸 먹어서 먹은 것보다 소비하는 에너지가 더 많았다.

그걸로 힘이 될 리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촬영 중에 식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아, 그리고 스탭들 간식으로 나온 찹쌀떡 두 개도 얻어먹었는데 간에 기별도 안 갈 정도였다.

‘문득 레나가 떠오르네.’

레나는 좋지 않은 성격만큼 실력 하나는 탑재되어 있어서 비교적 촬영이 빠르게 진행됐었는데.

이번 포토그래퍼는 그것과는 달랐다. 성격은 좋다고 할 수 있지만 촬영은 느리게 진행되었으니까.

‘이제 다양한 국가, 다양한 포토그래퍼들을 만날 텐데.’

어떤 포토그래퍼가 어떤 자세를 취하든, 일단 내가 휩쓸리지 않고 잘하는 게 중요했다.

“내일은 샐러드 팩 대신에 도시락을 먹어야겠어요.”

“도시락으로 준비할게, 확실히 오늘 촬영 보니까 완전 빡세더라.”

내일 있는 촬영은 무려 처음부터 끝까지 야외 촬영.

첫째 날에 입고 찍었었던 스트릿 패션과는 완전히 정반대되는 청순 컨셉으로 진행되는 걸로 알고 있었다.

물론 내일 촬영 또한, 오늘처럼 강행군으로 진행될 게 예상되고.

그렇게 차에 올라탄 뒤 언제 잠들었는지 모를 만큼 순식간에 녹다운 돼버렸다.

도착하고 나서 예진이 깨워준 덕분에 겨우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아웃스타그램?’

나중에 해.

‘연락?’

나중에 해.

화장실에서 씻고 나온 다음 곧장 침대로 직행한 나는 녹초가 되어 다시금 수마에 빠져들었다.

****

“일본 미소년 대회에서 우승할 거 같은 얼굴이네.”

일본 유명 패션지 CANCAM의 전속 포토그래퍼, 하기하라가 우연의 사진을 보고 느낀 감상이었다.

‘인물이 괜찮긴 하지만.’

아직 데뷔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인이 일본 데뷔를, 그것도 CANCAM의 표지 모델을 장식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기하라와 더불어 CANCAM은 그 정도의 체급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나름대로 일본 첫 활동이라는 거에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전부터 점지해두었던 다른 일본 남배우가 있었던 하기하라는 이번 표지 모델이 우연이 된 게 탐탁지 않았다.

사실 사진이야, 어떤 사람을 가져다 두던 간 자신이 계속 찍다 보면 자연히 가장 잘 나온 사진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고.

중요한 그저 사진가의 실력이었다. 덧붙이자면 모델의 외관 정도?

이미 다 정해진 일이라 돌이킬 수는 없고 따르기는 해야 하니 결국 하기하라는 그런 마음을 가진 채로 촬영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했죠? 완전 초미소년이던데요?”

“오늘 촬영 이미지랑은 조금 달라 보이던데...... 걱정이네요.”

“왜 표지 모델로 하라는지 알 거 같은데.”

그리고 도착해서 들려오는 것들은 죄다 그 모델에 대한 이야기.

어떻길래.

어차피 준비 시간이 있어서 원래 촬영 예정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하기하라였지만 그걸 보고 뭐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한국에서 온 ‘그 모델’의 이야기만 할 뿐.

자잘한 스탭들이 하는 말들이야 잘 안 들려왔지만 하기하라와 오랫동안 함께 일한 조수 그리고 cancam에서 나온 관계자의 말은 잘 들렸다.

원래 같았으면 사사로운 안부를 주고받거나 당장 어제 터진 유명 남배우 유시오의 열애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 타이밍인데.

고작 신인 모델의 얼굴 하나 보겠다고 먼저 찾아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하기하라는 촬영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촬영장으로 들어오는 한 무리.

선두에는 하기하라가 사진으로 봤었던 인물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보정을 많이 하지 않는군.’

듣기 좋은 남자의 활기찬 목소리가 촬영장에 퍼지자 공기가 바뀌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어느덧, 모델이 하기하라의 앞에까지 당도했을 때는

“안녕하세요! 오늘 촬영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환하게 웃는 모델, 우연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 예쁘긴 하네.’

