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127화 (127/137)

〈 127화 〉 chapter 125. 예상외의 변수들

* * *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아무리 각오한다 한들 체력이 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앉을 곳이 필요한데.’

잠깐 모니터링하거나 대기할 때 앉아서 쉴 공간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의자를 가져다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었지만 다른 의미로 체력을 갉아먹는 요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

다.

포토그래퍼의 촬영 방식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듯이 촬영의 양상은 어제와 비슷하게 흘러갔고.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찰칵, 찰칵ㅡ

어제처럼 많이 오래 찍는 게 아니라 적게 오래 찍고 있었다.

‘왜지?’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어제에 비해 셔터음이 덜 들리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단축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체감상 이게 더 촬영이 긴 거 같은데.’

아무래도 야외 촬영이라는 것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지금 해가 딱 좋아. 전부 다 찍어야 해.”

첫 촬영이 끝나고 다음 의상으로 넘어갈 때쯤 포토그래퍼가 적극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 후’

그런 포토그래퍼의 입김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cancam의 관계자도 내게 와서 되도록 이번 촬영은 스피드하게, 빠르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나야 빨리하고 끝내고 싶지.’

근데 그게 애초에 어디 나 혼자 해서 될 일인가.

괜히 말에 토 달아서 좋을 것 없기에 가만히 있었다만 나는 이미 모든 촬영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도 자기 입으로 빠르게 진행하자고 했으니 조금이라도 속도가 붙겠지.

“음......”

“왜 그래?”

“이 옷, 원단 때문인지 피부가 좀 가려워서요.”

두 번째 촬영 의상인 린넨 블라우스였는데, 옷을 입은 상체가 가려웠다.

‘내 몸이랑은 안 맞는 거 같은데.’

이런 화보 촬영을 하면서 한 번도 옷을 입었을 때 가려운 적이 없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옷을 준비해온 담당 스타일리스트에게 말하자

“어...... 그럴 리가 없는데. 많이 가려워요?”

“네, 다른 옷은 없나요?”

“준비해 온 게 그것뿐이라......”

“도저히 안 될 거 같아요. 일단 다음 의상으로 갈아입고 그걸로 촬영 들어갈게요.”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도 몸이 가려워 서둘러 말한 뒤 다음 의상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머뭇거리는 걸 보아하니 챙겨온 다른 옷들도 없는 것 같았고.

충분히 화내도 되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이미 답도 없었으며 짜증만 낼 거 같아 나중에 cnacam에 따로 말을 꺼내든지 해야겠다.

간지럽다고 긁으면 또 피부가 금세 붉어질 걸 알기에 함부로 긁을 수도 없어서.

다행히 그 옷을 벗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자 가려움은 차츰 줄어 들어갔다.

‘역시 그 린넨이 무슨 문제가 있나 보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돌아오자 결국 대대적인 수정에 들어갔고.

헤어 스타일링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했다. 메이크업을 크게 달라진 건 없었지만.

아마 이 소식은 다른 스탭들을 통해서 촬영장에 있는 이들에게도 전해질 터.

본의 아니게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준비를 끝내는 대로 곧장 촬영 장소로 향했다.

“물 마실래?”

“네.”

“여기 초콜릿도 먹어.”

“고마워요.”

간간이 이동할 때나 메이크업을 받을 때 예진이 내 입에 초콜릿을 넣어줬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못 먹었으니까.’

오늘은 샐러드 팩이 아니라 도시락으로 가져왔는데.

연달아 이어진 촬영 때문에 구경조차 해보지 못했다.

지금 햇빛이 최적화 상태라는 포토그래퍼의 말처럼 정말 점심시간이 사라진 채 미친 듯이 촬영만 이어갔으니까.

물론 나를 제외한 이들은 점심시간이 따로 안 주어져도 내가 준비할 때나 촬영에 들어갔을 때 등 시간 나는 대로 먹었겠지만.

‘배고파.’

공복 상태로 촬영을 해서 그런지 촬영이 비교적 빠르게 끝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정말, 준비해온 모든 의상의 촬영을 끝냈을 때는 이대로 딜레이 없이 마무리되나 싶었는데.

“하나가 비어.”

잡지에 실릴 총 컷 수와, 컨셉을 생각했을 때 의상 한 개가 펑크가 났다는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아까 그 가려움을 유발했던 린넨 블라우스가 생각났다.

그리고 cnacam 관계자도 그걸 아는지 스타일리스트를 향해 입을 열었고.

“준비해온 다른 의상은 없나?”

“네, 가져와야 할 게 많아서 따로 여분은 챙겨오지 못해서......”

“흠.”

일본어로 무슨 대화가 오는 것 같았으나 알아듣지는 못했다.

‘일단 스타일리스트가 변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만약 그 옷을 입고 촬영을 하라고 한다면 나는 못하겠다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다.

‘생각만 해도 다시 몸이 가려워지는 거 같아.;

예진에게도 제대로 말해놨으니 아마 그걸 입으라고 한다면 예진이 먼저 조치를 취할 가능성도 높았다.

