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자로 살아가는 법-128화 (128/137)

〈 128화 〉 chapter 126. 심플 이즈 베스트

* * *

포토그래퍼가 데려갔었던 남성의 신원은 여기 식물원 직원이었다.

우연찮게 내가 촬영하는 걸 보면서 팬이 되었고, 팬심으로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왔다는데.

‘그게 말이 되나.’

하지만 내게 위해를 가하지 않아 경고를 주는 선에서 끝났다. 예진의 말로는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긴다면 무조건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다나.

그 말에 사색이 되어버린 cancam 관계자가 앞으로는 더 신경 쓰겠다면서 우리가 어딜 가든 덩치 좋은 여성 스탭을 한 명 붙여줬다.

‘어떻게 촬영이 제일 고될 줄 알았건만.’

촬영보다 더 다른 것들이 하나둘씩 문제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덕분에 하루가 참 길게 느껴지네.

“이걸로 갈아입으시면 돼요.”

“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마지막 의상.

하의는 그대로 가지만 상의는 다른 블라우스로 교체됐다. 가져온 세 벌 중에 매치해보고 가장 괜찮은 하나로 결정되었고.

‘일단 그 린넨만 아니면 되니까.’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여기저기서 나를 훑어보는 게 느껴졌다. cancam 관계자가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잘 어울린다며 말했고.

드디어 우리는 마지막 촬영을 위해 촬영 장소로 이동했다.

‘도시락 먹어서 배 나올까 봐 아주 살짝 걱정했지만’

옷이 옷이다 보니 그런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옆으로 걷고 있다가 내가 부르면 이쪽을 쳐다봐요.”

촬영에 접어들자 포토그래퍼는 제대로 할 심산인지, 순식간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진작 그러면 얼마나 좋아.’

비록 그게 모든 촬영을 통틀어서 마지막 촬영 때 한 말이 제일 많았지만.

그래도 오늘 찍은 결과물들이 대체로 다 만족스러웠기에 나도 끝까지 포토그래퍼의 지시사항에 따르며 최선을 다했다.

준비 과정에서 예상보다 시간이 더 소요된 탓에 촬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려고 할 때쯤

“수고하셨어요!”

“저 사진 한 장만.”

“아 네네.”

촬영이 끝났고.

야외 촬영이어서 전부 철수하기 바쁜 와중에 이때를 노렸는지 사진 요청을 하는 스탭도 두어 명 정도 있었다.

‘포토그래퍼한테 인사하려고 했는데.’

촬영이 끝나자마자 수고했다는 말만 짤막하게 남긴 포토그래퍼는 어느새 저 멀리까지 가 있었다.

‘이제 가야지.’

스탭들과 사진 촬영까지 다 해줬겠다, 옷을 갈아입고 예진과 함께 대기실로 가서 옷을 짐을 챙겨 나왔고.

자연스레 기다리고 있었던 cancam 관계자와 웃으면서 인사까지 한 뒤 예진이 불렀다는 택시를 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데.

우.... ㅇ!

“어디서 저 부르는 거 같지 않아요?”

식물원을 나가던 도중,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듯한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예진을 쳐다보니 그녀는 못 들었다며 고개를 갸우뚱했고.

‘일본에서 내 이름 부를 사람이 없으니까.’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하고 넘긴 뒤 다시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우욘!”

내 이름 부르는 거 맞았잖아?

다만 어렴풋이 들려왔었던 아까와는 다르게 정확히, 일본인 특유의 발음으로 내 이름이 들렸다.

몸을 휙 하고 돌려 들렸던 곳을 쳐다보자

‘카메라?’

어쩐지 익숙한 카메라를 든, 포토그래퍼가 차 안에서 창문으로 보였다.

마치 사진을 찍는 모양새.

“사진 찍으려는 거 같은데요?”

“뭐?”

내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 예진이 곧장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포토그래퍼를 보더니 나를 한 번 쳐다보고 슬금슬금 내 옆에서 떨어졌고.

‘퇴근길에 이 정도는 서비스지 뭐.’

나는 대충 포토그래퍼가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손을 흔들었다.

‘일본에서의 촬영이 완전히 끝났겠다 기분도 좋고.’

그렇게 손을 내린 뒤 활짝 웃어주고 이쯤 하면 됐다 싶어 몸을 돌리자 예진이 탄 택시가 내 앞으로 왔다.

“먼저 타기 있어요?”

“택시 불러놨는데 보낼 수는 없으니까.”

택시에 올라타면서 장난스럽게 묻자 예진이 눈치 보며 대답했다.

택시에 올라타 창밖을 보자 차에 타서 창문으로 나를 찍었던 포토그래퍼는 다른 곳으로 가는 게 보였고.

우리 또한 택시로 호텔까지 이동했다.

중간에 조금 졸았던 거 같긴 한데.

“으 피곤해.”

다행히 이틀 동안 진행된 첫 일본 화보 촬영이, 막을 내렸다.

****

“이거, 뒤표지에 넣으면 어떨까요?”

“흐음...... 고민되네. 버리기에는 아깝고.”

그렇다고 앞표지에 이어서 뒤표지까지?

편집장은 말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번 호의 앞표지는 모델 우연이 찍은 화사한 화보로 비교적 쉽게 골랐는데, 대뜸 날라온 사진 한 장으로 뒤표지까지 고민하게 되었으니까.