순간 비교할 만한 일본의 유명 모델을 떠올리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이쪽이 피부도 훨씬 곱고, 치아도 바르니까.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모델을 뒤로하고,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갔다.

“이 사진보다는 이게 더 잘 나온 거 같네요.”

“움직임 없이 최대한 표정 연기로만 해볼게요.”

“이 구도로 한 번만 더 찍어주시겠어요?”

처음에는 영어로 자잘하게 말하던 모델이, 촬영 후반부로 갈수록 간단한 일본어를 통해 소통을 해왔다.

‘이런 적극적인 남자 모델은 처음이야.’

아니, 모델이 아니고도 일본에 컨셉이 아닌 이런 성격을 가진 남자는 드물었다.

그동안 수많은 남배우, 모델, 아이돌까지 전부 촬영해봤으나 시종일관 지금처럼 밝게, 웃으면서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우연은 색달랐으니까.

분명 마음에 안 들었던 거 같은데 서서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다른 스탭들한테도 잘 하는 거 같고.’

소위 얼굴값 하는, 논란이 터지는 사람들을 직접 겪어봐왔던 하기하라였기 때문에 우연이 그들과 다르다는 건 알아챈 상태였다.

그렇게 괜찮은 분위기 속에서 촬영이 종료되자, 우연은 다소 지쳐 보이긴 했다만.

“뭘 써야 할지 고민 좀 해야겠네.”

집에 가서 할 일이 생긴 하기하라에게는 그런 건 보이지 않았다.

아까 촬영하면서도 깨달은 거지만, 이놈 잘 나온 게 한두 개가 아니어서.

‘내일도 촬영이 있고.’

오늘 촬영과는 또 다른 모습을 또 상상하면서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이렇게 호흡을 맞춰본 사람은 또 오랜만이라 괜히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것 같다만.

적막한 집으로 돌아온 뒤 컴퓨터를 켜서 한 건 오늘 찍은 사진들의 메모리 정리였고.

그런 사진들을 하나씩 넘겨 가며, 마음에 드는 사진과 더불어 어떻게 해야 우연이 잘 나오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지금 자면 한 3시간 잘 수 있나.”

그간 우연이 했었던 다른 화보까지 찾아보느라 자는 시간이 줄어들어버렸고.

이래서 원래 늦게 시작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건데.

보통 잠을 적게 자면 다음날 일정에 지장이 가지 않냐고 그러지만.

‘내일, 표지 사진 뽑는다.’

잠을 청하기 전 보인 하기하라의 눈빛은 어쩐지 매의 눈을 닮아 있었다.

****

야외 촬영, 그러니까 로케이션 촬영은 변수가 많다.

일단 예전 촬영 때처럼 날씨라는 복병이 있고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불상사가 있으니까.

이번 촬영 장소는 꽃이 만개한 식물원이었다.

‘그래도 오늘 날씨는 좋은데?’

그다지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선선한 6월의 날씨가, 햇살이 따사롭게 비쳤다.

“날씨라도 좋아서 다행이네요.”

“혹시 몰라서 겉옷도 챙겨왔으니까 걱정 말고.”

“일기예보로는 쭉 좋다고 하니까, 들어맞기만 하면 소원이 없을 거 같아요.”

촬영 장소로 이동하기에 앞서 옷을 갈아입고, 헤어 메이크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본 건물로 향했다.

평일이라 한적한지, 사람이 없어 맨 처음 들여보내주던 직원을 제외하고는 마주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고.

‘이제 시작이네.’

어제 오랜 기간 촬영을 한 탓에 몸 컨디션이 최상이라고 할 수 없겠지만, 나름대로 한 번 겪어보기는 했다고 두 번째라 조금 각오하고 왔다.

물론 그거랑은 별개로 촬영이 좀 일찍 끝나줬으면 하는 바람이기는 하지만.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안녕하세요~”

문을 열자마자 어제 봤었던 익숙한 얼굴들이 인사를 건네왔다.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내 말에 전부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하는 사람들.

오면서 그래도 일본어 번역기를 통해 몇 개의 문장이나 단어를 습득해오긴 했는데

그게 과연 도움이 될지는, 확신이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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