그렇게 상의를 한 포토그래퍼와 cancam의 관계자에게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 지켜보고 있던 찰나

“아직 해가 지기까지 시간도 남았고, 마지막 촬영 의상을 따로 가져와도 되겠나? 근처에 있어서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뭐라고 하는 거지.

내가 일본어로 조금 말을 할 줄 안다고 해서 일본어를 알아듣는 건 아니었다.

cancam 관계자도 뒤늦게 깨달았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번역기로 번역해서 예진과 내게 보여주었고.

“의상 문제에 준비도 안 된 건 나중에 말하겠지만 저쪽 책임이라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그래도 컷 하나가 통째로 비어서 중복되는 것보다는......”

“네 뜻대로 해.”

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마지막’ 촬영이라는데 초점을 맞춰 나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얼굴이 환해지는 cancam 관계자와 포토그래퍼를 볼 수 있었다.

‘저 사람 표정이 밝아질 수도 있는 거였어?’

촬영하는 내내 보지 못했던 포토그래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는 걸 보고 떨떠름해졌지만.

옷을 가져오는데 대략 1시간 좀 안 된다고 하니.

“누나, 제 도시락 좀 가져다주세요.”

일단 밥이나 먹을 생각이었다.

정말 굶으면 촬영이고 뭐고 다 못하니까.

일단 본 건물 1층에 있는 대기실에서 따로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줬다. 마지막 의상이 올 때까지는 조금 쉴 생각이었고.

옷은 뭘 가져올지 모르겠다만, 나름대로의 컨셉이 있으니 그걸 해치지 않는 선에서 좋은 걸로 골라오겠지.

‘명색이 cancam인데.’

이 이상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굉장히 실망할 문제였다.

그렇게 1인용 쇼파에 앉아서 몸을 기대고 예진이 도시락을 가져오길 기다리는데

덜컥ㅡ

“도시락 가져왔......”

“안녕?”

“누구세요.”

문이 벌컥 열리길래 당연히 예진이 온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올 리가 없지.’

문을 연 사람은 예진이 아닌 처음 보는 남성이었다. 자연스럽게 일본어로 인사를 하길래 순간 어이가 상실해버렸지만.

‘저런 게 갸루 화장이라는 건가....?’

정체불명의 화장을 한 남성은 절대 촬영 스탭 중 한 명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눈대중으로 쓱 훑고, 경계하면서 말을 꺼내려는데

“이름이 뭐야?”

이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다. 이름이 뭐냐고.

‘그걸 왜 물어봐?’

또다시 어이가 상실했지만, 누가 봐도 아무 생각 없이 들어온 것 같아 인상이 찌푸려졌다.

‘한국의 치안이 그립네.’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방심해선 안 된다.

이렇다 할 일본어도 생각이 안 나니

“나가세요.”

영어로 말할 수밖에 없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되고, 지금 당장 나가주세요 아니면 신고하겠습니다.”

일부러 제대로 알아들으라고 또박또박 말했는데, 알아들었을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겟 아웃 하나만큼은 알아들었겠지 뭐.’

하지만 그럼에도 남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서 있자

“나가세요.”

밥도 못 먹고, 휴식도 취하지 못한 나는 예민해서.

문 쪽으로 걸어가 그대로 문을 닫아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전화를 해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람 부르려고 했는데.

‘부르기도 전에 왔네?’

어쩐지 남성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의 일본어가 들려왔고, 남성 또한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몸을 돌렸다.

그러자 보이는 건

‘포토그래퍼?’

안에 있는 나, 문의 경계에 서 있는 남성, 그런 남성의 뒤인 밖에 있는 포토그래퍼.

셋의 어정쩡한 위치에서 감도는 묘한 적막이 이어졌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겁니까? 누구시고요.”

날 선 포토그래퍼가 한 번 더 몰아붙이자 남성은 우물쭈물거렸고,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이 사람 팬이에요.”

“저는 당신 같은 팬 둔 적 없는데요.”

돼도 안 되는 개수작을 부리길래 단호하게 쳐냈다.

결국 남성은 힘없이 포토그래퍼의 손에 붙잡혔고.

‘...... 그래서 저 남자는 누구고 어떻게 온 건데?’

일본에 와서까지 이런 어이없는 일이 발생할 줄은 몰랐다.

“이 사람은 제가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네. 제가 경고했는데도 계속 안 가더라고요. 어떻게 된 일인지 나중에 알려주세요.”

최대한 쉬운 영어 단어를 통해 내 의사를 전달했다.

‘이게 뭐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렇게 포토그래퍼와 남성이 방을 떠나고 문이 닫혀 나는 다시 털썩 쇼파에 앉았다.

“가져왔어!”

그리고 이번에는 진짜로 예진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는 아까와 비교도 안 될 만큼 벌떡 일어나 도시락을 건네받았고.

내 밥.

‘일단 배가 너무 고프니까 먹고 말하자.’

쓸데없는 곳에 기력을 쓴 나는 도시락 1인분을 게 눈 감추듯이 먹어버렸다.

그리고 예진에게 아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자 예진은 그 말을 듣고 자리를 박차며 나가버렸지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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