누가 봐도 정식 촬영본이 아니었지만 하기하라가 보낸 사진은 눈에 밟혔다.

‘뒤표지는 예정되어 있던 게 따로 있었는데.’

하기하라에게서 온 사진, 그러니까 모델 우연이 노을이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은 굉장히 잘 나온 사진이었다.

역시 하기하라, 스튜디오보다는 야외에서 찍은 것들이 훨씬 낫네.

하지만 정식 화보 사진이 아니어서 잡지 구성에 넣을 수는 없었다. 애초에 넣는다고 해도 너무 생뚱맞고.

그저 이대로 버려질 사진 자체가 조금 아까워서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아까 누군가 꺼냈던 뒤표지에 넣자는 말은 그나마 현실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한다면야 할 수 있으니까.

‘사이즈 맞춰서 상단에 넣으면.....’

괜찮을 것 같다.

다른 사진들은 전부 제쳐두고 사실 편집장이 꽂힌 사진은 다름 아닌 그 노을 사진이었다.

옷도 평범하고, 배경도 평범하지만.

그래서인지 더 생동감 있고 빨려 들어갈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원래 뒤표지에 들어간 사진을 한 번 힐끗 본 편집장은 이내 다시 우연의 노을 사진을 보면서 결정을 내렸다.

“뒤표지에 넣는 걸로 하지. 대신 그러면 앞표지를 바꿔야겠어.”

앞표지가 원래는 꽃밭에 있는 사진이었지만 뒤에 있는 노을 사진을 생각했을 때 조금 이미지 바꿔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앞표지는 스트릿 패션의 스튜디오 촬영본 중 하나로 변경되었고.

들어갈 구성도 살짝 손본 뒤, cancam의 최종으로 7월에 발간될 패션지를 받아들었을 때는

“...... 괜찮네.”

비로소 모두가 만족할 만큼의 결과물이 완성되었다.

****

이제 슬슬 더워지는 날씨 탓에 옷차림이 가벼워진 사람이 많은 7월 중순.

여자는 일정을 마치고 밖을 돌아다니다가 햇빛을 피하기 위해 어디든 들어가자는 생각으로 서점에 들어갔다.

‘이제 살 거 같네.’

평일 낮이어서 그런지 서점 안에는 사람은 없었다.

알바생은 인사만 간단히 한 뒤 여자에게는 별다른 관심을 주지 않았고.

‘하기야 같은 여자끼리 뭐.’

에어컨이 시원하게 틀어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실내여서 밖에보다는 훨씬 시원했다.

이왕 들어온 거 좀 둘러보다 가야지.

살 건 딱히 없었다. 7월에 사야 할 잡지들이나 책들은 이미 동생을 시켜서 사 왔으니까.

그렇게 대충 서점 내부를 돌아다니다가 이내 생소한 패션 코너까지 오게 된 여자는 문득 어느 잡지 앞에서 멈춰 섰고.

“누구지?”

잡지의 표지를 장식한 처음 보는 남자의 얼굴.

하지만 이 정도의 얼굴을 여자가 모를 리 없었다.

그것도 그럴게 여자는 잘생긴 남자 아이돌을 덕질하면서 일본에 모르는 잘생긴 남자 연예인이 없을 정도로 판을 꿰뚫고 있었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잡지를 들어 가까이 가져왔다.

그러자 다른 잡지들 속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던, 굉장히 예쁜 남자가 있는 표지가 속속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당장 이케부쿠로에 가면 이런 스타일의 옷을 입은 녀석들이 반이지만.’

도도한 표정을 지은 채 올블랙의 특이한 디자인이 되어 있는 옷을 입은 남자는 거기에 없었다.

메인 표지면, 분명히 안에는 적어도 몇 장이 더 있을 텐데.

표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살까?’

얼마인지 확인하기 위해 잡지를 뒤집자

“와......”

또다시 시선을 강탈한 남자의 사진.

앞표지를 장식한 남자가 뒤표지에도 있었다.

하지만 앞표지와는 전혀 다른, 그러니까 노을을 배경으로 아주 맨투맨을 입은 채 찍은 사진인데

‘웃고 있어.’

노을이 지는 배경으로 활짝 웃고 있는 남자는 다른 의미로 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잡지를 돌려가며 봤지만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분위기가 달랐고, 얼굴은 똑같은데.

“이거 결제해주세요.”

결국 원래 예정에도 없었던 지출을 하게 하게 됐다.

‘적어도 이 남자의 정체, 아니 이름이라도 알아야겠어.’

잡지는 집에 가서 뜯어보는 걸로 하고, 일단 가는 동안 지하철에서 서칭을 했다.

패션지 쪽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가.

‘뭐야 꽤 유명하잖아?’

잡지 이름을 검색하자 나오는 글들이 꽤나 많았다. 반응들도 대부분이 좋기는 했는데

‘한국인이네?’

일본인이 아니었다.

몇몇 글들로 인해 잡지 속 남자의 국적이 한국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불편함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여자는 신경 쓰지 않았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예쁘면 됐지.”

작게 읊조린 여자는 지하철에서 내릴 때까지 잡지 속 남자에 대한 검색을 멈추지 않았다.

‘이름은 우연.’

그리고 드디어 집에 도착해 비로소 잡지를 보게 된 순간.

“허.”

방 안에 붙어 있는 일본의 한 남자 아이돌 포스터가 오징어 포스터로 보이기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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